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장편소설

동반자

  • 작가 김갑용
  • 발행 2026.05.21
  • 장르 일반
김갑용

김갑용

201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토성의 겨울』이 있으며, 2022년부터 소전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장편소설 『냉담』을 출간하였다. 두 번째 장편소설 『동반자』를 <월간 장편소설>에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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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신이 폐허 위에 홀로 선 정방형 석조 문가에 방치되어 있어, 그는 산지기인데, 생전 산으로부터 배신당하고 의로움 없이 제 안위만을 추종한 자였다. 자기가 선망하던 시대에 머무름이 족쇄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일면한 우리에게 쇠사슬을 채우고 스스로 편리하게 비루한 삶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는 자신이 초래한 고난을 요해할 줄 몰랐으며, 원망할 줄만 알지 제 고통을 위로할 여유조차 없었고, 정녕 신 없이 혼자였음에도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기보다는 붙박인 운명의 객체로 머무르는 패착을 저질렀다. 이전의 어느 때 산머리에 당도하여 혼자만의 낙원을 향해 드넓게 열리었던 그의 몽상은 역설적이게도 제 죽음에 관해서만큼은 꿈쩍 없이 닫혀 있었다. 그리하여 그에게 죽음은 마치 자신이 산에 오르기 전 꿈꾸었던 낙원처럼 강력한 영원성을 지니게 되었다. 죽음이 자신이라는 존재를 영원히 소멸시키리라 전망했던 그의 유지는 경황없이 산중의 경야를 치르게 된 나와 단독자가 바라볼 직에도 유효하게 지켜질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이미 원하던 안식을 얻은 망자가 아니라 달이 자오선을 지나 서쪽으로 이울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간상으로 촉박한 현재였다. 그러나 다시 둘이 된 우리는 우려하지 않았다. 우리가 염려하는 건 시신 앞에 남겨진 자신들이었다. 산꼭대기의 바위가 치워짐으로써 우리의 부덕으로 죽은 이가 세상에 드러난 듯 쓰라린 속박이 애간장을 저미었다. 이 나라의 시대가 단지 몇 시간이 남았어도 죽음은 그 위용을 잃지 않았다. 아니, 어떤 마지막을 앞둔 만큼 타인의 죽음은 내 자신이 싸늘하게 식는 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초대받지 않은 죽음이 혼인식에 행차한 것처럼 원형의 제단에 선 나와 단독자는 입구에 널브러진 산지기를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며 피 웅덩이가 샘솟기를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덜 지저분하게 시신을 오두막으로 옮길 수 있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질질 끌어 옮기는 동안 시신의 양 어깨를 각각 잡은 우리 손에 피가 흥건함은, 또한 매번 날카로운 모서리로 누더기 자락을 붙잡고 쉽게 놓아주지 않는 돌무더기들에 큰 붓으로 칠한 듯 붉은 궤적이 그어졌음은 물론이다. 선은 똑바르게 판잣집으로 이어졌고 문턱을 넘어 목침대 아래에서 멈추었다. 비현실적으로 빠르게 강직이 시작된 시신을 침대에 올린 뒤 어떻게든 구겨서 자리를 만들어 머리께에 내가, 발치에 단독자가 겨우 엉덩이를 반만 들이밀어 앉았는데, 그러고 나서 보니 그는 제물로 사로잡힌 희생양처럼 사지를 한 방향으로 모은 기괴한 모양새로 구부러져 있었다. 우리는 신혼방 침대까지 쫓아온 죽음을 사이에 두고 앉아 피 칠갑이 된 손을 옷자락에 닦고는 제 몸을 부둥켜안은 채 잠시 할 말을 잃고 중요한 무엇이 시선 끝에 걸려 있는 양 판자벽 한 곳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계곡풍이 흘리는 귀곡성이 우리를 부르는 듯 허술한 나무문을 두드리고 초봄에 무슨 밤벌레가 있는지 문밖의 살충등이 무언가를 전기로 지지는 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이렇게 바깥 소리가 잘 들리는데 아까 단독자는 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걸까? 내가 연유를 캐묻고 혹여 산지기와 내통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여도 그에게서 신통한 답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내가 그를 진실히 잘 안다는 생각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짐작건대 여기에 다다르기까지 느꼈던 죽음의 추동이 그에게 전이되고 삶의 짝을 향한 그의 절절한 염원이 내 속으로 틈입했다는 낌새가 느껴졌어. 우리가 안에서 대화했던 것은 서로가 맞교환한 듯 상반되면서도 친숙한 근연성에 관한 공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같았어. 그 하나 됨을 견디지 못한 내가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해 문을 여는 순간 다시 서로 각자가 되어 안심의 웃음이 비어 나왔지. 그게 안에서 있었던 일의 전부야. 그렇지만 나는 그의 죽음에 일조한 듯, 마치 나의 죽음이 그에게로 미루어진 듯 막중한 가책감을 느껴. 혼인으로 얻은 희망이 고통으로 일그러짐을, 처절한 눈물이 내 얼굴을 타고 흐름을, 삶을 보잘것없는 바위 틈바구니에 숨겨 놓고 제 불행과 고독만 바라보고 있었을 그의 한평생이 내 흉금에 아로새겨짐을 나는 체감하고 있어. 그가 죽고 난 이제야 밤의 비애가 날 덮친 거야.」

나는 옛 족장 시대 사람처럼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제 옷깃을 잡아당기며 고개 숙인 단독자를, 이마에 난 상처로 온통 피 칠갑이 되어 저주받은 살인자 같은 모습을 한 그의 낯을 애틋하게 들여다보았다. 그 피는 나를 구하기 위해 흘린 것인데, 앞서 내가 그를 다그치고자 공들여 고른 흉기로 인한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혼약은 말장난에 불과하거늘, 그는 왜 이렇게 괴로워하는 거지? 졸속으로 강행된 혼례식으로 말미암아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듯, 아니면 그의 말대로 이전부터 나를 알아보고 이미 그때부터 애정이 샘솟았다는 듯 말이다. 설령 혼인이 진실한 권위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러나 신혼은 짧을 테다. 산지기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최소한 자신은 그렇게 믿었기에 자기 목숨을 걸었을 터였다. 시간이 많지 않다. 그는 자신의 동반자가 어떤 자인지 모르는데,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그것은 부당한 일이다. 내 메마른 심금에 동정심이 샘솟아 보다 낮은 지대로, 비참과 함께 침잠한 그에게로 흘러갔다. 「나는 긍지가 없고 사랑이 없는 자야. 고개를 들어 봐.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몽둥이는 내가 널 협박하려고 주워 왔던 것인데, 그게 이리 쓰일 줄은 몰랐어. 항상 이런 식이었지. 남들이 이해 못 할 정도로 배배 꼬인 나만의 계산속이 타인에게 큰 불행을 초래하는 것 말이야.」 그는 고개를 들었고, 뜻밖에도 피로 얼룩진 낯빛에 나를 향한 따스함이 스며듦을 보자, 나는 죄스러움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금 하고자 한 고백을 이어 갔다.

