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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가 어떻게 나를 알고 어째서 지하 깊숙이에서 기다렸던 건지는 알려고 해봤자 헛된 일이다. 내 앎이 닿기 전에 이미, 그리하여 그는 거기에 있었다. 내가 산기슭 동네의 인적 없는 언덕길 중턱을 오를 때 구릉 저편 아래로는 중세 구교의 수직식 건축 양식에 현대식 제물 치장 기법이 적용된 틀지고 위압감 어린 신교회 건물이 정면 외벽의 첨예하게 각진 두 개의 탑을 창처럼 바위산에다 겨누고 있었다. 그 외에는 죄다 바위산의 위세에 눌린 듯 납작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어느 상가 옥탑에 달린 확성기에서 나이 든 누가 오래된 수도 방언으로 〈……객관적 사실과 맞지 않은 망상과 소설에 현혹되지 말고 모두 안에서부터의 일상을 영위하라〉고 낮게 읊조리고 있었다. 산기슭의 비탈면에 궁륭 형태로 둥글게 난 전철역 출입구로 들어선 나는 자동계단을 여러 번 갈아타면서 지하 6층에 달하는 깊이로 내려갔다. 이 역사는 유사시에 대피소로서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적합한 깊이를 자랑하지만 다른 한편 지하 1층의 개찰구에서 최하층의 승강장에 이르기까지 철도원과 승객을 위한 어떤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출입구가 하나에 불과해, 여기에 이르렀다는 건 독 안에 든 쥐 신세를 자처함을 의미했다. 아마 동반자와 부산물이 피해 있을 바위산 반대편의 전철역도 매한가지로, 기암괴석 지대의 단단한 암반을 최소한도로 굴착한 결과물일 터였다. 별수 없이 나는 먼저 피신해 온 한 무리의 사내들과 승강장에 모여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불시에 이루어질 징병을 피해 도망 온 외지인들이었다. 이 동네 거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기이한 사실로 다가왔지만, 전쟁의 위협에 무작정 대피하기보다 자신의 집에서 가정을 지키기로 택한 그들이 동반자와 동떨어진 나보다 더 현명함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얼마 안 있어 알 수 없는 연유로 역 내의 불이 모두 나가고, 자신을 두고 징집관이라고 밝힌, 그러나 암흑에 잠겨 누군지 겉모습도 알 수 없는 자가 내려와 한 명 한 명 손전등을 비춰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나이가 찬 나를 내버려둔 채 별안간 전조등을 빛내며 진입한 열차에 사람들을 태우고 떠났다. 비로소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컴컴한 어둠 한가운데서, 끌려간 그들이 머뭇거리고 항거할 여지와 내가 그들을 반추할 권리를 죄다 박탈한 지독하도록 어두운 속 가운데서 그자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그는 자신을 단독자라고 소개했다. 단독자는 자신이 온전한 자기의 현현이라고 했으나, 21세기에 스스로를 하늘 아래 단독자로 자처하는 자에게 내가 무어라 말하겠는가. 「실상 나는 이곳에 이르러서야 단독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고립되고 나서부터 나는 온전히 자신밖에 없게 되었어요. 당신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독자 대 단독자로서 대화를 나누는 겁니다. 우리를 다층적으로 겹겹이 감싸 시선과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던 불투명한 막들이 난생처음 걷혔어요. 말할 바 없이 제게도 이름이야 있지요. 그런데 이 나라에서 명칭이 뭐가 중요합니까? 이 나라에 유행하는 이름들은 제 주인을 가리킬 힘이 없어요. 그저 피조물을 명명한 부모의 촌스러운 의도와 기대만 역력하죠.」 동반자도 아닌 그자가 나를 싸잡아 우리라고 칭하는 걸 두고 심기가 불편해졌다. 내 패착은 인간적으로 바랄법한 어떤 위안도 얻을 수 없는 장소의 지하 밑바닥에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유폐함으로써 맘에도 없는 끔찍한 상대와 어쩔 도리 없이 말을 섞어야만 하는 상황을 자초하였다는 것이다. 철로를 따라가자. 열차가 운행을 멈춘 안전한 굴속을 걷다 보면 동반자와 부산물이 기다리는 산 반대편 전철역 승강장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내 생각을 비웃듯 번번이 열차가 눈에서 빛을 내며 경주마처럼 들이닥쳐, 불 켜진 차창마다 가득 들어찬 채 군복도 지급 못 받은 우울한 기색의 징집병들로 자아낸 기기묘묘한 잔상을 빛에 익숙지 못한 나에게 남기고는 쌩하니 지나쳐 갔다. 