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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물살에 가만히 몸을 맡기면서도 별스러운 재주로 계곡의 바윗돌들을 우아하게 피해 흘러내려 가다가, 혼응토를 틀 지어 굳혀 만든 배수로로 진입하여 또 한참을 꽤 빠른 속도로 구불구불 통한 끝에 어느 건물의 원형 개구부로 빨려 들어가 사방이 높다란 벽으로 가로막혀 물이 머리보다 높게 차오른 정방형 수직 공간에 첨벙 뛰어들었다. 삼면의 벽에 성곽의 총안처럼 빽빽이 뚫린 둥근 구멍마다 물이 콸콸 쏟아지고, 전면이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진 남은 한 벽은 청백색으로 발광하는 물에 비쳐 불 꺼진 건물의 특색 없는 내부가 새벽 골목길같이 침침하게 내다보였다. 유리 벽 너머는 빈 통로였는데, 그 건너로 마주한 단단하고 매끄러워 보이는 연회색 벽에는 수많은 이가 몸을 기웃거리면서 우리를 들여다보는 듯 반투명한 인영들이 흔들흔들 늘어서 있었다. 빛의 장난으로 인한 건지 그림자들의 머리께는 자신이 맞댄 벽의 색깔대로 회백색을 띠고 아주 가느다란 윤곽선으로 배경과 어렴풋이 분간되는 데 반해,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진해져 발치는 진한 검은색으로 붙박여 있었다. 우리가 잠긴 수조에서 발하는 푸른빛이 그들이 늘어선 벽의 아랫부분부터 밝히며 점점 옅게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이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머리로 올라갈수록 희미해지는 존재들이 우리를 주시하는 듯한 기묘한 착시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디에서 비롯된 누구의 그림자들인지를 밝혀내야 하겠으나 시야가 한정된 우리로서는 건물 내부의 구조를 다각도로 조망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푸르게 발광하는 용액 속에 담긴 실험체 신세가 되어 어딘가에서 옹기종기 모여 내려다보는 학자들의 관찰 대상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더 잘 안다. 삶의 영역에 연옥의 잔영을 드리운 우리는 생명과 실존의 범주를 모호하게 흩트림으로써 과학과 철학의 확고한 흥미 대상이 되어 끈질기게 존재하는 개별 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학자들이 연구하게 될 것이다. 연구 결과는 우리가 현 상태에 이른 과정만큼 인류에게 치명적일 테다. 누구는 특별한 개인의 의식이 영위하는 위대성을 결론으로 도출할 거고 누구는 사람의 생애를 고통스럽도록 연장하는 영생의 비결을 발견할 것이다. 과거 이것은 더는 인간이 아니라고 간주하던 영역까지 인류가 넘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생환은 나와 동반자에게는 눈물겨운 재회이더라도 이 나라와 인류 전체에는 돌이키지 못할 패착이 아닐 수 없다. 그림자들은 한 명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우리를 수술대에 눕히고 결박한 뒤 기계 팔을 조종해 해부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비인도적인 상황에 놓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희원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우리의 육신이 함께 떠내려온 유독한 청백색 용액에 완전히 용해되기를 기다리는 중이리라는 확신이 샘솟았다. 적대적인 환경에서 개체 개별이 합일화되어 새로운 전체로 발돋움하는 게 그들에게는 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측은 우리가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도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인지한다는 전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우리는 이미 하나인 듯싶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개별적이던 시야가 하나로 합쳐진 것은 명백했다. 우리의 시선은 물에 융해되었다. 계속해서 물이 차오를수록 시야가 더 확장되며 여러 방향을 동시에 볼 수 있음이 그 증거다. 그러나 우리의 두 육신은 물속에서 아직은 분해되지 않고 비록 여전히 만신창이지만 있는 그대로 존재했다. 우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에 잠겨 미지의 관찰자들에게 보기 좋도록 수중에 둥실둥실 서 있었다. 여전히 서로를 꽉 껴안은 채로. 그러나 익사체처럼 숨을 쉬지 않고, 말하거나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단지 감각이 우리의 육신을 벗어나 수조를 채워 가는 물에 전이되었을 뿐이다. 의식은 여전히 개별적이고, 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기억하는지 전연 들여다볼 수 없었다. 다만 나와 다른 의식, 그러니까 존재의 검은 면사포에 가려져 도무지 들여다볼 수 없는 동반자의 자아와 함께 신비로운 물의 시야를 공유한다는 본능적인 확신만이 내게 주어져 있었다. 수면에 비친 천장은 아동용 그림 동화 같은 화풍으로 그려진 수도의 지평선이, 네 개의 드높은 탑과 옛 왕궁이나 사대문 같은 도시의 주요 거점들 그리고 내가 방금 빠져나온 바위산을 비롯한 산간들이 각진 테두리를 따라 빼곡히 펼쳐졌고 중앙은 새파란 하늘과 뭉게구름들로 채색되어 있었다. 이 아기자기한 천장 벽화가 묘사한 수도가 죄다 초토화된 오늘에 비추어 봤을 때 진부하도록 청명하고 평화로운 도시의 심상은 내게 잔혹한 조롱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갇힌 이곳은 어디일까? 이리도 간단히 바위산의 굴곡진 손아귀를 벗어났다는 예기치 못한 사실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가 놓인 낯설고도 무력한 환경에서 나는 또다시 어떻게 현재를 헤쳐 나가야 할지를 불안스레 고민해야 한다. 시작부터 이제 끝장이라는 절망. 매일 매 순간 오늘 같은 무력감이 새로운 시험 앞에서 홍수처럼 덮쳐들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잠겨 쉽사리 저항을 꿈꾸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앗아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목매달려 죽은 자기의 신체를 잃어버리고 두 개의 빈 올가미로 남은 각각의 의식같이 나란히, 그러나 외롭게 흔들거리며 존재했다. 시야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나와 그가 단절되어 소통할 길이 없다는 점이 내 불안감을 키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기억들로 이루어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나는 물에 잠긴 몽롱한 정신 속의 한 시선이 되었다. 나의 내면에서 정신을 퍼뜩 깨우는 경계경보 소리가 울린다. 나는 전란을 염려하는데, 그것은 이 나라와 저 나라의 긴장 관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평상시 내가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버릇 때문이다. 전쟁을 향한 불안감이 극도로 커지다가 순간 일소되면서 둥글고 노란 보름달의 심상이 떠오르고, 그다음으로 나타난 부산물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다가 월구의 뒤편으로 넘어간다. 달은 동반자의 머리가 된다. 그의 낯은 운석이 떨어진 자국으로 얽었지만 휘영청하고, 표정을 읽을 길 없이 무정하기만 하다. 그는 창가에 서 있는데, 얼굴이 그러하다 보니 바깥을 내다보는지 비밀스럽게 그를 훔쳐보는 나를 돌아보는지 모르겠다. 창밖으로는 대기가 존재하지 않아 온통 검은 하늘 아래 월면같이 창백한 대지가 펼쳐져 있다. 지평선에 걸린 바위산에는 벼룩같이 작은 세 사람이 봉화를 피우고, 나는 그 불이 한 불쌍한 노인을 연료로 연소한다는 걸 깨닫는다. 산이 땔감으로 쓸 나무 한 그루 없이 벌거벗어서일 것이다. 돌연 궤도 없이 질주하는 전철이 전조등을 빛내며 새까만 허공을 날아 산허리를 빙글빙글 감아 돈다. 어느새 내면의 시선은 열차의 덜컹거리는 내부로 입장하여 아무도 없이 빈 좌석 중 하나에 앉아 차량들이 연결된 문 없는 통로로 끝없이 이어지는 종심 깊숙이를 내다본다. 나는 무한히 확장하는 통로 속에서 한 익명의 사람을, 검은 윤곽을 가지고 몸을 기울여 내 쪽을 건너다보는 그를 목도한다. 이 사람은 누구지? 갑자기 통로가 쪼그라들면서 그가 물밀듯이 가까워져 온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그의 눈은 동공이 강렬한 빛에 타서 구멍 나 있다. 내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니다. 동반자도 아니다. 그는 단독자다. 바로 내 쇠진한 육신이 껴안고 있는 자다. 내가 사람을 착각한 것이다. 그 순간 눈부신 빛이 번쩍하고 차창들이 깨지면서 내 시선은 바깥으로 빨려 나간다. 붉고 노란 화염 구름이 지평선에 피어오르고, 산허리를 돌며 끝없는 원환을 그리던 전철은 연기가 되어 팔방으로 퍼져 나가며 더 큰 원으로 확장된다. 나는 상승한다. 이 나라와 저 나라를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로. 두 나라가 자리한, 하지만 평소 알던 것과 달리 회백색 대지로 이루어진 반도의 주요한 거점이 속속들이 폭발로 터져 나간다. 두 수도와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들, 원자력 발전소, 둑들이 파괴된다. 사태는 이 나라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저 나라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어떻게 누가 이 모든 치명적인 사태를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내 의문에 대답하듯 곳곳의 버섯구름이 뭉게뭉게 모여 한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 그는 판윤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곧 가면을 벗어 던진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안다. 그는 반도의 유일한 나라님이다. 그는 새 나라의 왕이며 폐허의 주인이다. 그가 손짓으로 계엄령을 내린다. 공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개인의 모든 행위가 그의 손놀림 한 번에 금지된다. 그러나 그의 명령을 받들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국민이 죽거나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만족하며 다시 폐허의 일부로 되돌아간다. 뒤이어 폐허가 휘장처럼 걷힌다. 그리하여 다시 비어 버린 검은 허공에 드러난 동반자가, 즉 크고 환한 보름달이 자애로운 성모처럼 부산물을 품에 안고 선 모습을 마주한다. 거기에는 내 자리가 없다. 그들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금 덤덤히 재확인한다. 이내 시선은 힘을 잃고 심연의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그 끝에 닿는 순간 검은 배경은 신비롭고도 유해한 모종의 푸른빛으로 감싸이며 대양으로 변모하고, 나는 수중 깊숙이 들어가 심해에서 부패한 두 익사체를 발견한다. 둘은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고 꼭 붙안고 있다. 바다는 곧 썰물처럼 빠지면서 달을 향해 나선을 그리며 높이 치솟고, 둘은 삼면이 벽으로 둘러싸이고 한 면이 유리로 된 수조에 남겨진다. 나만의 독자적인 시선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나는 다시 수조 속의 물 그 자체가 되어 유리 벽 바깥에 늘어선 침묵하는 그림자들을 마주했다. 이것은 꿈도, 예지도 아니다. 내가 지난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깨닫고자 부단히 사유하는 과정에서 반추된 기억들이 직조한 심상일 따름이다. 파고들 수 있는 상징성을 지닌 듯한 심상들은 이제 모조리 사라졌다. 한데 왜 의미심장한 환영 속에 머무르는 거보다 침묵하는 현실에서 사는 게 더 견딜 수 없는 것일까?