「나는 긍지 없고 사랑이 없는 인간이야. 내가 아까 산지기에게 말했던 이혼과 아이의 죽음은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한 은유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그것은 내가 이전의 동반자와의 삶을 지속하였을 때 앞두었던 미래야. 반면 우리에게는 그런 내일을 맞이할 권리도 없는 짧은 시간만이 주어졌지. 대피할 새도 없이 우리를 위해 마련된 이 조촐한 공간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야. 나는 방금의 혼약에 동의하지 않아.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이뿐이라면, 원치 않더라도 함께하게 된 새 동반자에게 회개하며 의미 있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너는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인 나를 알 권리가 있어. 나는 소설가야. 내가 소설을 쓴 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버거워 상상 속에서나마 이를 비틀어 왜곡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거야. 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많았어. 현실에서 내가 쉽게 한 약속들.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다짐. 누군가를 내 손으로 구원하겠다는 의지. 특정한 공동체를 망가뜨리겠다는 복수심. 소설은 더할 나위 없이 허위적인 약속이지. 결단코 실현되지 않는 약속이야. 그것은 나를 닮았고, 소설을 통하여 더 큰 약속과 배신을 할 수 있다는 데 내심 기쁘기까지 했어. 한데 나는 그보다 더한 걸 원했지. 그래서 작가인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만들어 스스로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도 모르는 공황 상태로 내몰았지 뭐야. 그건 화자가 내거는 약속을 아무도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언약은 진실한데 화자가 이행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금치산자임을 독자에게 진정성 있게 설득하는 편의적인 방어 장치인 거야. 금치산자는 물론 비유지만 내 인생에서 돈을 빼놓을 수는 없지. 나는 매상 빈털터리고 돈이 생기는 족족 낭비하면서 경제적 여유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큰소리쳤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 충분한 돈만 주어진다면 내가 책임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 거기에는 문학도 포함되어 있지.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돈이야말로 내게 자유를 허락하기 때문이야. 네가 미루어 짐작했듯이 내게는 잃어버린 동반자와 부산물이 있어. 그들과 헤어진 것은 그들을 향한 나의 믿음, 그리고 나를 향한 신뢰가 부족해서야. 스스로에게 믿음이 없는 자는 자신을 믿는 자를 언제든 헌신짝처럼 내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동반자와 나는 혼인하지 않았어. 나는 경제적인 형편이 못 되어서 그렇다고 늘 둘러대고 한편으로 나도 그렇게 믿었지만, 매한가지로 이 역시 믿음의 문제야. 〈돈이 있었다면 달라졌을 거야.〉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했는데 다름 아니라 거짓말이야. 충분한 금액이 내게 주어졌다면, 경제적으로 상황이 좋았다면 나와 그는 애당초 이루어지지 않았을 관계인 까닭이야. 설령 혼인까지 했더라도 나는 손쉽게 이혼하여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 거야. 충분한 돈이, 자유가 나에게 있으니까. 나는 그 돈으로 다른 타인의 환심을 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세속적인 물질주의자고, 이러한 긍지 없음은 사랑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내게 믿음이 결여되었음을, 나아가 돈 외에 진정으로 잃어 본 것이 없음을 의미해. 나는 이제 진정으로 동반자와 부산물을 잃게 되었고 그제야 그들에게 사랑이 샘물처럼 솟을 가능성이 존재함을 인식할 수 있었어. 한데 그들에게 애정을 전할 마땅한 활로가 없어. 평시라면 나는 당장에라도 그들을 찾아 나서야 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은 부족하고 곁에는 너밖에 없으니, 내가 사랑을 전해야 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새로운 동반자에게여야 해.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너를 사랑하겠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겠어. 그리고 죽음까지도 함께할 거야. 이제 너는 나를 충분하게 아는 거야. 누군가에게 나를 이리도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몹시 두려웠는데, 그런데 살면서 지금처럼 이리 홀가분한 적이 있었나? 단지 이 고백에 숨은 거짓이 너를 현혹할까 봐 두려울 따름이야.」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백을 통해 홀가분해진다는 감수성이 나에게 부족한 탓이다. 내 말이 내포한 덫에 단독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 걸려든 듯 뒤숭숭한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써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언표함으로써 아우르려고 했던 나와 동반자의 지난날들이 비유가 짜낸 성긴 덫을 피해 언외로 속절없이 빠져나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마지막까지 나는 자신을 몰랐고 동반자를 알지 못했다. 〈평시 내용 없는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그리 노력했거늘, 마지막까지 하는 말이 일절 공소하고 부박한 내용이지 않은가. 동반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 부당함에 항의해야 마땅했을 거야. 거기다가 나는 부산물에 관해서는 많은 내용을 빼먹었어. 원체 그에 대해서는 늘 할 말을 잃었지. 마치 나의 죽음을 말할 때 그러하듯, 부산물을 얘기하려면 그 끝만 아른거릴 뿐이야. 이제는 모두에게 같은 마지막이 주어졌는데도 나는 아직도 그의 남들보다 이른 운명에 정신이 팔렸어. 운명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생각하는 건데, 모두의 시간이 앞당겨진 지금 부산물만큼은 제명대로 살 수는 없는 걸까? 아, 이것들은 머릿속 단편에 지나지 않아. 거기다가 말과는 달리 곁에 둔 사람이 아니라 지난 가족만 염려하는군. 언제쯤이면 가까운 사람에게 충실한 자가 될 수 있을까? 끔찍해. 지긋지긋해.〉 혼이 나가 우두커니 허공을 응시하는 내 눈에 피비린내 나는 단독자의 손길이 부드럽게 닿았다. 「눈을 감아. 좀 쉬어 둬. 너는 분명 네 표정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불안해하며 평소를 보냈을 거야. 네 시선, 그러니까 눈에서 발하는 빛이 상대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고 여겼을걸. 한편으로는 누가 자기 코를 베어 갈지 두려워 감지도 못했을 거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누가 자신을 지긋이 바라봐 주기를 기다리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눈에 힘을 주었을 거야. 누구의 눈도 감히 마주치지 못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 마치 방금 네 말이 나의 너를 향한 마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듯이, 시선은 아무것도 전하지 않아. 지금은 살면서 한 차례도 쉰 적 없었던 것처럼, 누가 어떻게 보든 모든 걸 내려놓고 쉬어야 해. 네가 과거 누구였든 나는 괜찮아. 나 자신이 어떤 자인지가 스스로에게 아무 상관 없듯이.」 우리는 볼품없이 구겨진 죽은 산지기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떨리는 손을 마주 포개어 잡고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삼각형을 이루고는 눈 감아 단잠을 청했다. 〈이자도 자기가 나인 듯 하나임을 강조하는구나. 비록 마지막일지라도 나는 나와 구별되는 타자를 원해. 내가 어떤 자인지가 나에게는 매우 각별하다고.〉

오늘은 괴상한 신혼 밤이다. 더 끔찍한 사실은 이 짤막한 야간에 아직 우리를 엄습할 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한 시기와 함께 이 나라의 모든 국민이 종말을 맞는 그 마지막 순간이 무엇으로 비롯될지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극히 짧은 시한 내로 이 나라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을 의미하니까. 순식간에 벌어질 최후의 그 찰나에 견준다면 지금 주어진 시간이 절대 부족하지 않으리라. 그 말인즉 우리가 놀랄 일이 아직껏 남았으며, 또 다른 불청객이 느닷없이 들이닥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내가 겪은 불상사는 죄다 인재이지 않았던가. 그런 까닭에서 단독자의 말대로 여기서 휴식만 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 더는 누구도 만나지 않고, 여기서 둘이 함께, 새로운 가망이란 없이 존재의 쉼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지 못했고, 한밤에 가까워지는 가운데 누군가가 그러라고 핍박한 듯 부단히 이동만 했으니, 이제 이 예외적인 상황 자체로부터 도피하는 동시에 안식을 누릴 마지막 수단은 잠이다. 〈허기도 없고 갈증도 없는 이 정황이 수상하군. 눈물을 흘린다든지, 피를 흘린다든지 감정과 고통을 표현하는 생리 현상은 일어나는데 반면 우리는 화장실을 단 한 번 이용하지 않았어. 언젠가 갈 일이 있겠지.〉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잡념을 없앨 때 으레 그러듯이 자연수를 차례대로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희읍스름한 산안개가 문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와 죽음 이후의 고통에 제 혼자 삐거덕삐거덕 신음을 흘리는 마룻바닥에 습윤하고 반투명한 자신을 서서히 누이고 있었다. 그때 머릿속으로 생전 산지기가 했던 말이 걷잡을 수 없이 상기되었다. 〈시계 속에 갇힌 시간〉은 무슨 의미에서였을까? 단지 인간이 제한되게 인식하는 선형적인 시간 축을 빗대어 말한 거라기에는 돌팔이 예언자 같은 면모를 지닌 그의 문자주의적 엄밀성에 미뤄 짐작건대 석연치가 않았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쉬…….」 나는 내 어깨 위로 기대어 잠든 단독자를 잠시 깨워 손목시계의 원형 테두리를 빠드득 돌렸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생존 시각을 향해 시계가 미미하게 재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이제 할 수 있는 걸 다 마쳤다는 듯 홀가분하게.

그러자 마치 주마등처럼 지난날의 나를 정의하는 진실한 문장들이 흉금을 쓰라리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타인에게 뼛속까지 동정 없이 이기적이었고, 문학적 동료들에게 오만히 굴면서도 남몰래 시기한 데다, 갖지 못한 삶을 동경하다 못해 제 생애를 깎아내렸고, 내면에 불을 피울 줄 몰랐으며, 스스로를 자기 거처에 유폐한 채 죽음만을 고대하는 체하였지만, 실상은 그 미천한 상상력으로 숨이 멎기 직전의 기적적인 구출만 머릿속에 그려 낼 줄 알았다. 그런 나에게도 재주가, 어떤 솜씨랄 게 있기는 했는데, 그것은 원점으로 돌아오는 관성, 타인의 도움마저도 모조리 수포로 회귀하게 만드는 가상의 원심력으로, 어찌나 강력한지 혈연을 비롯한 그동안 거쳐 온 온갖 인연과 공동체를 무위로 되돌리고 자신이 태어나 탯줄을 끊고 혼자가 되었던 때처럼 스스로를 혈혈단신으로 원상 복귀시키고는 했다. 마치 형벌과도 같이 기나길고도 지난한 원의 둘레를 자기에게 주어진 정당한 대가인 양 기꺼이 그리고 더디게 걸어왔으면서, 연민으로 함께해 준 동행자들을 나중에는 형편없이 내치고, 결국은 나 홀로 적신으로, 더 큰 호를 그려 나가야 했다고 자책하면서 제 몸 하나 겨우 누일 수 있는 자기만의 침침하고 비좁은 동굴로 귀소하던 자, 그게 나였다. 깨달음의 순간 단독자가 내 어깨에 온기를 남기며 의지하는 데 두려움이 일었고, 만일 문이 마치 생명을 다한 듯 스르르 힘없이 열리고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를 두고 혼자 처절히 죽을 장소를 찾아 문을 나서 무기력에 잠긴 발걸음으로 비트적비트적 산길을 걷다가 끝이 오기도 전에 병든 짐승들이 자연히 그러는 것처럼 실족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셋이었다. 밤안개에 어두침침한 윤곽이 부옇게 가려진 그들은 처음엔 하나로 보였다. 그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던 까닭이다. 마치 삼위일체를 은유하듯 뒤에 선 둘이 선두의 존재 옆에 늘어서자, 그 모습이 위압적으로 비친 건 다름 아니라 나와 단독자보다 그 수가 겨우 하나 더 많은 이유에서였다. 밤중의 그들은 머리가 셋, 그 아래로는 널따란 육신 하나로 보였으나, 서로가 몸의 주인이라고 우기기보다는 뒤에 섰었던 두 사람이 앞사람의 의미 없는 고갯짓 하나에도 멈칫하고 주의 깊게 그를 관찰하는 게 느껴졌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여기에는 더는 앉을 자리가 없어요.」 단독자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나는 부정한 동침을 들킨 듯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부끄러워진 기색을 감추려 퉁명스레 물었다. 그 바람에 지지할 데를 잃은 단독자가 산지기의 싸늘하게 식은 팔다리에 엎어졌다가 나를 따라 벌떡 일어섰다. 그가 불청객을 안심시키려고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는데, 방금까지만 해도 옆의 그를 두고 괴롭게 성찰하던 내가 후회스러울 지경이었다. 맨 앞에 선 자가 자신이 이곳에 출두한 것에 토 달지 말라는 듯 나의 물음을 묵살하고 방 안으로 두세 걸음 내디뎌 깜박이는 형광등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예의 바르게 되물었다. 「실례지만 당신들이 새 산지기입니까?」 예스럽게 사냥복을 입은 그의 어깨에는 더께같이 옅은 회색빛을 띠는 눈이 얕게 쌓여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바깥은 자욱한 밤안개뿐이었다. 내 의아한 눈길에 그가 한가로이 어깨의 눈을 한 손으로 털어 내며 말했다. 「산 아래는 지금 눈이 내린답니다.」 산 아래서부터 산머리에 당도하기까지 어떻게 하여금 어깨의 눈 결정을 보존할 수 있었을까? 믿을 수 없는 생명력을 자랑하던 눈가루는 마룻바닥으로 떨어지는 즉시 축축한 물 자국으로 변모하였다. 문밖에 선 오른쪽의 거위영장 같은 자도 마찬가지로 어깨를 털었고 그제야 왼쪽의 체격이 작은 자도 어수룩하게 두 사람을 돌아보다가 몸을 흔들어 어둠에 잠긴 검은 눈가루를 흩날렸다. 「산지기요. 죽은 사람의 주장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들 이 마당에 무슨 소용입니까?」 뒤늦은 내 응답은 그들이, 특히 형광등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자가 나와 단독자를 살인자로 보지 않으리라는 예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보아하니 빈터에서부터 굵게 그어진 핏자국을 보고 따라왔을 터인데도 그가 지닌 태도에는 죽음마저 예사로운 것으로 만드는 느긋함이 배어 있었다. 거기다가 그는 산지기가 생전에 우리에게 뭐라 말했는지 이미 정확히 예상했다. 「그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겠지요? 그저 자기의 죽음을 세계의 멸망으로 재앙화한 데 다름 아닙니다. 그는 평생 세상의 끝을 제 죽음으로 쥐어 낼 수 있다는 헛된 미망에 사로잡혔습니다. 여하간 그건 내가 일임한 산지기의 소관이 아니에요.」