열차 전조등에 잠깐 그 실체가 드러난 단독자는 온통 검은 옷들을 꿰입은 게, 처음 가까운 이의 장례식에 참석한 가난한 대학생 같은 차림새였다. 나는 그런 작자를 잘 알았다. 조금이라도 연이 닿은 상대의 부모나 드물게는 당사자의 부고를 전해 받으면 지체하지 않고 장례식장 빈소에 들어가 밥과 술을 축내고 주정을 부리는, 죽음에 빌붙어 사는 부랑자 말이다. 열차가 지나는 찰나의 빛 비침으로 드러난 내 낯에서 이곳으로부터의 탈출을 향한 열망을 읽었던 것인지 그가 산책이라도 하자는 말투로 제안했다. 「철로에 열차가 다니더라도 안전상으로 사람 한 명 다닐 여유 공간은 나 있을 텐데요. 이곳은 틀어박히기에는 심심한 역인데 그러느니 함께 담소나 나누면서 궤도를 따라 걷기가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때요? 그런데 당신은 도무지 짐작 못 하셨겠지만, 기실 나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산 건너편 역에서부터요. 거기도 역사가 심심하기는 매한가지였어요. 내가 산 반대편에서 여기로 온 것은 기껏 기다렸건만 제때 와야 할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는 건 당신에게 어떤 지장이 생겼다는 건데, 그러나 당신은 이 산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 그다음 보루에서 훗날을 기약하리라고 추측했죠.」 말로 나를 이다지도 걸고넘어지는 그는 내가 홀로 자신 속으로 침잠하기를 방해하는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다. 그와 같이 걸어가느니 여기 눌러앉아 사태가 돌아가는 형편을 지켜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그가 곧 다가올 일요일이 자기 생일이며 자신도 그날까지 지하에 갇혀 있을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나는 두 가지 착각을 했습니다. 내 생일이 많은 젊은이의 자살을 초래한 소설 속 등장인물 생일과 같다고. 또 하나는 한 예언자가 어느 해의 내 생일에 세상이 멸망한다고 점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의 착각이었습니다만, 왜 그렇게 알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군요. 세계에 아무 견해도 없던 시절이었는데도요. 세기말이던 그때는 많은 날이 멸망의 숫자이기는 했습니다.」 상대의 관심을 끌고자 종잡을 수 없는 화제를 이리저리 꺼내는 것. 끊임없이 주절거리고 싶은 욕망을 주체 못 하는 치들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나는 그의 주절거림을 효과적으로 막는 방법이란 극단적으로 싸늘한 침묵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말이 건네졌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은 그에게 상처와 단절감, 그리고 가책감을 주는 듯했다. 가책감은 이 나라 사전에 없는 단어로, 상대에게 단죄할 여지마저 빼앗아 간다는 점에서 단독자의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닮았다. 처음에 그는 상대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강한 거부로서의 침묵을 기계적으로 존중했다. 그러나 그 속에 자신을 향한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내포되어 있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인내심을 잃고 나에게 흉포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말없이 잠잠한 상대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를 알고 나면 발끈하여 자기가 쓴 가면을 기꺼이 벗어던졌다. 묵언이란 상대의 말이 걷히면서 그자의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자가 짓는 무방비한 표정에 자기가 간절히 기대한 무엇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나는 더는 참지 못해 암중의 침묵을 벗어던지고 쏘아붙였다. 「이봐요. 상대의 침묵은 그쪽의 말이 스스로를 감싸던 가증스러운 껍데기를 벗겨 내는 데서 나오는 경악인 겁니다.」 단독자는 항변하지 않았고, 하물며 스스로 만든 고독 속에 홀로 남겨져 자기가 했던 말들을 복기하며 같잖은 가책감에 시달리는 듯했다. 