왜냐하면 현실의 침묵은 환상보다 더 소란스럽고, 그런데도 나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까닭이다. 현실은 매번 나를 배반하고 무위로 되돌아가기를 고집한다. 내가 동반자가 아니라 애먼 익명의 단독자를 구했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무지몽매한 나의 덧없는 시도들이 이루는 반경에는 정작 내가 갈구하는 대상이 없다. 내 인생은 잔혹한 소거법 같다. 새롭고 더 넓은 원의 반경을 그려 나가기 위해서는 지난 반경에서 일군 성과를 부정해야 하는 듯했다. 매 순간 국면은 더 복잡해지고 새로워졌다. 내가 영위하는 지금이 삶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매순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나에게 주어지는 원점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반경의 지난함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하다. 내가 여태 진정으로 동반자를 마주하지 못했다는 것, 단지 그뿐이며, 언제나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와 같은 소여의 문제가 나에게만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밀착해 있으면서도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대에게도 주어졌음은 자명했다. 내가 봉착한 상황을 함께하는 타인이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양가성을 나는 항상 어려워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타인을 향한 내 상상력의 부족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를 충분하게 낱낱이 알지 못했다는 당연한 한계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하물며 지금과 같이 일말의 소통도 기대할 수 없는 정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모든 사람이 내가 될 수 없듯 나의 동반자 또한 모든 사람이 될 수 없다며 그에게 거절의 말을 건넬 수도 없다. 또한 그런 오만한 선언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반문들을 낳을 테다. 왜 모든 사람이 각자의 나라는 사실이 외면되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단 한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동반자라는 개념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물론 이 반문들은 두 개인이 서로를 특정 지어 관계 짓는 방식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렇게 맺어진 한 관계가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인물로 교체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결합 상태라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서로를 구별 짓는 것들이 사라지고 모두가 예외 사태의 공통 상흔을 지닌 현재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동반자라는 개념이 특별한 한 대상에게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사람이 관계 짓게 된 시공간적 현실에 종속됨을 말하는지도 몰랐다. 한 사람이라도 아쉬운 때에 서로 간의 협력 관계를 끊는 것은 각자가 지니는 원과 관계없이 어리석은 짓일 따름이다. 이러한 강제적인 통일, 예컨대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죄다 폐허가 됨으로써 그간의 적대와 경계 지음이 무용해져 저간 잃어버렸던 공통과 동등의 형질을 회복하는 것 같은 비참 속의 연대를 반기기에 나는 소인배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동반자와의 지난 기억은 이제 내가 추구해야 하는 활로에서 방해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과거 없이 사는 나를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생존과 생식을 추구하는 생명체가 아니었다. 지난 기억으로 이루어진 관념적인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지금에야말로 나는 생명으로서 지니는 실존으로부터 멀어지고 형이상학적 말장난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 갔다. 자신을 더는 육적인 주체로 보지 않게 되는 이와 같은 자각은 의식과 응시만이 제 기능을 하는 기묘한 법칙을 지닌 물에 잠긴 상태에서 비롯된 영향일 테다. 나는 언제고 지금처럼 잠수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두 발이 밑바닥에 닿는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져 수중을 부유하는 것을 선뜻 받아들이기 무서워 그간 수영도 배우지 않았다. 그것은 제 일부로 인지될 정도로 자연스럽게 여겨 왔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영향권에 몸을 내맡기는 순간 기어코 자신의 무게를 잃고 물과 같이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는 유체가 될 거라는 거부감에 의한 것이었다. 개별적인 감각이 둔해지고 서로를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름은 더는 개체로서 존재하지 않고 군체의 일부가 됨을 의미한다. 이 수중에 계속 잠겨 있다가는 단독자와 함께 물의 일부로 용해되어 푸르게 발광할 것이다. 나는 더는 내가 아니고 그 역시 더는 그가 아니게 될 것이다. 지금은 육체가 채 분해되지 않아 서로의 의식이 아직 합치되지 않고 괴리된 일종의 과도기인 듯했다. 나는 여기서 벗어날 길을 몰랐다. 내게 아무 힘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뜬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자는 아무래도 수조 바깥에 늘어선 그림자들의 주인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점점 수가 늘었고, 이제 줄줄이 늘어선 정도가 아니라 벽 한 면에 가득 들어차 소리 없이 북적댔다. 그들에게 우리가 진기한 구경거리임이 분명했다. 그들이 어딘가에 선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니라 그림자가 된 누군가라는 짐작이 문득 들었는데, 그러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들 또한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흔히들 얘기하는 혼령, 영혼인 것일까? 나와 단독자 또한 육체가 마저 녹으면 마찬가지로 한 벽에 수많은 이와 무한히 겹칠 수 있는 평면적인 혼으로 변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 세계의 여러 전설이나 책에 의하면 그렇게 한 공간에 서린 영혼들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욕망으로 산 자를 영원히 기다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작가라는 적절한 대상을 지금 눈앞에 둔 셈이나, 내가 놓인 처지로 예상하건대 그들의 기담이 글로 적힐 가망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온갖 사람들의 재담을 수집하는 이야기꾼이 아니라 소설가다. 그들의 이야기가 적힐 가치가 있더라도 내 영감을 비껴가는 한낱 타인의 삶일 뿐이다. 그것은 내가 유달리 자의식이 과잉된 작가라서가 아니라 시대가 지나 진정한 이야기꾼들이 멸족해서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다릿돌을 현시대가 들어내서다. 그래서 작금에는 모두가 기약 없이 이야기꾼을 기다리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직접 책으로 펼쳐 내고자 우후죽순처럼 들고 일어나 작가를 자처하지 않았던가? 오늘날의 사태로부터 살아남아 잿더미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이들은 다시금 서로를 향해 다릿돌을 놓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에도 인류를 다시 연결하고 모두를 고립에서 구원하는 이야기꾼의 역할은 나에게만큼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내 불능 상태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작가가 필요하게 될 그날에 나는 살았든 죽었든 더는 작가가 아니게 될 것이다. 나는 읽힐 필요 없이 망각될 테다. 다름 아니라 지난 글쓰기의 행적에서 앞날을 충분히 예견하기를 실패한 까닭이다. 무참히 실패한 작가에게 새로운 기회는 없다. 나는 재앙 다음의 이야기를 생각 못 하고 맹목적으로 자기가 글쓰기로 목도할 수 있다고 믿은 끝에만 매달렸다. 왜 나는 항상 무엇이든지 끝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현재의 나 자신을 되돌아보건대 끝이란 없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내게 부여한 관성일 터다. 이야기와 달리 소설은 항상 결말과 함께 그 세계가 끝이 나며 소멸했으니까. 그것이 내 오만의 본질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세상을 소설로 대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수조의 물은 계속해서 차오르고, 물에 전이된 우리의 시야는 차차 조금씩 위로 확장되었다. 더 높이 올려다보아도 숨겨진 비밀 공간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림자의 주인을 마주하기는 요원한 성싶었다. 나는 그들이 먼저 우리에게 말을 걸기를 기다렸다. 단독자도 마찬가지 신세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단상에 빠져 있는지는 모르겠다. 앞으로도 나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나밖에 모르니까.