그의 말에 나는 안심해야 마땅할 터였다. 그것은 내가 이 산꼭대기에서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던 직위와 혼인, 동반자와 부산물에 대한 체념 등등이 모두 말소되고 다시 내가 단독자로부터 자유로이 떠나 평화로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한데 내게는 왜 그가 허락한다면 종말도 곧장 벌어질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 것일까?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여기서 떠나지 못하고 산지기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은, 거스를 수 없는 권위가 그의 여유로운 말투에 부여된 듯했다. 나는 그가 내릴지도 모를 명령에 거부하는 몸짓으로 보이고자 목침대를 떠나 판잣집을 나설 듯이 몇 걸음 떼어 내면서 코웃음을 쳤는데, 도리어 그 모습이 안절부절못하는 걸로 비친다는 걸 깨닫자 얼굴이 화끈해졌다. 「당신 말대로면 미친 노인네가 우리에게 위임한, 산을 지킨다는 괴이한 직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이유 또한 없는 것이로군요.」 나는 애써 그렇게 반항했으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한 손을 편 채로 치켜들었다. 「안 됩니다.」 나는 그가 보낸 수신호에 문밖의 둘이 안으로 들어와 위협적으로 굴거나 문가를 지키는 몸짓을 하리라 여겼지만 그들은 한 명이 안에서 얘기하느라 가운데가 비어 버린 대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서 있기만 했다. 「나는 당신들이 왜 셋이나 되는지 모르겠어요.」 내 항의를 이해하지 못한 단독자가 바보 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자는 다시금 지하에서 일면하였을 때 내가 혐오하던 모습으로, 우둔하고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되는 한 군상으로 돌아왔구나.〉 성이 난 내가 그를 거칠게 잡아당겨 내 뒤쪽에 세우자, 우리를 귀엽게라도 보았는지 체격이 작은 자가 숫된 웃음소리를 내었다. 선두에 선 자도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우려대로, 셋은 둘보다 많으니까요. 공동체 내에서 의견을 수렴할 때 과반을 형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오늘 산 정상에서 처음 대면한 사이이며, 그전에는 서로가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각자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는 서로 얘기 나누지 않아도 알지. 비유하자면, 미래가 우리를 점지한 거지요. 우리 셋은 운명 공동체입니다. 우리에게 어제나 오늘의 관계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내일의 희망만이 진리예요. 더불어 산지기라는 직분 역시 마찬가지로, 당신들이 받아들이든 그러하지 못하든 도래할 미래의 직무상 공백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산지기와 유선상의 연락을 서로 유지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오늘 밤에 이르러 통신이 두절됨으로써 그의 안위와 후계 선임 여부를 감사하기 위해 우리가 모인 것입니다. 선대 산지기인 노인이 비록 섬망에 시달렸으나 제 직무를 최후까지 올바르게 마쳤음은 분명해요. 이 자리에 당신들이 있음이 그 방증입니다. 이제 우리는 시간적 공백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경야에 서둘러 그를 장사 지내고 당신들에게 산지기의 의무 세부를 철저히 인계해야 합니다. 이는 지난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와 미래까지 계승되어야 할 전통이지요.」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말하는데도 어쩐지 그는 산지기처럼 제 운명의 노예라기보다는 주인인 듯 오만한 인상을 풍겼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자, 아니면 모든 실패를 극복한 자같이 그는 자신만만한 풍모였는데, 그것은 내가 감히 꿈조차 꿀 생각 못 하던 일면이기도 했다. 오전에 만난 동반자의 상사가 상대를 마주하기만 해도 자신이 사랑받을지 미움받을지를 깨닫는다고 말한 게 떠올랐고, 나는 눈앞의 그를 마주한 순간 이미 앞으로 그의 명에 거부할 수 없음을 은연중에 알았다. 그는 그동안 내심 찾아 헤매었던, 내가 꿈꾼 자기 자신보다 더 강인하면서도 나의 모든 자아를 의탁할 수 있을 만큼 고결한 주인이었다. 저간 그를 만나지 못했던 건 우연이나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다. 그가 내게 무심해서였다.

하지만 오늘에야 주인은 미소 짓고 나를 지긋이 살피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게 그의 흥미를 끄는 어떤 운명이 있어서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고갯짓하자 키가 큰 자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옳거니. 이자는 내가 차지했을 수도 있는 자리를 꿰차 그를 보좌하는 노 소설가로구나. 그가 획책한 내일을 구체적으로 설계하여 쓰기로 되어 있는 자야.〉 지금 막 제 낯을 드러낸 거위영장이 소설가라고 확신한 것은 그가 산지기를 꼭 빼닮은 까닭이었다. 내게 그 노인은 실패한 글쟁이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나는 도살당한 가축처럼 사지를 모아 쭉 뻗은 산지기와 새롭게 등장한 작자를, 둘이 쌍둥이처럼 닮았으나 운명의 갈림길을 따라 전연 딴판인 두 사람을 믿기지 않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새것처럼 보이는 작업복을 입고 한 손에는 굵직한 쇠 지렛대를 들고 있었지만, 평생 생원님으로 산 듯 곱상하게 주름지고 손에 굳은살도 없어 보이는 그가 뭘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어색한지 다소 쭈뼛대다가 주인의 성가시다는 듯한 흘김에 용기를 내서 우리에게 다가서며 으름장을 놓았다. 「밖으로 나가 기다리시오. 이곳은 당신네를 위한 공간이 아니란 말이오. 전대 산지기가 지었으니 그가 모두 떠안고 가야 할 것들이지. 이 집은 살아서는 터전이겠지만 죽어서는 그의 화장터요. 목재들을 땔감 삼아 저 멀리에서도 보이도록 봉화를 올릴 터이니 오늘이 지나기 전에 서둘러야 하오. 이 하룻밤이 인류의 새 이정표가 될 것임을 곧 깨닫게 될 것이오. 그러니 당신네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배움의 눈길로 이 모든 과정을 낱낱이 응시하는 게 좋을 거요.」 늙은 소설가는 이렇게 말하며 마치 짐승을 쫓듯 입으로 쉭쉭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쇠 지렛대를 휘둘렀고 나와 단독자는 뒷걸음질 치다가 목침대에 발이 걸려 우리를 몰아내는 자와 똑 닮은 시신 위에 주저앉았다. 「사자에 대한 존중이 없군. 하룻밤도 안 지켜보고 장사를 지낸단 말입니까?」 단독자가 전과 달리 유독 발끈하여 항의하는 소리에 그가 볼멘소리를 냈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야. 지천으로 널린 쇠똥과도 같지. 삶에 실패한 자를 향한 예우는 이만하면 충분해. 중요한 건 이후의 처리란 말이요. 아시겠소?」 나는 둘이 싸우는 걸 건성으로 들으면서 여기서 더 어기대는 게 좋을지 아니면 순순히 밖으로 나가는 게 이득일지를 계산속으로 따지는 중이었다. 주인과는 다르게 소설가는 우리에게 적대적이었고 이대로 굴다가는 험한 꼴을 면치 못하기 십상일 터였다. 〈우리가 산지기의 존엄을 지켜야 하는 유가족은 아니잖은가?〉 그러한 생각이 든 순간 내 눈에 단독자가 낯설고도 얕잡게 보였다. 왜 이자가 유달리 흥분한 것인지 이해 가지 않았고 마치 그동안 마법에 걸려 있다가 이제야 풀려났다는 듯이 여태 그와 동반한 사실이 견딜 수 없는 시간 낭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간의 동행이 나답지 않은 행동임은 분명했다. 나는 언제나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자신의 기동성을 높이고 유연하게 홀로 위기를 탈출하려는 본능이 강해서였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나 자신에게 환멸감이 들었지만, 정말이지 그는 내 몸을 무겁게 하는 족쇄 같았다. 「노인네를 예우하지 않는 건 우리야.」 내 비아냥에 그가 멋쩍은 웃음을 흘리는 동시에 실은 의식하지 못한 듯 시신으로부터 화들짝 일어섰고, 정작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조금이라도 푹신한 무엇에 앉은 게 마음에 들어 그대로 눌러앉았다. 진정 소설가의 말대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모양으로, 아까 산지기의 죽음에 호들갑을 떨며 주저리주저리 단독자에게 고백을 토로한 자신이 순진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 또한 내 말을 엄중히 인식함을 보여 주기 위해 일어나야 하기는 했는데, 마침 단독자의 의아한 눈길이 닿자 방금 주인이 그런 것처럼 흘긋 눈짓해서 그가 내 팔을 붙잡아 일으키게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인이 자못 기쁘게 손뼉 쳤다. 「좋아요, 좋아. 드디어 말을 알아들은 것 같군요. 이자가 의식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다 함께 밖으로 나가서 환담이나 나누면 되겠습니다. 이리로.」 그는 나와 단독자 사이로 들어와 우리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친근하게 문가로 이끌었다. 그 역시 죽은 자에게는 한 움큼의 측은지심도 없는 듯했다.