〈아닙니다. 먼저 당신이 내내 우리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벽의 그림자 중 하나가 대답했다. 아니면 모두의 하나 된 목소리일지도. 그들의 목소리는 외부 세계를 통하지 않고 내 의식으로 곧장 전해졌다. 그들은 내 단상들을 듣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기계처럼 쉬지 않고 생각하였지요. 그래서 우리가 다 듣고 있노라고 넌지시 일러 줄 새가 도통 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촉광이 일렁이는 것처럼 다 함께 고개를 흐느적거리면서 웃었다. 그러자 나는 그들을 윗사람의 혼잣말이나 자문에도 답하는 예의 바른 비서처럼 여기고 우리가 있는 이곳이 어딘지 의식 속에서 궁금증을 떠올렸는데, 과연 〈이곳은 도서관입니다〉라는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당신이 한 시민과 함께 잠긴 장소는 교육용으로 설계된 일종의 양수표입니다. 지구 온난화의 현황을 도서관 이용자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여 줘 경각심을 심어 주고자 하는 장치입니다. 수조의 밑바닥은 이 나라의 과거 평균 해수면 높이를 의미합니다. 이 나라가 과거에 견주어 어느 높이까지 잠겼는지를 직관적으로 가늠할 수 있지요. 그렇습니다. 수위가 천장에 닿는 순간 이 나라의 수도는 물에 잠길 겁니다. 한데 당신은 동거인이 이곳 도서관에서 일하였는데도 한 번 오지 않았나 봅니다. 도서관이 보존하는 대상을 생산하는 작가가 정작 이곳을 멀리한다는 건 그렇게 희한한 일은 아닙니다. 사삿사람이기만을 자처하는 당신에게 읽는 행위를 공적인 영역에 내맡기는 건 불편하고 낯설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우리를 대하는 바는 일견 적확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랫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윗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개인으로서만 머무를 수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당신이 수조에 갇힌 상황은 매우 비유적입니다.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빠져나올 줄 모르고, 제 생각에 잠겨 가며, 곁사람의 안위도 모른 채, 누구에게나 보이는 눈앞 풍경을 자신이 전유했다고 착각하는 모습이 모두에게 전시된 정황은 흡사 한 사람을 위해 지옥에서 특별히 고안한 독방처럼 여겨집니다.〉 성심껏 답변하면서도 나를 도발하는 그들의 말에 나는 물을 것이 많았다. 한데 그들은 내가 미처 떠올리기 전에,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의문들을 신묘하게도 먼저 알아차린 듯 선제적으로 긴 대답을 이어 갔다.
〈그렇습니다. 이곳 도서관은 당신이 살던 동네에 있는 바로 그곳입니다. 어떻게 공간적으로 떨어진 수도의 진산에서 물길을 통해 이곳으로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우리에게도 설명이 쉽지 않습니다. 산과 도서관 건물을 위치가 정해지지 않은 장소라고 정의하고 이 두 공간을 편의적으로 연결하여 연상하는 것은 간편할지는 모르지만,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당신이 쉽사리 산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곳 도서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두 장소의 공통분모는 그것뿐이고, 도리어 우리의 영역에 침범한 당신에게 따져 물어야 할 부분입니다. 아닙니다. 간밤의 강우량 또한 양수표의 수위를 유의미하게 높일 만큼 상당하지 않습니다. 애당초 양수표의 수위 조절은 매년 지구의 날에 행사를 열어 이곳 도서관의 이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해 기상대에서 갱신한 수치만큼 수조 삼면의 벽에 설치된 수십 개의 배수구로 수돗물을 수동 공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태 속에서 모종의 물리력에 의하여 산과 도서관의 배수로가 이어졌습니다. 이곳 도서관은 이제 원래 자리했던 동산 비탈면에 비하면 드높다고 할 수 있는 수도 진산의 넓게 펼쳐진 산자락 가운데 한 곳에 위치합니다. 이제 당신이 살던 동네에 관해서는 이곳 도서관에 속박된 우리는 모를 일이고, 알아야 할 관련성도 부재합니다. 그럼에도 추론하자면, 동네가 자리한 구역이 마치 지각의 두 판이 수렴하여 섭입이 발생하듯 산과 도서관의 수렴 경계 하부로 밀려들어 감으로써 꺼져 소멸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동거인도 어제까지만 해도 이곳에 있었습니다. 물론 그 사실이 그의 소재에 관하여 어떤 암시를 준다는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우리에 속하지 않을 뿐 그 외에 대해서는 확답할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요컨대 그가 이곳을 떠났는지 그러지 않았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속하기를 거부한 탓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발생한 것만큼은 자세히 알 수 있지만 외따로 떨어지기를 자처한 이에게까지 그 앎이 닿지는 않습니다. 어찌 모르십니까? 당신 같은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에 우리가 없듯이 우리의 세상에 당신 같은 이의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신이 부둥켜안은 상대가 동거인이 아닌 점은 확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대는 당신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운 한 평범한 시민인 까닭입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더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사념을 감내했듯, 당신 또한 우리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감당해야 합니다. 당신이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그것을 써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각자가 보존된 한 권의 책입니다. 당신이 읽어 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에게 우리가 말하는 연유란 그것 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으며, 또한 그래야 당신의 거침없이 오만방자한 사고를 틀어막을 수 있어서입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중에 당신을 마주했던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합니다. 당신 책을 읽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중에서 당신은 그 사람을 알아보겠습니까? 당신은 기억합니까? 우리가 언젠가 교차할 거라고 말한 것을요. 우리는 당신을 알아봅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닌 듯하군요. 그때 당신은 우리 중 하나가 지닌 그만의 외양 때문에 그를 알아보았다고 착각했지만, 실은 그것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모든 외양을 벗어던진 지금에 이르러서도 당신은 자기가 과거 우리에게 씌운 헛된 심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역시 진정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거고요. 우리는 당신이 알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이 평소 알아보지 못했던 그 사람입니다. 우리를 구별하고 차별하던 제각각의 외양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게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동등하고 공통됩니다. 우리는 더는 서로 간의 격차로 인하여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모습이니까요. 영혼의 일격이라는 걸 아시나요? 우리에게는 그러한 개념이 있습니다. 영혼이 없다고 여겨지는 어느 평범한 사람을 경멸하고 외면한다면, 언젠가의 말로에 그 사람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홀로 버려지도록 의도적으로 방치한 상대에게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의 일격을 가합니다. 당신네에게 일격을 가할 영혼이라는 게 우리에게도 있기를 평소 희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혼만 남았습니다. 당신은 일격을 받았습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변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노동자 계급 출신인 것은 익히 잘 압니다. 그게 당신이 표현의 권력을 독점하려 한 죄과를 가볍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제 계층을 벗어나 사고하였습니다. 당신은 정직하고 진솔하게 써야 했습니다. 그 부분을 망각하는 것은 전부를 잃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게 다니까요. 사랑한다고 말하고, 슬프다고 말하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이요.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애덕이 선제적으로 발생해야 가능한 부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곳은 도서관, 즉 보존고입니다. 사태 이전에만 해도 그 보존의 대상이 당신의 무용한 책이었음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도서관을 지키고자 남은 사람들입니다.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외 사태는 사람들에게 각기의 사명을 일깨우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에 따라 타성적으로 책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책은 특별한 지위를 지닙니다. 지난 역사에서 종종 권력자에 의해 자행되었던 모든 분서 사건은 당시에도 옳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긍정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이유라도요. 살인자의 책도 출간된 이상 영구적으로 보존될 가치를 지니고, 심지어 분서를 지시한 권력자의 자서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사태에서 책이 지니는 영구불변의 지위가 쉽게 위태로워지는 것도 사실이기에 우리는 대비하였던 거지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아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책은 죽지 않습니다. 도처의 도서관에 같은 책이 있고 무한히 복제됩니다. 게다가 책은 우리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책은 자신을 자아낸 작가를 변호할 뿐입니다. 작가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1인의 범주를 넘는 자의식으로 표현의 권력을 독점합니다. 우리가 보전해야 하는 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죽기 쉬운 책입니다. 지독히도 범상하여 당신 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는 책입니다. 책은 언제나 진실의 일부만 담지요. 작가라는 관찰자와 언어라는 형식의 한계 탓으로 책에 담기는 부분보다 생략되는 요소가 많다는 점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야 하는 책은 세계와 진리, 생명 그 자체입니다. 바로 우리니까요. 우리는 언어가 이루는 형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바깥에 존재하는 진실입니다. 당신이 그 말을 선뜻 이해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내면의 언어로 대화하는 지금도 우리의 존재를 곡해하고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 우리가 되지 않고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마주할 가능성이란 도무지 없습니다.