이미 소설가는 쇠 지렛대로 마룻바닥을 뜯어내고 있었으니, 하는 짓이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판잣집이 어찌나 조악하게 지어졌는지 널빤지가 쑥쑥 뽑혀 나왔다. 그러자 마루 아래로 판판하고 단단해 보이는 혼응토 기초가 드러났다. 「묘한 대비지요. 이런 집을 짓고 산 것은 순전히 전대 산지기의 형편없는 취향 탓입니다. 기반은 튼튼하니 당신은 여기다 더 나은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의 석재들은 모두 훌륭합니다. 옛 왕조 양식을 기이하게 비튼 양식을 이용해 보다 현대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을 거고요. 그런데 그 노인은 미적 감각은커녕 도통 제 출신 성분을 벗어날 줄 몰랐거든요. 가난은 죄가 아니지요. 그러나 거기에 갇혀 사는 것, 더불어 무엇을 보고 겪든 제 빈곤으로 귀결되는 건 죄입니다. 그는 더 크고 발전한 시대를 응시할 줄 몰랐지요.」 내 속을 번번이 꿰뚫어 보는 주인의 말에 나는 내심 감탄하면서도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괜히 불만을 끄집어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를 싫어하는 모양인데요?」 「그것은 당신이 자기와 달리 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늙음에 자격지심을 느낀다는 건 일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젊었을 때 상상한 것들을 오늘날 모두 이루었거든요. 가난으로부터 탈출했고, 무명을 벗어던졌으며, 자신이 작품 속에서 설계한 요소들이 퍽 늦었으나 세계에 반영되는 세태를 살아서 볼 수 있었지요. 문제는 그게 하나도 기쁘지 않다는 겁니다. 그의 상상력이 태생적으로 비천하였음을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머릿속의 공상이 곧이곧대로 이루어진다는 게 그다지 비범하지 않고 범상한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현실에 안주한 노년이었지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고 그가 생각하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신은, 보세요. 비교적 젊고, 모든 게 수포이고 원점입니다.」 주인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혼자로서도 얼마든지 새출발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라고 귓속말하고는 다시 목소리를 키워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여전히 쓸 만합니다. 오늘 일면하였다고 해서 그가 자격 없이 무작위로 선별된 건 아니지요. 지금의 작업이 즉흥적이지도 않고요. 오래전에 그라는 인생 자체에 대한 적합성 심사가 있었으며, 이 산 정상에 오늘을 위한 그의 사전 작업이 벌써 마쳐져 있는 겁니다. 당신이 보게 될 것들은 그가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조형물이나 다름없습니다. 주어진 사물과 환경을 예술적으로 응용하는 건 가히 그만이 소유한 전문 기술이지요.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그의 예술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와 철학에 반하는 건 허락되지 않으니까요. 나의 예술이지요. 한데 견물생심이라고, 부지불식간에 저만의 예술혼을 쏟다 보면 의뢰자가 아닌 그만의 색채가 강해지는 법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나아가, 종국적으로 나의 세계에 반하여 균열이 가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는데.」 그가 말을 멈췄을 때 우리는 문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문밖에 우두커니 서서 제 몸통만 한 목제 3단 사다리를 맨 앳된 청년을 나는 맞닥뜨렸다. 「나에게는 광산의 연약한 촛불과도 같이 민감한 소임을 수행하는 아이가 하나 있어 그러한 걱정을 불식시킬 것입니다.」 이리도 어엿하게 장성한 청년을 왜 주인은 아이라고 부르는 걸까? 그가 아이처럼 수줍고 비밀이 많아 보였고 행복하게 자란 소년 소녀를 볼 때 바라보는 이가 그러하듯이 기쁨과 남모를 슬픔이 교차하기는 했다. 〈나의 부산물이 저자처럼 번듯하게 자랄 수만 있다면!〉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부질없는 만일의 자기희생에 관한 미사여구를 덧붙이지 않으려고 내 허벅지를 남몰래 꼬집었다. 「너는 이름이 무엇이니?」 단독자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다정한 태도로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가 허락을 구하기 위해 물끄러미 주인을 올려다보았으나 아무 답도 얻지 못하자 쓸쓸히 고개를 내저으며 나와 단독자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당신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요.」 단독자가 황망함을 감추려고 급히 미소 지었다. 「우리는 이제야 만났는데 벌써 그렇게 가혹하게 구는 거니?」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벌벌 떠는 손으로 아이의 좁은 어깨와 사다리를 동여맨 거친 끈을 거쳐 가녀린 팔을 더듬더듬 만져 댔다. 아이가 얌전히 몸을 내맡기고 조리 있게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당신들을 아직 만날 때가 아니라고 그가 만류했거든요. 그러나 나는 쓸모가 있어요. 보세요. 나는 칠흑 같은 밤에도 고요하게 빛이 나요. 언제든, 누구든지 나를 알아볼 수 있게요. 하지만 내 빛은 연약해요. 조금만 위화감을 느껴도 급격히 시들어 버리죠. 나는 세계의 균열과 연결되어 있거든요. 내 목소리는 진실만을 말하고, 거짓을 고할 만큼 나는 자라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나를 보기만 해도 그 특별함을 알아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마주 보는 상대가 누구인지 진실로 알 수 있어요. 내가 여기에 이른 것은 당신들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어요. 당신들이 내가 찾는 이들이 맞는지. 아니었어요. 그의 말대로 시기가 너무 이르니까요. 더는 묻지 마세요. 내 이름을 알려고 하세요. 내 이름은 누구한텐 노예의 멸칭이지만, 다른 이에겐 옛 황제의 휘고, 또 다른 이에게는 낯선 이방인을 이르는 명칭이나 다름없어요. 그렇지만 이름이 무언들, 내가 노예인들, 황제인들, 이방인인들 지금의 나와 무슨 상관이겠어요? 당신들이 지금 내가 찾는 자가 아닌들 어떻겠어요? 언젠가의 내일에서 길 잃은 당신들을 내가 알아보고 찾아낼 테니까요. 오늘은 우리가 헤어질 거예요. 그렇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현생의 밑천이 떨어지면 우리는 다시금 태어날 거니까요. 꿈과 같이요. 오늘은 잠들면 끝날 하루의 마지막 밤중이니, 안심하세요.」 아이가 너무 명랑히 죽음과 이별을 이야기하니 내 흉금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은즉, 더욱 멸망이 가깝고 구원이 멀게 느껴졌는데, 그를 마주하고서도 작별해야 한다는 것은 이 나라에 들이닥친 여러 위협이 허상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구나. 그 순간이 머지않았을 거야. 그렇지?」 아이를 위로하고자 그렇게 말하며 좀 더 어루만지려는 단독자를 주인이 어깨를 붙잡아 차갑게 제지했다. 그는 자기가 설명하려던 걸 아이가 가로챈 데 심기가 불편하였으나 타고난 예의범절로 말을 끊지 않고 들어 준 것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보며 양해를 구하듯 고개를 까닥이는 그가 왜 유독 단독자를 냉대하고 이 자리에 없다는 것처럼 외면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신은 왜 내 새로운 동반자에게만은 무례한 겁니까? 제게 예를 갖추듯 그에게도 그러하세요.」 내 요구에 그는 당장 답하지 않고 어깨동무를 풀며 아이에게 〈이제 때가 됐으니 죽은 자를 꺼내 오렴〉이라고 말하며 자유로워진 손으로 뒤의 판잣집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이는 가혹해 보이는 등짐을 내려놓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주인에게서 풀려난 단독자도 그를 돕겠다며 아랫사람처럼 허둥지둥 따라갔다.