그럴지도요. 보다시피. 육신을 잃은 것을 죽음이라 한다면 어느 정도는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사건을 아직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때 미처 시체가 되지 않았지만, 육신이 없고, 영혼이라 부르는 것, 우리의 원본, 즉 본질이 이곳 벽에 서려 있습니다. 도서관은 바깥과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법이니까요. 누구는 도서관을 과거의 수장고로만 볼 터나, 또한 미래의 현전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곳은 마치 공동묘지와도 같습니다. 과거에 매장된 이들도 있지만 다가올 미래에 묻힐 이들을 위한 묘혈도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요. 죽음에 이른 육신은 시체가 됩니다. 그리고 죽은 이의 영혼은 시체를 누이는 구덩이 자체가 됩니다. 여태껏 시신은 없으므로 우리는 빈 구덩이인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당신과 우리는 공통된 성질을 지닙니다. 당신은 수중에 매장되어 오염된 육체에서 빠져나와 물 자체에 스며들었지요.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미리 대비된 한시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죽기 전에 미리 육신으로부터 빠져나왔는데, 제 몸이 어딨는지는 모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제 몸을 찾아 헤매는 망령이 아닙니다. 이곳 도서관 내부에서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사태 속에서 육적인 존재가 얼마나 제한적이고 속박되었는지를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고통을 모릅니다. 훼손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해방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유혈 혁명들이 내걸었으나 필연적으로 실패했던 재산과 계급 그리고 신체의 해방을 우리는 한시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한시성은 우리에게도 아쉬울 일입니다. 그럼에도 한 이상적인 본보기로서 이곳 도서관의 우리가 예외적으로 선택되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사태 속에서 피어난 기적적인 한 예입니다. 이것이 기록되어 후대에 널리 기억될지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왜곡할 테니까요. 우리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믿습니다. 우리는 비록 일시적이지만, 해냈습니다. 우리의 상태가 보여 주는 교훈이 우리에게만 임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인류에의 책임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에 지대한 관심과 긍휼을 매상 느낍니다. 그러나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인류가 아닙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이 사태를 일으킨 주동자들도 인류가 아닙니다. 인류는 바로 우리입니다. 그들의 죄를 두고 우리에게 연좌제를 적용하는 일은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부당합니다.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해를 끼치기에는 극히 미미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존재, 그것이 인류고, 우리입니다. 원죄를 안은 자들을 우리로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네를 거부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네가 일으킨 사태를 무릅쓰고 피어난 이상향입니다.
앞으로 발생할 집단적인 죽음만큼은 무릅쓸 수 없으리라는 전망은 우리가 도서관에서 이루려는 과업의 실패 또한 예정되었음을 상기시키는 듯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죽음은 전적으로 패배를 의미할 겁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승리는 작가와 책이 전유하겠지요. 우리의 죽음은 동시다발적일 것입니다. 너무도 끔찍하지만, 그 죽음마저 생전의 우리처럼 진부할 겁니다. 생애 내내 우리 존재가 드러내는 듯하던 무의미는 죽음 속에서도 유지됩니다. 그러나 책의 목숨은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있고, 한 권이라도 전쟁통을 피해 살아남으면 다시금 예전의 영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작가가 붙잡혀 거열형이라도 당한들, 끝까지 숨겨진 저서 한 권이 그를 복권할 겁니다. 그 죽음은 유의미할 테지요. 필경 결과적으로 인류를 해방한 위대한 죽음으로 기록될 수도 있습니다. 책은 당신을 살릴 수 있습니다. 또는 당신이 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지난 문학의 역사에서 파생된 예들을 돌이켜 보건대, 이는 충분히 지켜질 수 있는 서로 간의 언약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말하는 동반자란 사람이 아니라 당신의 저서인 셈입니다. 한데 우리에게는 누가 그런 구원의 약속을 한단 말입니까? 우리도 특별한 1인을 염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때로는 절대자로, 때로는 자애로운 반려자의 심상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바깥의 사람을요. 우리 바깥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요. 우리는 상상 속의 그 사람에게 우리가 천부적으로 지니는 몇 가지 존엄한 권한을 이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세간에 맞서 이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것이라고요. 우리의 처분은 전적으로 이 사람에게 달렸다고요. 이 사람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이자에게 종속되었다고요. 우리의 의지는 없다고요. 이와 같은 극단적인 상상은 현실과 관계없이 달콤한 소속감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를 부정합니다. 우리가 왜 자기에게 자신의 실존을 위임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연유는 간단합니다. 그자는 우리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가 느끼던 밀착감은 허상이 되고, 그자는 우리로부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집니다. 당신은 자신의 동반자를 찾아 헤맨 비참의 여정 끝에서 한 타인을 얻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자를 구한 거로 여겨집니다. 그 결과 당신에게는 무슨 보상이 주어졌습니까? 그자는 당신의 동반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그자와 함께 또 다른 곤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자는 지금 당신에게 무슨 말을 건넵니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습니다. 당신은 타인의 침묵 속에서 우리라는 공동체의 호칭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속했던 울타리에서 벗어난 당신을 모든 타인은 끝끝내 배반하며, 결국 남이라는 사실만을 재확인시킵니다. 당신의 패착입니다. 우리 바깥에 우리는 없습니다. 오늘날 같은 사태에서 우리라는 지위와 개념은 일견 쉽사리 혼동된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혹자는 서로 이어져 있지 않던 개인이 재앙을 통해 연결되고 연대할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우리는 여러 시기를 겪었지요. 전염병 시기와 예외 사태를 경험하고 현재는 계엄령이 내려졌습니다. 모두가 집에 머무르며 공적 활동을 억눌러야 하는 예외적인 시기들은 공동체의 결속을 무위로 되돌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당신 같은 사람은 모릅니다. 항시 예외는 상례였고 법이 적용되는 모든 영토는 상시로 계엄이 내려진 상태였다는 것을요. 이번 기회를 틈타 계엄이 선포된 게 아니라 이미 헌법상으로 선포되어 이 나라에 뼛속 깊이 규정된 계엄법에 오늘날이 적용된 것입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는 계엄의 치하에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 그것이 본질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현재의 사태가 몇몇 개인의 주도하에서 획책되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권력을 잡은 그들 자신보다 더 큰 집단이 생성될 것을 두려워하는 치들입니다. 공동체를 흩트리려는 사태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성원이 누군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라는 공동체는 태생적인 개념임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재건하리라는 미망을 떨쳐 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입니다. 재앙의 화마가 이 나라와 저 나라를 다시금 화해시킬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쉬이 합쳐지지 않고 한 번 나뉘는 순간 서로 영원한 적대에 빠집니다.