그제야 주인이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으로 내게 하소연했다. 「당신이 이리 말하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기꺼이 돕고자 하고 말씀한 바와 같이 예를 갖추었거늘 왜 내가 남에게 그렇지 않은 걸 두고 당사자가 아니면서 시정을 요구하는지요? 나는 상상력이 없습니다. 그게 당신과 같은 예술가를 곁에 두는 연유고 내게는 대신 나 자신을 넘어서는 야심과 실행력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원을 모두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자기를 지하실에 유폐하기를 바란다면 손수 지반을 파 내려갈 거고, 내 존재가 방해된다면 조용히 뒤로 물러날 겁니다. 그러나 당신을 향한 내 베풂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라고 청하지 말아 주세요. 그것은 나의 선의를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안개가 산 정상을 떠나 멀어졌고, 달빛이 나와 주인 곁을 비추고 있었다. 나야말로 영문도 모른 채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나는, 나는……」 그의 진심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고, 그럼에도 내가 놓인 상황을 이해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데 아연했다. 「나는 당신의 선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가 혼자였다면 당신이 무얼 베풀고 요구하든 능히 응종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시잖아요. 사람은 혼자일 수가 없습니다…….」 「모르셨습니까? 당신은 혼자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나와 그의 대화는 단독자와 아이가 시신을 함께 끌고 나오면서 끊겼다. 아이가 대화를 엿들었는지 산지기를 내려놓고 가쁜 숨을 내쉬면서 나를 타일렀다. 「그에게 뭐라 하지 마세요. 그는 자신이 없는 내일까지 생각하는 진정한 주인이에요. 당신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 생각한 적이 있나요? 그는 자기가 누려도 될 영달은 안중에도 없어요. 우리가 여기 이 자리에 모두 모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덕임을 모르나요? 왜 당신은 소인배처럼 구나요? 그는 당신 같은 사람도 활보할 수 있는 더 큰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에요.」 그 와중에 단독자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와서 귀를 가까이 들이대 보세요. 노인이 미약하게 숨을 쉬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나를 포함한 누구도 돌무더기 위에 올려진 시신이 살아 숨 쉬리라 여기지 않고 그에게 가지 않았다.

어느새 안에서 작업을 마친 늙은 소설가가 판잣집 밖으로 나와 주인이 새로운 명을 하달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빈터의 출입구인 암굴 속으로 물러났다. 나 또한 우물쭈물 곁으로 다가가 심기가 불편해지진 않았을지 신경 쓰는 한편으로 그가 굴속의 어둠에서 응시하고자 하는 광경이 무엇인지를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좇아 알아내려고 했다. 그러자 먼 옛날의 계몽주의 화가가 월력에다 그달에 시민들이 해야 하는 일거리가 무엇인지를 한 폭의 그림에 빼곡하게 모두 그려 낸 것처럼, 멀지 않은 광경이 불가사의한 수준의 원경으로 물러나 다른 사람들이 괴이하도록 큰 달 아래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가 훤하면서도 조그맣게 내다보였다. 단독자가 아이를 도와 3단 사다리를 길게 펼치고 등짐용 끈을 풀어낸 다음 그걸로 시신을 맨 윗단에 동여매는 중이었다. 〈노인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를 포기한 참인가? 한데 살았다고 보기에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창백해. 왜 그는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나나 주인의 관심을 끌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가가 집 주변을 돌며 판자때기를 몇 개 떼어 내는 동시에 지붕과 벽이 폭삭 내려앉음으로써, 오로지 쇠 지렛대 하나만으로 금세 철거가 완료되었다. 그는 바닥에 널린 널빤지들과 불이 나간 살충등을 한쪽으로 치워 내 지하로 통하는 비밀 문을 열고는 아래로 내려가 사라졌다. 그가 내려간 지하 시설에 발전기가 있는 것이 명백했는데, 잠시 후 마치 빛으로 지어진 고대 양식의 신전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 펼쳐져서였다. 판잣집을 둘러싼 부지에 일정한 간격마다 원형으로 은밀하게 설치된 탐조등들이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곧은 광선의 궤적을 그리면서 드러난 장엄한 빛의 기둥으로, 나와 단독자가 홀려 산을 오르게 했던 보잘것없던 살충등 조명보다 훨씬 도발적인 표적이었다. 그것은 이 도시의 어둠 속에 웅크린 수많은 이의 염원이나 분노, 슬픔, 혹은 영혼의 형상화같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보세요! 그의 조형주의적인 색이 드러나는 장관이로군!」 주인이 예상하지 못했는지 놀란 기색으로 손뼉을 쳤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그려 내는 큰 그림이 무엇인지 아직도 짐작은커녕 이렇게 빛으로 주위의 시선을 끌다가 저 나라로부터 포격을 당하는 건 아닐지 불안이 일었다. 「지금 불필요하게 시선을 끌고 있어요! 당신은 저 나라와 전쟁 중인 걸 모릅니까?」 할 일을 마친 산지기가 두 손을 펼쳐 폴짝폴짝 뛰었다. 저들은 미쳤다. 저 나라와의 긴장 관계가 이 나라 내부의 알력 다툼과 협잡질을 통하여 폭탄처럼 터져 나가게 생겼는데, 그들은 단지 장사를 지내고 새 산지기의 취임을 알리기 위해 자기네를 표적 삼았다. 그것이 미래와 무슨 관계란 말인가? 내가 보지 못하는 내일이 그들에게만 보이는 게 틀림없다. 만약 그들이 준비한 것이 휘황찬란한 마지막이라면 이치상으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나를 조롱하는 듯하다. 내가 소설로 써낸 부조리한 이야기들이 지금처럼 전적인 몰이해로 비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몸소 출현한 독자들 같다. 단독자는 왜 여기에 끼어들어 그들을 돕는 것인가. 동반자로서 내 동료로 보이는 자들을 거드는 게 일종의 뒷바라지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때 산 너머 남쪽의 컴컴한 지평선이 일순간에 수많은 인공조명으로 다다귀다다귀 밝혀지며 수도의 야경이 원상 복구되었다가 금방 다시 꺼졌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요.」 그렇게 말하며 주인이 양손으로 산지기의 피가 말라 엉겨 붙은 내 손을 뜨겁게 잡았다. 「이처럼 나라 간의 관계는 복잡한 겁니다. 일개 판윤의 독단으로 벌어진 내분이 국지적 도발로 이어졌다고 해서 전면전의 양상으로 치닫지는 않을 거예요. 국경이 인접한 두 국가 사이의 긴장 관계란 해소가 아니라 그 유지 속에서 내부의 단합이라는 목적이 달성되는 겁니다. 하물며 1인의 안일한 결단이 국가를 대신하지 못하는 게, 이 나라는 곧 개인적 결정의 말소를 통하여 결성된 집단적 개체이기 때문이지요. 사리에 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나라는 다수결의 괴물입니다. 다수의 합의가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오직 그뿐입니다. 오늘 판윤의 실책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축출되리라는 전망을 앞당겼을 따름이며, 모 기업의 마천루 최고층에 스스로 유폐되기를 택한 채 수도의 한 줌 치안 병력으로 농성 중인 현재가 그 증거입니다. 내란은 빠르게 진압될 것입니다. 이 나라의 국민이 정국의 의외성을 참지 못하는 까닭으로, 압도적으로 점령당하거나 마치 신체에서 면역 반응을 끌어내듯 끓어오른 다수가 불순 세력을 몰아내거나 둘 중 하나만을 원합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에요. 첨단 기술을 정책에 응용하기 능통한 판윤이 정국에 불확실성을 더하고자 고도의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하였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는데, 거짓 심상들이 언제부터 얼마나 매체에 뿌리를 내리고 심지어 국경을 넘어 선제적인 도발을 감행했는지에 관해 여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큰 변수입니다. 이에 정부가 국가적 정전 사태를 자행함으로써 판윤의 교묘한 흑색선전을 뿌리째 뽑으려고 한다는 게 제 추측입니다. 지금 불이 들어왔다가 도로 나갔다는 것은 반역 분자 색출 작업이 거의 완료되었다는 것을 뜻하지요. 아까 국경을 넘나든 서로 간의 공격이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건 국경의 대화 창구가 열려 오해가 일소되었다는 것일 테고요.」 그 말을 듣자 나는 도리어 주인이 두려워져 손을 빼려고 했으나 암굴의 눅눅한 어둠에 잠긴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은요? 당신도 1인이 획책한 세상을 꿈꾸잖습니까. 마치 한 사람의 꿈이 모두의 현실이 되는…… 그런 것 아닌가요?」 그가 손을 풀고 술 취한 사람에게 그러하듯 내 등을 토닥였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는 오히려 지금처럼 하나뿐인 세상을 열망하지 않습니다. 염원하는 것은 이 세상과 분리된 낙원이에요. 나는 고결한 개인으로서 낙원을 꾸려 나가고 지켜 낼 거며, 임무를 완수하는 대로 1인의 권력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자 나는 반대로 그가 죽은 뒤 남겨질 세상이 무서워졌는데, 다른 누가 그처럼 고결한 자기희생을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한 사람이 살아생전에 정복할 수 있는 영역은 무궁무진하나,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짊어지고 떠날 수 있는 악덕은 지극히 유한하다는 게 지난 역사에서 수없이 증명된 까닭이다. 「산지기는요……? 산지기는 무얼 하면 되는 것입니까?」 여전히 겁을 집어먹은 내 물음에 그는 체념한 듯 소박한 부탁을 건넸다. 「그저 그 자리에 있어만 주세요. 당신의 무사 안전이 곧 세상과 낙원이 균형을 이루어 영원을 향하여 지속한다는 방증이니…….」