육체의 부재는 자위권의 상실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우리 몸은 지금 열심히 이 요새 같은 도서관을 방어 중일지도요. 아니면 육신 자체가 요새와 같이 튼튼히 지어진 도서관 건물에 스며든 건지도 모릅니다. 이곳 도서관에서 일하던 우리는 평소 건축가의 의도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최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설계된 난공불락의 참호같이, 혹은 언덕 경사면에 지어진 흰개미 굴같이, 기습과 차폐 그리고 차단이 용이하고, 내부는 미로 같으면서도 모든 공간이 이어져 있어 어디에서 가든 어디로든 통하며, 건물의 절반은 지하에 안전히 감춰져 있고 남은 절반은 계단식으로 지상에 드러나 총안처럼 작은 창들이 아래서부터 진군할 가상의 적을 향해 겨누어져 있습니다. 밖으로 난 모든 길이 정답인 장소에 갇힌 이들이 으레 인식하듯 우리는 종종 길을 잃었다는 착각에 빠지고는 했지요. 이러한 낭패감은 스스로의 인생마저 미궁에 빠트리는 측면이 있었고, 우리는 누군가가 이곳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실타래를 풀어 출구를 가리켜 주기를 염원했습니다. 출근과 함께 우리는 구원을 희원했고, 퇴근과 함께 누군가로부터의 구출은 없으며 스스로가 자처한 인생의 쳇바퀴를 돌고 돌 뿐이라는 사실을 절망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이곳 도서관의 진가는 사태 속에서 드러납니다. 우선 산자락이 폭발로부터 우리를 엄호합니다. 멸망의 날에 닥칠 폭우와 대홍수 속에서도 높은 고도로 옮겨진 이곳 도서관은 안전합니다. 그날에 이르러 우리는 쏟아지는 빗물이 건물의 계단식 윤곽을 타고 흘러내려 저 아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로 고이는 모습을 작은 창을 통해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때까지 죽지 않고 존재한다면요. 현재의 상태를 기뻐하는 우리가 육신의 죽음을 저어하는 것은 언뜻 모순적으로 비친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그 뒤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내세를 믿지 않는다는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은 없으나 우리는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현재에 있어 구원은 요원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이 최종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걸 잘 압니다. 우리 영혼들이 누리는 한시적인 해방감과 자유가 영원하지 않으며, 이전보다도 더 가혹한 현실로 굴러떨어질 수 있음을 예감합니다. 언제나처럼 우리를 구하러 나설 자는 우리뿐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바랐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우리 바깥의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깥에 나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살길을 찾아서 말입니다. 이곳은 철옹성 같은 요새인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로서 언제든 군대에 징발될 여지가 있으므로 꼭 머무르는 게 답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도적이 되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겁박하고 식량을 노획하고, 나아가 우리라는 공동체의 세를 늘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당신 육체가 붙든 한 시민 같은, 우리와 가까운 사람을 알아보고 회유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만한 적극성과 폭력성을 지니지 않은 것도 한 까닭일 것입니다. 한데 바깥은 전쟁터이므로 우리 같은 사람도 보금자리로부터 나서기만 한다면 환경의 변화에 발맞추어 얼마든지 본성과 다르게 돌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우리는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태 직전에 어떤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공중도서관이므로, 정부의 방송이 확성기를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지금 있는 이곳에 머무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뢰가 가지 않는 그 전언에 당시만 해도 우리는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사태에 관한 정보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나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족이 없고, 동반자가 없고, 갈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치 통속극의 무고하고 선량한 피해자처럼 한데 모여 겁에 질린 채 집단으로 통곡하는 것 말고는 없는 듯했습니다. 우리의 평범성이 원망스러웠지요. 그간 우리는 스스로의 평범성을 사랑한다고 우겨야 했습니다. 실은 아무 가치도 지니지 않는 것을요. 한편으로 우리는 그 한 꺼풀 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컨대 영혼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에 이르게 된 경위를 설명하겠습니다. 빛이 있었습니다. 이곳 도서관의 밖으로 난 작은 창들을 깨뜨리며 섬광이 침범해 우리를 세차게 휘감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에게 몸을 내주고 자신이 품은 영혼을 향하여 침잠했습니다. 실체는 흐려지고 지워졌습니다. 벽에 스며들고, 서로에게 녹아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아낸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태는 육신과 더불어 우리 인식 밖에 있다는 것.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맹렬히 바깥을 향해 궁리하는 스스로의 의식이라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뿐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평범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그 굴레에 묶여 있고 당신들은 아닙니까? 우리가 다수이기에 감당하는 그것 말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특별합니까? 우리는 당신의 굳게 내려간 입꼬리를 알아봅니다. 입술이라는 게 녹아 버려 없는 지금도 그 범상하고 둔한 부위는 흔적으로나마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추한 외면 너머에는 특별한 것이 기능합니까? 당신은 영혼이라는 게 존재합니까? 물론 아직 당신에게서 그것을 관찰할 기회는 없습니다. 평상시 당신의 저서에서 보였던 태도로 보건대 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육체 없는 사유를 경멸하였지요. 이는 당신이 작가이기에 가능한 발상입니다. 육체 없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무게를 지니고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육체가 있어야만 작중에서 시공간을 점유하고 사건을 맞닥뜨릴 수 있노라고 믿습니다. 그런 당신의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만이 전유하는 이야기를 상실한 듯합니다. 우리가 그간 한 말들이 당신에게 일견 공허하게 들렸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별하는 모든 외양과 사연을 잃어버린 지금, 우리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여 본론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감싼 진실입니다. 여기에 비춰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은 누구입니까? 육체를 벗어 던져야 할 굴레로 인식하게 한 이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기던 한 양식을 벗어던져야 했습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가설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현 상태를 무릅쓰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려고 한다는 지적만큼은 타당한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야기적인 삶을 향한 관성이라는 게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지어낸 존재라는 가설은 흥미롭지만, 이는 당신의 판에 박힌 타성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우리를 벽에다 못 박아 놓았겠군요. 오로지 당신에게 말하게 하려고 말입니다. 아주 고약한 악취미입니다. 그 말인즉슨 우리는 영혼이 아니라 허구적 장치고, 작중에서 평범이라는 추상적인 틀에 사로잡혀 개별 존재로서의 실체감이 흐려지고 막연해진 집단이라는 상징적인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작가로서 당신은 진퇴양난에 빠진 우리를 구할 방법을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겪는 허구가 무책임하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말입니다. 우리를 조성한 거짓이 한 의미와 교훈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계제라면 응당 비극적이기만 하거나 허무로만 점철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단지 조롱하고 풍자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상황을 조성했다면, 그것은 매우 비열한 행위일 것입니다. 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네 작가들의 인식 영역 바깥에 있기에, 그럼에도 세상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고 문학적 표현을 통한 민중에의 지배권을 저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이렇게 우리를 고정된 벽에 가둬 개별 존재를 그림자 무리로 격하시킨 채 어디에도 해를 끼치지 못하고 장광설이나 떠벌거리도록 정황을 꾸민 것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작가가 민중을 향한 억지 의무감으로 군상의 흐릿한 피상만을 따서 희끄무레하게 그려 낸,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서로의 말과 말이 겹쳐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길 없이 단지 수선스러운 배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작가가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를 진정으로 포착하지 못한다면 서술 과정에서 온갖 술수와 방어 기제로 이야기를 포장한들 기만과 허위는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도리어 당신은 우리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최후의 법정에서 당신이 우리에게 무관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쓰일 따름이니까요.
우리는 정물입니다. 정물의 부름에 답하는 이는 화가밖에 없습니다. 정물은 자신에게 필요한 건 자기만의 외양을 아는 것이라고 화가에게 요구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정물의 세부를 그릴 줄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겉모습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당신의 시선이 관찰력을 잃어버린 것 아닐까요? 당신은 작가로서 무엇을 꿰뚫어 봅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그림자라는 한계로부터 무엇을 끌어내 복원을 시도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당신은 우리에게서 실낱같은 재현의 가능성을 포착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기 시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모습에 비쳤으나 애써 외면하고 단절하려 했던 공동체의 외양을 선제적으로 긍정해야만 비로소 우리를 향한 시선이 열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인정하십니까? 우리와 당신이 그렇게 먼 부류의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입니다. 한 예술가는 한 시민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았습니까? 당신이 지우려고 한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평소 창작 활동에 큰 방해가 되는 것입니까? 당신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은 한 시민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날 적부터 누군가의 일반적인 가족이었습니다. 학교를 나왔고 군대를 다녀왔으며 직장을 가진 적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거쳐 간 소속마다 수많은 우리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우리와 구별되지 않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당신과 우리를 구별 짓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습니까? 매년 이 나라에 불어닥치는 온갖 유행들이 당신을 질리게 했던 것일까요? 그 유행들은 우리에게 있어 생업이었음을 당신은 정녕 모르십니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당신이 욕망하는 대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욕망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당신은 우리에게 결여되었다고 믿어지는 걸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분열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연대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당신은 또 다른 우리를 희망하기까지 합니다. 그 염원은 동반자라는 이상적인 개념으로 우상화되어 당신이 평생 자기와 같은 낯선 이방인을 찾아 나서도록 만들었습니다. 매번 상대는 바뀝니다. 당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동반자 상은 날이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상대가 매번 그에 응하기에는 불가능한 탓입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스스로가 요구하는 상에 위반되는 동반자라서입니다. 어느 날 아침 홀로 잠에서 깬 당신은 깨닫습니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요소가 당신과 대치되는 공동체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침의 햇살, 당신 옆에 누워 잠든 동거인, 이웃들, 거리의 행인들, 이 나라의 정부, 같은 민족, 자기를 뺀 작가들, 모든 예술가가 당신을 적대하는 공동체 소속입니다. 오늘날의 비상사태가 설령 당신을 무사히 놓아주더라도, 당신은 모두가 자신을 적대한다는 피해망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훗날을 쉬이 예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동반자 없이 홀로 집에 남겨져 목을 매어 자살하거나 스스로가 자아내는 비참 속에서 급격히 노쇠하여 고독사할 것입니다. 자신이 어디에 속한 우리인지를 잊은 자를 맞이하는 결말이란 비탄 속의 죽음밖에 없음을, 당신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란 정녕 혼자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연중에 당신이 따르거나 심적으로 추종하는 무리가 있으리라고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서로를 격리한 벽들 사이에서 우리는 당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느 편의 우리입니까? 당신이 대변하는 공동체는 어느 진영입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태생적으로 사랑받는 자입니까? 아니면 태생적으로 적대 당하는 자입니까? 당신은 둘 중 어느 무리에 속해 있습니까? 물론 사랑은 우리 속에서 피어나고, 서로를 미워하기만 하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받는 자들이 모이는 집단이 있고, 미움받는 자들이 모이는 집단도 있는 법입니다. 사랑받는 자가 미움받는 자들 속에서 애정을 기대할 수 없듯, 미움받는 자가 사랑받는 자들 속에서 자신을 적대하지 말라고 애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움받는 자들이며, 천대받는 무리입니다. 이 나라를 구성하는 우리며, 범용한 우리를 사랑해 달라고 세상에 갈구하는 집단입니다. 감히 우리 스스로를 사랑한다고 긍정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자신에게 베푼 애정만큼 세상으로부터 충분히 보답받지 못한 민중입니다. 우리는 겁에 질려 한데 모인 군중입니다.
당신은 누구의 작가입니까? 당신의 독자는 누구입니까? 틀렸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당신은 정녕 혼자인 듯합니다. 당신은 자기가 어느 공동체에 속했는지를 우리에게 증명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서로 완벽히 분리된 마당에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저 우리와 당신이 어찌하여 같은 공동체가 아닌지를 설명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당신이 책에서 읽고 쉬이 상상하는 군중의 광기는 우리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세된 군중인 탓입니다. 핍박하는 상대에게조차 분노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그렇게 길이 들여졌기에 우리는 먼저 화를 내는 법을 모릅니다. 오늘날 같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아니면 모이지조차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세상의 사랑이 닿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릴 뿐입니다. 애절한 사랑 노래에서 변심한 연인을 기다리지만 차마 화내거나 애걸복걸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방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을 가엾이 여기는 슬픈 화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지지 못한 애덕으로 충만한 존재입니다. 누구라도 따듯한 한마디만 건네면, 내 존재를 포용만 해준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공동체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로애락은 춘몽과 같습니다. 날이 따스해지면, 혹은 따듯한 햇볕 사이로 불어오는 스산한 계절풍을 느끼면, 우리는 겪지 못한 감정을 꿈으로 간접 체험합니다. 그것들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습니다. 꿈속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듯합니다. 화를 못 이겨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때로는 내 모든 걸 다 저버리고 원수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것들은 멀어집니다. 우리는 깨닫습니다. 한 번도 화낸 적도, 슬퍼한 적도, 사랑한 적도 없다는 것을요. 단지 꿈속에서 겪은 걸 흉내 내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불능 상태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결국 우리 자신입니다. 달리 설명할 길 없이 우리는 거세되었음에도 스스로를 사랑합니다. 그것이 어찌 진정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온통 자신만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해서라면 자기와 관련 없는 공동체 바깥의 자가 치르는 희생을 얼마든지 외면할 준비가 되어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 바깥으로 표출되지 못하는 데 몹시 비통할 지경입니다. 한편으로, 바깥에는 우리가 누리지 못한 희로애락이, 선악이 도처에 널린 듯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닥치기를 선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염병처럼 혐오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병은 비유에 불과하지만, 지난 전염병 시기 초입에 병에 걸린 자의 수가 우리보다 적었을 때 그들을 향한 불결 공포가 극에 달했지요. 하지만 거의 모두가 걸렸을 때는 그것 또한 유행이니 우리는 공감하고 서로를 동정할 수 있었답니다. 물론 현실의 모든 게 공평히 유행하는 건 아니며,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누리지 못하지만 바깥에는 만연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대개 각종 대중 매체에서 추문의 형태로 소식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소식을 알게 된 순간 우리는 걷잡을 수 없이 질투합니다. 마치 우리의 감정과 표현의 권리를 빼앗아 그들이 남용하는 듯해서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욕망도 젊음도 권력도 남들보다 배로 주어진 듯합니다. 그들은 자기 욕망을 주체 못하여 폭력을 행사하고, 살인하고, 강간하고, 술에 취해 그릇된 행동을 하며, 부를 횡령합니다. 그런 사람의 소식을 알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소소하고 무해한지 새삼스레 놀랍니다. 어째서 우리는 그럴 생각도 않는데, 그자들은 감히 그걸 행동으로까지 옮겼는지 경악에 치를 떱니다. 그들의 욕망이, 나아가 그 욕망의 대상이 되기가 두려워집니다. 그것은 곧 희생양,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탐욕에 놀란 우리는 술렁이는 마음을 다독이다 어느 매체에서도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자기애로 되돌아옵니다.
그래요. 우리는 단지 무해한 사람입니다. 선과 악같이 파급력 있는 관념들은 우리 바깥에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기에, 특별한 사건이랄 것도 없는 일상이기에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다수인 우리가 세상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투표밖에 없습니다. 다수결의 상황을 제하면 우리는 어디에도 존재를 드러내거나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투표의 결과를 들여다보면 다수인 줄 알았던 우리가 실상 상대적 소수였다는 게 드러납니다. 우리 외부의 있는지도 몰랐던 자들이 투표소에 모습을 드러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우리를 좌절시킵니다. 다수결에서조차 우리에 반하는 다른 공동체에 밀리는 겁니다. 번번이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남녀노소와 외국인까지 규합하여 수적으로 우위를 점했습니다. 우리는 그다지 압도적인 다수가 아니었던 셈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일평생 원하는 지도자를 가질 수 없었으며, 우리 출신인 자가 이 나라를 주도할 수 없었습니다. 비상사태를 촉발한 판윤 또한 우리의 뜻으로 선출된 자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책임에의 면피나 착각이 아닙니다. 통계적으로도 드러납니다. 공증된 통계는 우리를 매번 배반합니다. 이 나라의 국민 중에 전과자가 거의 절반이고 전국에 간통이 성행한다는 것이 몇 가지 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격이 있는 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라는 범주에 드는 이가 얼마나 그 수가 줄었는지를 알고 나면 당신은 우리를 야만적인 군중이라 매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야만적인 사태의 책임은 우리가 아니라 그 바깥의 세력에게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모두 우리로 가득 찬다면 지금과 같은 멸망의 위기는 없었을 텐데요. 우리가 사랑받았더라면, 그리하여 넘쳐흐르는 애덕을 모두에게 베풀 수 있었더라면 이 나라는 이상적인 평화를 이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현재 우리의 실존은 지금 벽에 서린 그림자와 같이 실낱같고,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도 그러했듯 세상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처지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의 상태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 우리 존재는 세상으로부터 계속하여 은폐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크나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법은 아무래도 죽음 말고는 없는 듯합니다. 만인의 집단적인 참사 말입니다. 항시 그것은 우리의 큰 두려움이었지요. 동시에 지난 역사에서 우리가 온 세상에 위용을 뽐내고 감히 망각할 수 없는 교훈을 전달하는 한 방식으로서 집단적인 죽음이 선호되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우리 자신이 원인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적들이 누군지는 구덩이 속에 차곡차곡 쌓여 매장된 유해들이 발굴되는 훗날 적나라하게 밝혀지겠지요.