주인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지각이, 그러나 그가 내게 낙원이 어떤 곳인지 보여 주지 않는 이상 그 그릇된 해석을 불식시킬 방법이 없다는 안타까움이 들었는데, 오늘의 내가 내일의 이상향을 볼 권리가 없다는 자명한 사실이 서로 간의 이해를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었다. 죽은 산지기를 매단 사다리가 아까까지만 해도 판잣집이었던 널빤지 더미 위에 세워졌다. 그것은 역사책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살풍경이었다. 광기로 물든 사람들이 저간 은연중에 품어 오던 적개심을, 제각각 속으로 부정하느라 애쓰던 죄의식을 한 사람, 혹은 한 시신에 전가할 때 벌어지는 화형식이었다. 그때에서야 나는 주인의 언중에 은폐된 몇 가지 진실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 산머리의 빈터는 낙원이 아니고 그 저편임을. 이 요란한 의식을 치르는 장소는 세간의 시선을 낚아채는 눈가림 용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곳은 낙원이 아니라 세속의 율법에 속해 있으며, 그에 따라 이미 차갑게 식은 시신을 가지고 거짓 희생양 제의를 올리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 인류가 요해하지 못할 원시적인 의식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손가락질할 것이다. 〈어떻게 이리 보란 듯이 죽음을 처리할 수 있는가?〉라고 경악할 터다. 그렇기에 낙원의 입구가 멀지 않은 곳에 꼭꼭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추측하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이곳을 지옥의 문으로 상상할 것이다. 여기는 유사시마다 주기적으로 발각되었으리라. 나 같은 이방인에 의하여. 혹은 노쇠한 산지기의 죽음으로 발생한 직무의 공백에 의하여. 이 둘은 인과적일 수도 있다. 발각되었기에 전임자와 그의 숙소를 비롯한 모든 흔적이 소각되고 목격자를 공모자로 매수하는 거다. 오늘은 내일을 덮어 감추는 장막이고, 죽음은 삶을 보전하는 제의다. 산지기의 말대로다. 산은 필멸자를 배신한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부지불식간부터 주인의 고운 손에는 내가 단독자를 위협하려고 찾아 주워 들었던, 그리고 산지기의 피로 물들고 부러진 마룻대가 들려 있었다. 그가 마치 성냥처럼 암굴 벽에 세게 긋자, 그것은 유황 대신 피로 산화하는 횃불이 되어 활활 타올랐다.

「오늘이 가기 전에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타오르는 성화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보이는 그가 말했다. 나는 엄숙한 제사장을 보조하는 어리숙한 사제가 되어 얼떨떨하게 그를 따라 다시금 빈터로 돌아왔다. 마치 군중 없이 선전의 책임자들이 먼저 모여 의식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아니, 화형식을 거행하는 장작더미와 동떨어진, 장방형으로 이어져 정방형과 원형으로 끝맺어진 폐허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군중으로 들어찬 광장이요,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시선 자체다. 나와 단독자 그리고 세 불청객은 그들을 등지고 서서, 빛의 기둥에 에워싸여 제물로 바쳐진 죽은 산지기를 올려다보고 있다. 〈무엇을 위한 불장난이란 말인가?〉라고 속으로 재차 묻던 내가 순진하게 여겨질 만큼 무언의 압박이 꼭뒤로 느껴진다. 이 의식이 망쳐지면 침묵하던 민중이 사납게 돌변하여 우리를 덮칠 것 같은 긴장감이다. 단독자가 다정하게 나를 안는 척하면서 울음 섞인 소리로 귓속말했다. 「산지기가 살아 있어. 냉골처럼 차게 식었지만, 미약하게 떨면서 얕은 숨을 쉬고 있다고. 나는 저들의 미친 짓에 동조하는 척하며 안심시키는 한편으로 어떻게 여기서부터 우리가 빠져나올 수 있을지를 궁구했어.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저 불쌍한 노인을 허술하게 동여매서 정신이 든 그가 힘을 쓰면 쉽게 풀리도록 한 거야. 그가 몸에 불이 붙기 전에 깨어나길 바라야겠지만 말이야. 할 만큼 했으니 그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도록 하고, 우리는 이만 빠져나가야 해. 아까 도시에 불이 들어왔었지. 너의 동반자와 아이는 살아 있을 거야. 그들에게로 돌아가. 나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산하는 대로 헤어지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라니? 그것은 탈출을 말하는 것인가, 나와의 작별을 말하는 것인가? 그의 측은지심에 신물이 날 지경이다. 더는 살길을 모색할 만큼 상황이 녹록지 않고 이리도 복잡다단한 덫에 빠져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데 그는 내가 두고 온 동반자와 부산물까지 챙겨 주려고 한다. 나조차도 그들의 안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고, 심지어 한나절 만에 그들이 이미 지나간 과거로만 치부되는 마당에 말이다. 그런 나도 지금 내가 그나마 책임질 수 있는 대상이 눈앞의 그뿐임을 안다.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을 속일 정도로 은밀히 귓속말하기에 내 목소리는 크고 설령 그들이 듣지 못한들 나 자신이 제 속셈을 의식하여 부자연스럽게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돌처럼 굳었고, 어쩌면 흉금마저도 긴장 속에서 얼어 버려 감정들을 잃어버린 듯했다. 계획은 없다. 우리는 여태까지 휩쓸렸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더라도 매한가지다. 두 개인이 힘을 합쳐 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세 사람이라면 모를까. 함께하는 둘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짐 덩어리다. 내가 단독자에게 그렇고, 그가 나에게 그렇다. 혼자였어야 했다. 번번이 귀결되는 답이다. 산지기는 지혜로웠다. 그는 혼자서 자신을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한 명을 유인하여 둘을 옭아내는 사냥 방식을 알았다. 단독자의 말대로 정녕 그가 살았다면, 단지 질긴 명줄만이 그의 결점일 따름이다.

「신임 산지기들을 관망실로 안내하시오!」 주인이 호령한 순간 나는 단독자의 어설픈 탈출 시도가 봉쇄되었음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노 소설가가 나와 단독자의 어깨를 뒤에서 밀어 장작더미 앞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내 뒤통수에다가 대고 〈댁은 생각하지도 못할 세부 사항과 관록을 똑똑히 보시오. 배움이 될 것이니〉라고 훈수를 두자, 내가 발끈해 반박했다. 「당신의 작업은 인위적이기 짝이 없고 번잡한 데다 지난 역사를 기괴하게 모방한 것에 불과해요.」 내 말에 그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것이야말로 현대지. 그쪽이 말한 내 결함을 나는 똑똑히 알아. 그게 나의 밑천이니까. 죽은 산지기는 제 밑천이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지. 나는 그렇지 않아. 그와 나는 닮았지. 원하는 것도 같았어. 그런데 왜 그는 홀로 비참 속에서 죽고 나는 그렇지 않나? 그는 굴욕을 감내하고 끝을 기다렸지만, 나는 그런 걸 생전 참아 본 적 없이 끝을 향해 달려갔기 때문이라네. 이제 보시게. 정직하지 못한 나는 내 허위적인 양식으로 하늘에 닿을 요량인데, 그쪽은 뒤주에 갇히게 생겼구먼.」 그가 말한 뒤주란 널빤지들을 들어낸 혼응토 바닥에 난 정방형 지하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두꺼운 무쇠 문이 위로 활짝 열려 있었다. 밖에서 들여다보기에는 자기 유도 방식 특유의 공명음으로 거슬리게 웅웅대는 투박한 모양새의 영구 자석 발전기가 공간의 절반을 차지했고, 나와 단독자 두 사람이 겨우 비집고 들어가 서 있을 수 있는 정도만 남은 공간 맞은편 벽에는 직각으로 구부러진 사각 관이 달려 있었다. 「이 관망실은 주인께서 신임 산지기를 배려하여 특별히 주문하신 공간이오. 전임 산지기의 화장 광경을 안전하고 비밀이 보장된 장소에서 목도하며 추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 시선 방향을 좌우 360도로 회전 가능한 잠망경이 달려 있어 안에서도 시야에 막힘이 없고, 또한 환기 장치를 통하여 신선한 공기가 유입됨은 물론이요, 바깥의 소리도 생생히 들리외다. 거기다가 이 중력식 자폐문은 한 번 닫히면 설계자인 내 손길이 닿지 않고서는 밖에서 절대 열 수 없소이다. 당신들이 충분하게 추모를 마치고 나서 제 몸무게를 실어 밀어내기만 하면 안에서는 간단하게 열리지. 문이 무엇에 깔려 있더라도 힘차게 튕겨 오르게 되어 있어.」 소설가는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 시범을 보였고, 문을 닫은 순간 그가 안에서 불을 켠 양 도시의 지평선이 마치 개장한 놀이공원처럼 휘황찬란하게 조명을 밝혔다. 문이 용수철처럼 덜컹 거세게 열리더니 안에서 잠망경으로 불 켜진 야경을 보았을 그의 상반신이 솟아올랐다. 그는 어쩐지 히죽히죽 웃는 낯이었다. 「보시오.」 마치 자신이 해냈다는 듯이 말하는 그에 이어 주인마저 〈그것 보십시오. 예외 사태는 일소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양팔을 펼쳐 인공조명으로 이글거리는 지평선을 아울렀다. 밤의 도시는 아까처럼 깜박 눈을 떴다가 다시 잠들지 않고 지속적으로 우리를 환히 응시했다. 내가 사는 동네가 자리했을 북쪽 가까이는 건물이 야트막하여 비교적 판판한 구획마다 가로등의 주황 불빛이 실핏줄처럼 이리저리 얽혀 있었고, 남쪽으로는 수도를 횡단하는 강줄기를 따라 늘어선 고층 건물들 사이로 유달리 높이 솟은 네 개의 탑이 전신에서 눈 부신 빛을 형형색색 뽐내었다. 그중에는 판윤이 갇혀 정부와 대치 중인 사대문 안의 반월형 탑도 있었다. 탑은 검은 땅에 틀어박힌 빛나는 반달이 되어 남쪽 밤하늘의 자오선을 지나친 상현 망간의 노란 달과 시차를 드러내 보였고, 나는 때 이른 창업자의 죽음과 물거품이 된 자서전 대필 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의 일상이 되돌아온 지금 내가 놓친 큰돈이 아른거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필 수임으로 동반자와 부산물을 떠날 궁리만 하던 나는 이제 나를 가지고 노는 운명에게 그 돈을 고스란히 넘겨서라도 둘을 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화를 걸어 보세요.」 아이가 사뭇 순진무구한 어투로 내게 권하자 그걸 보던 주인도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그들은 내가 마지막 희망까지 내버리기를 바라는 것일 테다. 내가 머뭇대는 동안 다른 네 사람이 몰려들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가족이 나에게만 있는 듯 고아처럼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기계적으로 휴대 전화기를 켜서 동반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두가 통화음을 가만히 들을 뿐이었다. 드디어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어보쇼〉라고 낯선 말투의 사내가 응답했다. 주인이 내 휴대 전화기를 받아 들어 널빤지 더미에 던져 버려 땔감으로 전락시키고는 말 한마디로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했다.