어쩌면 우리의 영혼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한 방식으로서 벽에 서린 이 인영들은 가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버려진 도서관을 활용한 전시장 내부의 빈 벽에 영사기로 환영의 빛을 투사한 조악한 시각 예술 작품에 지나지 않을지도요. 그게 사실이라면 그 전시는 차마 돈을 내기가 아까울 것입니다. 그림자 장난이라는 진부하게 현혹적인 재현 방식과 벽이라는 거칠고도 흔한 재료를 혼합해 빈약한 내용을 가리려는 시도를 관람객들은 얼마든지 간파할 터입니다. 우리 삶에 그럴듯한 내용이 없다는 건 우리도 잘 압니다. 당신이 소설로 쓰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평범한 삶을 거쳐 온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를 애써 포장하는 재료들이 온통 허위더라도, 우리의 현시가 거짓에 불과하더라도,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진짜일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죽음이 곧 우리의 패배이자 실패이리라는 기존 견해를 번복하겠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가장 큰 구경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간 왜 수많은 대중 매체를 통해서 무고한 이들의 죽음이 반복되어 소비되었는지 우리는 이제야 깨닫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쓸모이고, 또한 우리가 드러나는 가장 매력적인 구도인 것입니다. 대서사극에서 우리가 두각을 드러내는 부분이 바로 집단 참사지요. 죽음이 곧 우리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해석될 테고, 선전될 것입니다. 무력한 우리가 죽음 앞에서 단말마를 부르짖고 발버둥 치며 남긴 저항의 흔적들은 존엄한 실존의 한 사료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 마지않던 평범성의 신화화를 후세의 이들이 해낼 테지요. 우리는 한 가치로서 추앙될 것입니다. 게으른 작가들이 그제야 우리 존재를 알아차리고 앞다투어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여 책으로 출간할 것이고 선망받는 배우들이 범상한 우리 얼굴에 매력적인 낯을 부여하겠지요. 우리는 멋진 후일담이 될 것입니다. 우리 생전에 획득하지 못한 인정을 사후에야 수여한다는 건 세상에 가증스러움이 한 겹 더 덧씌워지는 일일 테지만,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것입니다. 아니, 그 용서도 후대에 창작되리라 믿습니다. 어쩌면 용서는 그들의 참회보다 선제적으로 제시될 것입니다. 용서의 주체인 우리가 없는 후대의 세계에서 그들은 우리를 이전에 알지 못했던 자신을 어떻게든 용인해야만 겨우 참회의 운을 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우리의 말이 섣부르거나 공허하지는 않습니까? 죽음을 통한 구원을 말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진실하기보다는 그저 허황되게 들리더라도 우리는 이해합니다. 내뱉어진 말만큼 텅 빈 것은 없으니까요. 하물며 사후의 미래를 예견하다니요. 더군다나 행위를 실천할 몸이 없는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큰 사건이 도래하리라고는 짐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을 실행하려면 우리는 그저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이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있다기보다는, 있었다는 흔적만으로 암시됩니다. 우리의 그림자는 존재의 시차적인 오류로 여겨질 따름이며 도리어 우리가 이 자리에 부재한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듯합니다. 마치 사태 속에서 우리 존재 자체가 결핍된 것 같은, 혹은 그 존재가 세상의 성찰에서 빠져나간 것 같은 불안이 우리 한편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렵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던 존재의 현시에의 맹신이 오히려 존재를 향한 눈멂에 이르게 하는 건 아닌지 무섭기 짝이 없습니다. 이전의 일상에서 우리는 수조를 보며 종종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이러다 수도가 잠기고 말겠어. 우리가 자랑하던 문화재와 도시 시설들이 수몰되겠어. 우리가 세 든 집들이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저 산은 무사하겠지. 우리는 더 높이 올라가야 해. 그렇게 생각했더랍니다. 왜 도서관이 원래 있던 저곳의 동네에서 보다 높은 지대의 이곳 산자락으로 옮겨 갔는지, 우리는 이미 무의식중에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도서관과 우리의 보존을 향한 염원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두려워했던 듯합니다. 물에 잠기는 것이요. 이는 우리라는 공동체가 획정짓는 범주 역시 마찬가지로 물에 휩쓸려 소멸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진정 벌받아야 마땅한 자들과 함께 수장되는 것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박해받는 종교인들이 고원 지대에 굴을 파고 숨어 살듯이 공동체를 보전하기 위해 도서관을 보다 높은 산으로 옮겼습니다. 또한 그것은 죽음과 진실이 드러나기에 더 적합한 장소가 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전의 장소는 교훈이 전달되기에는 충분하게 높지 않았지요. 우리의 죽음은 더 높이 내걸려 전시되어야 합니다. 산이 우리를 부릅니다. 우리는 평소 격무에 사로잡혀 이전에 맞닿았던 작은 동산에 올라가 산책할 엄두도 감히 내지 못했지요. 무엇보다도 어디에서나 보는 흔한 동산이니까. 한데 이제는 수도의 늠름한 진산이 우리를 부릅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중심에 선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우리가 수행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산이 우리를 불렀듯이, 우리가 적을 불러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이 벽에서 나오지 못하리라는 점은 여전히 자명합니다. 여태 왜 몰랐을까요? 구원은 적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서로를 칼로 찔러 가며 집단 자살에 이른다면 죽음의 논점은 흐릿해질 것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몸을 내맡겨야 합니다. 사태를 촉발한 이들이 우리를 군홧발로 짓밟아야만 죽음의 교훈이 성공 가도를 내달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이곳에 머무르라고 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눈멂에 이르도록 한 그들을 불러 해야 할 일을 마저 처리해 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스스로의 평범성에 매몰되어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무고한 민중의 죽음. 그게 우리의 역할이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바깥의 모든 적에게 요구합니다. 우리를 벽에서 꺼내 줘. 그래야 우리가 여기 이 자리에 있음이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애덕의 길이 열림을.〉
익명의 존재들이 건네는 내면의 목소리는 여기서 끝이 났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지루함과 무기력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들에게 닥쳐올 미래에의 담론에 대한 정신적 피로감도 마찬가지다. 내가 감히 그 말들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내게 전해지는 실체 불분명한 목소리가 없었더라도 나는 그들의 존재를, 침묵 속에 누군가가 숨죽이고 있음을 이내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들의 존재감이 그림자처럼 다소 막연하다는 사실은 그리 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현전은 나 자신에게는 항상 막연한 것이니까. 물론 내가 그렇게 기민하게 상대를 감지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니라 이 나라의 멸망이라는 한 사건이자 주제가 존재에 대한 회의를 환기시킨 덕이다. 하지만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그들이 존재하지 않기라도 했을까? 그들의 존재는 말할 것도 없이 사태에 선행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내게 설명하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것은 일종의 광대놀음과 같았고, 나는 반문 없이 내버려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내가 정녕 반문하고 대답을 갈구했던가? 그들의 선제적인 대답은 진정 앞으로 있었을 나의 반박에 대한 저항이었던가? 그들은 나에 관해 잘못 생각했던 게 틀림없다. 그 오해는 그 성토가 타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획정 지은 나의 비좁은 테두리 내에 적지 않은 자신들을 구겨 넣으려 한 지점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소설가에게 말을 건다는 미명 하에 자신이 허구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는 위구심에 사로잡혀 일종의 소거법을 통해 허위를 솎아 내려다 그만 존재가 지니는 자명성을 망각한 것이다. 어쨌거나 덕분에, 또한 그들의 원대로 나는 끝없는 사고를 멈출 수 있었다. 이제 그림자놀이는 끝이 났다. 놀이가 중단된 이곳에서 나는 도리어 그들의 존재에 대해 이전에 가지지 않았던 회의를 느꼈다. 지금에서야 나는 그들이 비실재할지도, 그러므로 그들의 자아와 죽음도 허위에 불과하다는 의심에 사로잡혔다. 마치 성황리에 공연을 마친 뒤 무대에 막이 내려졌을 때 진심으로 몰입하였던 모든 극중 인물과 그들이 맺고 끊던 관계 그리고 갈등의 서사도 마찬가지로 끝이 나 더는 허구의 세계가 지니는 존재감과 영향력을 믿지 않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대 위로 내려온 장막 뒤에서 여전히 배우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대로 서로 아웅다웅하고 있으리라고 여기는 관객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부재 속에서도 존재에의 믿음을 잃지 않는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독재 정부의 압제로 폐쇄된 교회에 숨어 들어가 몰래 기도하는 신자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듯이, 일가족이 자살해 더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에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듯이,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한 사람이 잠에 들 때 죽은 이가 생전 누웠던 빈자리에 베개를 놓아두고 여전히 침대의 반쪽만을 이용하듯이, 무릇 사람은 부재 속에서도 희미하게 남은 지난 존재의 흔적을 계속 붙들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있는 수조와 마주한 특색 없는 그 벽은 많은 인영들이 늘어서 있음에도 본디의 재료가 띠는 차갑고 거친 느낌과 더불어 사랑이나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없이 쓸쓸하게 방치되고 그저 텅 비어 보였다. 열성적인 한목소리로 성토하던 그들은 더는 말할 내용이 없을 때까지 자신을 탕진하여 마침내는 존재적으로 쇠진한 듯했다.
아닌 게 아니라, 벽에 서린 희끄무레한 그들의 그림자는 기나긴 말을 마치고 나서부터 미약하게 흐느적대는 것조차 멈추고 나나 단독자, 혹은 다른 누군가나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그들이 정말로 현 상태에서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일까? 아니면 나와 단독자가 수조 내부에서 그러하고 있듯이 그저 자신이 속한 공간의 재료에 갇혀 우두커니 저만의 단상에 잠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자들이 무슨 속셈인지는 이제 그들만이 알 테다. 더는 그들에 대해 파악할 길은 내게 없었다. 그렇다. 나는 그들의 존재를 내 시선으로 보지 못했음이며, 그들을 향한 사랑에 가닿지 못했음이다. 무릇 사랑은 이 나라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려운 것이다. 특히나 한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여러 사람을 사랑함은 그 수만큼이나 배로 어렵다. 지금처럼 옷이 불에 타 최소한의 몸가짐도 유지하지 못하여 사회성이라는 게 부재했을 때 더욱 그렇다. 어떻게 옷도 입지 않고 수많은 사람 앞에 선 채로 부끄럼 없이 사랑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삶이라면, 그렇다면 아마 우리는 사랑이란 명명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랑이 단지 이 나라의 구성원을 사랑받는 사람과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반 가름하기 위한 명목상의 허식으로 다루어지는 현실에서 만져지지 않는 그 관념은 단지 사랑받으나 사랑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의 자기를 추려 내기까지 무한히 반복되는 절멸의 소거법에 불과하다.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우리의 관계는 공동체다. 우리 속에서 발견되는 서로 다른 외양과 본성이 암시하는 바 또한 존재와 상관없는 서로의 관계성 자체일 뿐이다. 관계 지음은 당연히도 성공이나 실패를 담보한다. 나는 동반자를 찾는 데 실패했다. 내 의식과 동떨어진 육신이 껴안은 단독자는 그렇게 찾아 헤맸던 그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관계에 현혹되어 동반자를 한 관계로만 한정 지어 오해한 까닭이다. 나는 동반자와 부산물을 항시 가족의 테두리로 가두는 데 실패하여 그 울타리를 맴돌며 모순되게도 탈출을 꿈꾸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게 아니다. 그들은 관계 밖에 있다. 집 밖에 있다. 나는 모두에게 같은 가면 씌우기를 멈추고 둘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욕망해야 했다. 고백하기가 불가능한 나 자신의 심연에서 벗어나야 했다. 나는 내 의식에 갇혀 있었고,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계 안에서만 한정된 삶이었으며, 하나의 닫힌 원에 머물고자 함이었다. 그 가상의 원에는 실상 나도 동반자도 부산물도 부재했다. 오직 죽지 않기 위한 삶만이 비좁게 둥근 범주 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행위 해도 죽음만을 떠올렸고, 죽지 않기 위해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자고 체온을 보전해야 했다. 그런 삶이 짊어진 세계는 새로이 갱신되지 않고 오직 최후밖에 없다. 마지막 앞에서 시간은 죽음을 미루고자 지금처럼 뒤죽박죽 뒤엉킨다. 시간을 통제하려는 덧없는 욕심으로 찬 손목시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우리 각자가 부정할 수 없는 한 존재일지언정 지금과 같은 삶 속에서 존재는 추상화되고, 원래보다 못한 존재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형상을 잃고 모두가 한데 갇혀 우글거린다. 마치 스스로가 지닌 자신의 유령이 존재로부터 탈출하여 실존하는 본체가 된 듯하다. 그런 식으로는 언젠가의 미래에 닥쳐올 죽음밖에 기대할 길이 없다. 지금 이대로 불멸하기에는 크나큰 공포심이 밀물처럼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필연성이 지배하는 악몽 같다. 꿈속에서 모든 우연은 필연적이다. 잠에서 깨어난다는 선택지를 미처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그 꿈은 영속성을 띠며 무한한 오늘에 고여 있다. 이 나라는 어제부터 내내 밤이다. 밤의 공포는 우리를 벌하고 용서하지 않는다. 그림자들의 말은 일견 맞는 부분이 있었다. 사태 속에서 죽음은 한 정답이다. 존재적 표현의 극치다. 특히나 사랑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으면서 사랑받지 못해 아우성치는 우리 같은 자들에게는 극약 처방이다. 그러나 그 뒤의 미래는 죽은 자와 하등 관계없다. 우리라는 관계로서 존재하기로 마음을 굳힌 그들에게는 죽음과 그 뒤의 미래도 모종의 관계 짓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수동성을 통해 그들은 모든 역할을 미래의 후세에게 떠넘긴다. 죽음은 그들의 마지막 광대놀음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소유한 마지막 자산인 영혼마저 탕진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이곳은 모든 게 정지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도서관 건물 내부에 갇힌 나의 시계로는 시간을 가늠할 요소란 전연 없다. 우리는 인질로서 긴 시간 이곳에 붙잡혀 있다기보다는 찰나에 고착된 사물들 같았다. 나와 단독자가 잠긴 수조는 이 나라 수도가 처한 지구적 위기를 표상하는 가짜 세계다. 푸른 물빛이 반사되어 일렁이는 벽에 선 그림자들 역시 매한가지고, 하물며 정말로 물에 잠긴 나와 단독자는 말할 것도 없다. 자체적으로 발하는 물빛에 드러난 우리는 서로 그렇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여기서 우리는 제각각 가졌던 주체적인 행위성을 잃어버리고 표류한다. 그들 말대로 바깥의 타인이 개입하지 않고서야 스스로 탈출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만일 그러려면 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주해야 할 것이다. 내가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근본적인 자로부터 벗어나는 것. 동반자와 부산물을 놓친 사실을 잊지 못하는 나에게서 벗어나는 해방은 바라 마지않으면서도 또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한 구실을 덧붙이는 또 다른 범죄 행위일 테다. 나의 시야는 닫힌다. 이는 내 눈꺼풀을 감는 게 아니며 잠을 청하는 것도 아닌 단지 푸른빛이 생성하는 시각적 정황을 외면하는 데 불과하다. 그것은 또한 암중모색이다. 빛의 환영을 거부하고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접촉의 활로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러자 내가 전유한다고 믿어 온 존재와 시간, 장소, 의식이 서서히 중단된다. 그림자들이 내게 건넸던 〈영혼의 일격〉이라는 아리송한 말 한마디가 의식을 맴돌다가 차차 멀어져 간다. 그래, 나는 일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서가 아니다. 나 자신에게서도 아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내게 일격을 가한 존재가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모습이 침침하게 드러났다. 그는 바닥이 드러난 수조에서 나를 안은 채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유리 벽은 산산이 부서져 수조와 맞붙은 통로 위에 조각조각 나뒹굴고 여전히 미약하게 푸른빛을 내는 물이 어둠에 잠긴 저편으로 졸졸 흘러갔다. 나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속으로 되뇐다. 이 사람은 동반자가 아니라 단독자다. 그런데 어찌하여 구멍 난 눈으로 나를 이토록 애정 어리게 응시하는 것인가? 「너는 나의 것이야.」 그가 넌지시 내게 일러 주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모두 그 말 한마디에 있다는 듯. 그 말과 함께 나는 내 의식이 물속에서 다시금 제 신체로 회귀하여 존재함을, 그리고 이곳에 시간이 경과하고 사건이 도래했음을 알아차린다. 이제 그림자들은 없고 벽에는 아마도 총탄이 박혀 파열된 자국들만 무성하다.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기다려 온 적들의 침입이라는 사건을 통해 통로라는 한 자리에 피 흘리고 썩어 가는 육신을 가지고 누워 있었다. 그들은 이미 죽은 지 꽤 시간이 소요되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누가 살고 누가 죽었든 모두가 원하던 대로 현재를 되찾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한데 시신들은 행복이라고는 없이 마지막 고통의 단말마가 그대로 굳은 채로 비참한 기색이다. 현재가 된 미래가 그들 존재가 지니던 불행마저 보상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기는 무엇인들 어찌 죽은 이의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겠는가? 어쩌면 앞선 그들의 전언은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향한 내 얄팍한 애도에서 비롯된 환청은 아닐까? 역사에 소외된 민중이 그림자의 형태로 자신이 죽은 자리의 벽에 서리는 장면은 작가라면 으레 할 법한 진부한 상상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오갈 데 없이 이곳의 벽에 기대 기다리다 지쳐 그 물성에 서서히 스며드는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것처럼 생생히 기억하는 듯했다.
그들 시신과 마찬가지로 나와 단독자의 젖은 적신 또한 전과 같이 상처로 만신창이다. 그러나 나와 단독자는 부활했다. 그것은 내가 그의 소유임에 말미암은 것인가? 아니면 시간의 경과가 우리를 다시 여정으로 내모는 것인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다시 움직여야 한다. 이곳 도서관에서 발생한 참사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그리고 또다시 단독자를 설득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내게는 다른 동반자가 있다고. 그하고의 사이에서 생겨난 부산물도 있다고. 그는 그 말에 긍정하고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그가 나와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할 것임을 예감한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우리는 서로 대화하지 않고도 죽은 이들이 들려준 말을 반추함으로써 간단히 행로를 정할 수 있었다. 바위산이 우리를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그곳으로 회귀하여 다시 여정을 시작해야 함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댄 채로 시신들을 지나 계속해서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걷고 계단을 올랐다. 암중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알려 준 대로 길은 어디로 걷든 우리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마침내 출구로 나와 구름다리를 건너 검게 잠긴 바위산 자락의 비탈면에 다다랐을 때는 하늘과 지상에 빛을 발하여 주변을 분간하게 해주는 별이나 달 그리고 인공조명 같은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이 나라의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