「시간이 다 됐습니다.」

나는 멍한 정신으로 소설가에게 붙들려 단독자와 함께 관망실로 던져지다시피 떠밀려 내려갔다. 발전기의 진동에 내 머리마저 공명하여 웅웅대며 공회전하는 것 같았다. 문이 닫히기 전 나는 자신 없이 위를 올려다보았고,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과 큼직한 달이 내게 쏟아질 듯이 가까워지는 환각이 잠시 일었다. 언젠가의 밤에 나는 동반자와 함께 부산물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서로를 반려자로 여기는 한 쌍이 적요한 밤이면 으레 주고받는 대화 주제로, 훗날에 겪게 될 노년의 죽음에 관해서였다. 오만한 나는 앵무새처럼 외운 말을 떠들어 댔는데, 구주의 한 중립국에서는 약물로 고통 없이 스스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법적으로 허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노년까지 함께한다면, 부산물도 없고 둘 뿐이라면, 더는 살아갈 희망 없고 육신마저 쇠약해진 그때 우리의 소원이 함께 실린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중립국에 소재한 설산 어느 한 자락의 별장에서 의사가 건네는 주사기를 받아 들고 그림 같은 설경 위로 펼쳐진 밤하늘의 수많은 별이 자아내는 신화 속 별자리들이 우리를 반가이 맞이하는 가운데 홀가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게 나의 계획이라고, 그렇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마무리일 거라고 내가 말했던 기억이 바로 지금 떠올랐다. 구주의 중산층이나 향유할 법한 그런 허락되지 않은 미몽을 왜 내가 감히 꿨던 것일까? 지금에서야 아무 의미도 없다. 그때 동반자는 뭐라고 대꾸했었나? 그는 어떻게 죽기를 바란다고 말했을까? 그가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기는 한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기억도 없다. 다만 그가 불 꺼진 실내의 어둠에 잠겨 있을 때 창가의 휘장 사이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에 노르스름하게 밝혀진 부산물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하던 모습이 머릿속 심상으로 잔존했다. 우리가 염두에 두는 먼 미래의 모든 가능성마다 그가 부재함을 그는 알았을까? 그래 봤자 다 끝이다.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장래의 죽음마저 내 맘대로 해치우고 싸늘하게 식어 갈 내 곁에 동반자마저 눕혀 놓고자 했던 지난날의 내 탐욕이 현재는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눈을 감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싹 붙은 단독자의 떨리는 몸이, 미지근한 체온과 비릿한 피비린내만이 내게 전해졌다. 〈왜 이제야 우리는 관뚜껑이 닫혀 못 박혔을 때 시신의 관점이 되어 영원한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절망하는 것일까? 이 장례의 주인은 우리가 아닌데도 말이야. 완전한 어둠이 우리의 지각을 흐린 거야.〉 곧 발전기에서 나는 온열 때문에 땀이 나고 숨이 차기 시작했다. 소설가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지하 관망실은 사용자의 편의성이 형편없었다. 가슴께에 자리한 사각 관 모양 잠망경의 아래쪽 거울을 들여다보려면 좁아터진 공간에서 벌을 받듯 엉덩이를 죽 내밀어 발전기에 붙인 채 엉거주춤 서 있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옆얼굴을 서로에게 바싹 붙이고서 아래쪽 거울에 머리를 들이댔는데, 폐허의 수많은 돌부리 중에 숨겨져 있을 위쪽 거울로 보이는 바깥은 실제보다 한층 더 크고 거의 한밤인데도 꽤 또렷하게 보였다. 한 시야를 공유하는 두 몸이 되었으므로, 시선을 돌리려면 손잡이도 없는 관을 각자 양쪽에서 붙잡아 한 방향으로 힘을 줘서 조정해야 했다. 내가 맞댄 그의 볼에 힘을 주면 그가 자기 쪽으로 거울을 틀었고, 반대 상황에서 나는 내 쪽으로 시야를 조정했다. 360도로 전경을 톺아보기에는 내부가 비좁아 우리에게 주어진 시야는 한정적으로, 장작더미와 그 위로 솟은 사다리 윗단의 산지기 그리고 그 앞에 선 세 사람을 지나 벼랑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 일부가 한계였는데, 불현듯 언제부터인지 지평선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장치의 오류인지 다시금 정전이 불거진 건지 확실치는 않지만 왜인지 바깥의 세 사람이 부리는 술수에 속은 기분에 분통이 터질 것 같았다. 단독자도 답답했는지 헛웃음을 터뜨리며 농담했다. 「이렇게 제한이 많아서야. 가능만 하다면 지나가던 새가 잠망경 바깥 거울을 물고 날아가서 훨씬 트인 시선으로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는 그가 미워 나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맞닿은 볼로 그가 몇 마디 더하려고 입을 움찍거리다가 냉담한 내 반응에 도로 다무는 게 느껴졌으나, 나는 뒤늦게 괜히 쐐기를 박으려고 퉁명스레 입 열었다. 「조용히. 장례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야.」 아이가 두 팔로 머리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주인에게 아무 문제 없다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기이하게도 잠망경으로 보이는 시야에서 아이는 아까 자기가 말한 것처럼 일렁이는 하얀 빛무리에 감싸여 있었다.

그러자 그간 미적거리기만 하던 주인이 두 사람 앞으로 나서서 장중한 목소리로 추도사를 읊기 시작했다. 지하에서도 말이 또박또박 잘 들렸건만 그는 갈수록 흥분하여 목소리를 키웠는데, 정작 언표하는 바는 점차 논지를 잃고 두서없는 장광설로 치달았다. 「우리는 육신이 땅으로 돌아가면 자신이 대지가 되리라고 생각하지요. 선뜻 그 말은 이치에 맞아 보입니다. 시신이 썩어 분해되며 땅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자아가 무엇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가 될 수 있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흙의 일부분이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땅은 아닙니다. 육신을 총괄하던 하나의 자아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그 지휘 통제권을 다른 어디에서도 되찾지 못합니다. 자아, 즉 정신 자체가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사고를 잃고, 감각을 잃고, 모든 권한을 말소당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시 정신의 소멸을 두려워했지요. 육체의 독재자로 군림한 과거와 현재를 계속하여 붙잡으려고 합니다. 정신의 소멸은 누구나 알다시피 단지 나의 완전한 해체를 뜻합니다. 다른 무엇으로 재조립되든 그것은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나 자신에게도 말입니다. 생전 한 번쯤 상상하는 내가 없는 빈자리가 지닌 꺼림칙함은 바로 자아가 지어낸 착각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한데 태어나나 죽으나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이 새로이 생성 혹은 소멸되는 게 아니라 상태 변화하는 것뿐이라는 데 돌이켜 보면 생겨나고 사멸하는 것은 오로지 바로 이 자아가 지니는 의식이라는 겁니다. 자신을 의식하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한 사람은 줄곧 본질적으로 빈 그릇인 셈이지요.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의식을 가진 빈 그릇입니다. 스스로의 빈 부분을 의식할 수 있는 한 질그릇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인류의 역사는 존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무용한 투쟁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철학과 종교가 그 증거지요. 현대에 이르러 다행히도 우리는 그렇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빈자리에 아무것도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영혼과 신이 모셔졌던 빈자리는 지금은 아무런 시도 없이 그저 빈자리입니다. 과거의 거추장스러운 신비가 벗겨진 지금 현대인은 스스로의 빈 부분을 의식하지 못하는 빈 그릇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과거와는 다른 두려움의 본질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영혼이나 신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자체가 바로 그릇의 공간을 채우는 물질이라 믿는 것. 그게 우리가 죽으면 사람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리라는 공포의 근원입니다. 하지만 만일 사람이 정신 자체라면 우리는 무게를 지니지 않아야 옳습니다. 중력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정신이 아니라 물자체, 중력의 작용을 받아 무게를 지닌, 살과 뼈와 피를 지닌 한 인간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정신이 물질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강박하게 되는 의식에서 벗어나 빈 그릇이라는 순수한 본연을 깨닫는 한 과정입니다.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산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교훈이란, 그저 의식되는 삶이 덧없고 허위로 가득 찼다는 데 다름 아닌 겁니다. 여기 죽은 산지기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그것이 한사코 지난 시대에 머물려고 한 그가 의도치 않게 해낸 현대 예술입니다. 예술의 모든 양식은 인간의 모든 덧없는 생의 고통을 조롱하는 데 지나지 않음을……」

말하는 내내 그는 횃불을 든 손을 위협적으로 여기저기에 겨누며 부산스레 돌아다녔고, 솔직히 주인이라는 그의 지위에 견주어 바람직한 태도라기에는 노예처럼 초조해 보였다. 그의 장황하고 고인에게 모욕적인 추도사를 더는 귀담아들어 주기도 곤욕인 그때, 단독자가 내 귀청이 떨어질 양 크게 너털웃음 쳤다. 바깥에 선 세 사람도 그 웃음소리가 들렸는지 당황하여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나다! 고얀 놈들! 더는 죽음은 없다!」 그가 산지기를 흉내 내며 그들을 희롱하는 연유를 나는 알 것 같았다. 죽음의 선고가 내려졌으나 아직 숨이 붙어 있다고 믿어지는 산지기가 기적처럼 깨어날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것이다. 주인이 허둥지둥 횃불을 공중에 걸린 사다리를 향해 쳐들며 캐물었다. 「말하는 당신은 누구시오? 죽은 산지기요?」 단독자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헛소리를 웃음기 섞인 어투로 지껄였다. 「나는 죽음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허위였다. 단지 봄날의 춘몽 같은 단잠일 따름이다. 오직 깨어남만이 오롯이 있다. 모두 깨어나라!」 주인을 놀리는 데 재미가 들린 그가 〈깨어나!〉라고 재차 외쳤다. 그러자 정말로, 산지기가 기괴하고도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쳐 사다리를 흔들거리며, 두 눈을 부릅떠 깨어났다. 또한 불 꺼진 도시마저 단독자의 부름에 응답하여 환히 깨어났다. 피가 모두 빠져나가 푸르뎅뎅한 산지기가 고함치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단 한마디 말을 뚝뚝 끊어 가며 발설했다. 「도―망―쳐―!」 죽음 속에서 무슨 끔찍한 것을 보았던 걸까? 단독자가 허술하게 묶었던 매듭이 헐거워지면서 노인의 몸이 새우등처럼 휘어 사다리에서 대롱거렸다. 주인이 자신의 의식을 망친 데 악에 받쳐 횃불을 널빤지 더미로 던지며 〈죽어!〉라고 외쳤다. 그러나 불은 번지지 않고 도리어 꺼졌다. 그가 황망하게 아이를 돌아보았고 그러자 어떤 변화를 감지했음이 틀림없었다. 잠망경의 아래쪽 거울로 지켜보던 나에게는 변모의 양상이 똑똑히 보였다. 아이를 감싸 일렁이던 흰 빛무리가 힘을 잃고 사그라진 것이다. 단독자가 사다리에 위태로이 매달린 산지기를 구하고자 두 팔을 들어 힘껏 제자리에서 뛰어올랐고, 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세차게 튕겨 열렸다. 「안 돼!」 그걸 본 바깥의 노 소설가가 절규했다. 그것이 자기가 주인의 지시로 준비한 의식이 망쳐진 데 대한 다급한 만류가 아니라, 그 모르게 설계한 계획이 물거품 된 데에 대한 절망임을 나는 눈치챘다. 소설가가 우리를 안전하게 엄폐시키려 굳이 관망실을 지하에 지었으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찰나 문밖의 하늘이 별안간 대낮처럼 청명해졌다.

징집병 시절 몸에 인이 박이도록 훈련받은 결과가 십수 년 만에 힘을 발휘했다. 단독자가 문턱을 잡고 바깥으로 기어오르는 사이 나는 두 눈을 양손으로 가리고 입을 벌린 채로 바닥에 배를 띄우고 팔꿈치와 발끝으로 엎드렸다. 그 상태로 내가 다급하게 〈이리로 와〉라고 그를 불렀다. 한데 내 귀에도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마치 양심에서 나온 듯한 내면의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눈을 떠. 하나도 놓치지 말고 응시하는 거야.〉 내 안의 부름에 나는 눈을 떠 몸을 일으켰다. 잠망경의 거울 속 공중에 산지기를 내건 사다리가 보잘것없는 인공조명들이 이룬 빛기둥이 아니라 거대하고 눈부신 흰 광휘를 등지고 선 걸 얼핏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내 머리 위에서 버둥거리는 그의 발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하늘 전반이 번개처럼 번뜩였다. 곧이어 무지막지한 힘이 단독자를 바깥으로 내동댕이치면서 나까지 무력하게 딸려 나갔다. 우리는 폭압에 휘말려 널빤지 조각들과 함께 회오리바람을 타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대기가 찢어지면서 귀신같이 섬찟하게 울어 댔다. 시야가 끝없이 뒤집히는 가운데 갈기갈기 찢겨 숯덩이가 된 산지기와 주인과 소설가의 신체들을 보았고, 희한하게도 몸에 불이 붙지 않고 온전한 아이가 날쌘 제비처럼 하늘을 한 바퀴 순회하며 우리를 향해 작별의 의미로 손을 흔드는 모습이 환각처럼 뇌리에 박혔다. 한편으로 방금까지만 해도 내가 있었던 머리가 벗겨진 바위산이 내려다보였는데, 우리가 모르는 새에 산중으로 피신하여 등산로를 오르던 수많은 피난민이 불타고 풍비박산 난 소나무들에 깔려 돋보기 아래 개미들처럼 타 죽고 있었다.

우리는 하늘로 날아오른 두 사람의 단독자였다. 신이 우리를 불러들인 듯했다. 상공을 잠식한 반구형의 먼지구름 형상으로 우리 앞에 현시한 신은 곧 버섯 모양으로 솟아올라 불기운으로 불그죽죽한 낯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렸다. 그가 제힘을 주체하지 못해 뭉게뭉게 부풀 때마다 응축된 증기가 터져 나와 둥근 고리 형상으로 퍼져 나갔다. 그가 열풍으로 입을 우물거리며 우리 각자에게 묻는 것 같았다. 이것이 원하던 죽음과 세계의 멸망이냐고. 말할 새가 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지난날 나의 죽음이 심히 보잘것없이 끝나리라고 전망했었지요. 한 사람이 견딜 수도, 표현할 길도 없는 크나큰 고통과 함께 웅장한 죽음이 내게로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이렇게 세계의 멸망과 한 개인의 죽음이 일치할 줄이야. 나에게는 답해 줘요. 당신은 저 나라의 작품인가요?〉 내 속엣말이 불만족스러웠는지 그는 아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낯을 감추었다. 그리고 지독한 열기가 나를 덮쳐들었다. 왼손에 찬 잠수부용 시계의 고무 시곗줄이 녹으면서 마치 용접봉에 지져진 듯 손목에 끈끈하게 달라붙었고 불길한 청록색으로 빛나는 시곗바늘 분침이 아까 설정한 생존 시각 직전에서 고장 나 멈추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내가 숨을 들이켠 순간 폐가 불을 삼킨 것처럼 뜨겁게 타들었다. 나는 온몸의 피부가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고통 속에서도 양손으로 여전히 단독자를 붙잡고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 그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소설가의 임무란 그게 아니라며 열풍이 나를 짓누르는 통에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속절없이 쑥대밭이 된 도시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소설가로서 내가 무엇을 응시해야 한다는 것일까? 도시는 잉걸불이 이글거리는 잿더미로 지은 성에 성난 파도가 덮친 듯했고, 강대신 불길이 폐허가 된 수도를 구불구불 횡단했다. 유사 이래 벌어졌던 수많은 전쟁을 다룬 책이나 매체에서 매번 대동소이하게 재현된 광경으로, 여기에 나까지 끼어들어 참상의 심상을 굳이 덧붙일 건 없어 보였다. 물론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곳 나의 수도에서 벌어진 일이다. 내가 살던 동네도 저 아래에 폐허로 자리하고 있고, 동반자와 부산물도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참변을 당했을 거다. 내가 일러 준 대로 산기슭의 전철역 지하로 피신했다면 모르는 일이지만, 한데 진정한 아비규환은 생존 이후부터 시작 아니던가. 어느새 잿빛으로 변해 달과 별이 사라진 하늘 아래로 지극히 높이 솟았던 네 개의 탑이 모두 두 동강 나 거대한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중이다. 그중에는 대필 의뢰자였던 죽은 창업자가 세운 반월형 탑도 있는데, 판윤이 숨어 있을 상층부가 떨어져 나가 불타는 강에 처박혀 있다. 이 살풍경은 낯설지 않다. 내가 전에 상상한 적 있는 까닭이다. 사태는 내 밖에서 벌어졌지만, 실은 모두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 같다는 단상마저 든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건물을 보면 그것이 반파되었을 때 어떤 참상이 벌어질지를 먼저 상상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지각없이 마냥 행복한 인간을 보면 그가 가시밭길에 내던져진 모습을 떠올린다. 이 나라와 저 나라의 긴장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징집병이던 십수 년 전 저 나라의 양위 과정에서의 내부 결속을 위해 벌인 국경에서의 포격 도발 가운데 엄폐호에 엎드려 숨어 방독면을 쓰고 숨을 가쁘게 쉬던 내가 그린 내일이 바로 오늘이다. 그것이 나의 잘못이라면 마땅히 가책감이라는 걸 느껴야 할 텐데, 죽게 된 마당에야 나는 떳떳한 광인이 된 심정이다. 소설가가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세상은 망해야 마땅하다고, 지금 내 말을 듣는 독자가 있다면 당당하게 일갈했을 테다. 한데 그런 세계가 현실이나 허구에 언제 존재하기는 했나?

〈이상하군. 내 의식은 어찌 그리 생생한 거지? 평상시 생각하기로는, 내가 있는 지금은 죽음이 없고, 내가 없는 그때 죽음이 비로소 있다고 여겼는데. 막상 찾아온 죽음은 나와 함께하는군. 정작 내 죽음에 대해서는 상상력이 이리도 빈곤했다니. 모두의 풍요 속에서 홀로 비참히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거늘 말이야. 그래, 맞아. 나는 겉으로는 동반자와 죽음 끝까지 함께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는 했지만, 애당초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우리가 날아올랐던 산으로 도로 곤두박질치면서 나는 단독자의 발을 잡은 손을 놓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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