운 좋게도 그 모습 또한 짙은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실로 할 말이 생겨나지 않는 어둠, 내가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어디에 기댔는지도 잊었다는 걸 의식한 때에 단독자가 지근거리에 붙어 서서 숨죽여 운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승강장 벽에 휴대용 조명등이 거치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이 미쳤으나 차마 우는 그를 바라보며 울컥 동정할지 두려워 아무 내색하지 않았다. 왼 손목에서 미미한 야광을 내던 잠수부용 시계도 축광량이 차차 소진되어 꺼져 가는 잉걸불처럼 식어 갔다. 나는 주머니에 조심스레 손을 넣어 사태가 길어지는 만약을 대비하려고 휴대 전화기를 껐는데 그러느라 잠시 밝혀진 화면의 빛이 천 사이로 새어 나와 잠자코 있던 그를 자극했다. 〈혼자 오래 있다 보면 고통과 불행에 면사포가 씌워지는 법입니다〉라고, 상대의 반응에 눈물겨운 그가 운을 띄웠다. 「그건 단지 거기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체감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합니다. 동일자로 인식되는 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많은 사람까진 아니더라도 한 타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자가 호소하는 증상에 귀 기울일 수 있게요. 타자에게 예후로 드러난 고통과 불행을 응시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스스로에게 씌운 면사포를 벗길 수 있습니다. 나는 오랜 기간 당신의 타자이고, 길가를 떠돌며 한뎃잠을 자던 행로병자였습니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더는 도저히 도망치지 못할 지점을 찾아 헤맸습니다. 도주의 끄트머리에서 당신을 마주함으로써 나는 단독자가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행려이고 병자였지요. 그간 나라는 범주는 점점 줄어들었답니다. 시간이 나로부터 자신을 빼앗았다가도 때가 되면 본디 전부가 아니라 한 움큼씩만 되돌려주었으니까요. 계절이 순환함에 따라 내 떠돎과 병듦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나는 봄에서부터 쇠하여 가을 무렵에야 일종의 회복기를 누렸는데, 그 주기는 온난화가 가속할수록 빠르게 거듭되었지요. 머지않은 과학적 미래에 나는 급격히 차오른 해수면과 지표면의 경계에 서 있을 겁니다. 드디어 바다가 보이는 고즈넉한 집을 갖게 되는 겁니다. 슬픔의 바다는 내 눈앞에서 전진을 멈춥니다. 고지의 빈자에게 주어지는 수혜지요. 당신은 내가 환경의 급변화와 심상의 쇠락을 동일시한다고 비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때서요? 예로부터 영혼의 흥망성쇠는 기후 변화에 대치되었지요. 어쩔 수 없는 재난을 애써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이 그래 왔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시 재해를 예견했고, 그럼에도 어쩌지를 못했습니다. 그로 비롯된 비애감은 결코 미신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풍토병에 걸렸습니다. 모든 병은 죽음에 이를 확률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치의 낭만도 없는 의학적 사실입니다. 나는 죽음이라는 병에 걸렸어요. 나아가 오늘에 이르러, 이 나라가 은폐하고 내가 밝혀지기를 소망하던 사실 즉, 죽음이 상례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대비했던 내일이고, 그래서 가진 옷가지로 되는대로 상복 차림새를 한 겁니다. 나는 세상이 내게 진 채무를 오늘 이래로 기꺼이 탕진하고자 해요. 내가 당신을 기다린 데는 감히 나조차도 설명하기 힘든 계제가 있는 듯합니다. 형용 못 한다고 해서 오늘이 미루어지는 건 아니지만요. 도리어 한 출발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비로소 내 귓가에 울리고 있어요.」 말할수록 단독자는 진정하고 차분해져, 어쩐지 냉엄한 운명을 속삭인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그를 누구보다도 진정히 이해한다는 일치감마저 들었다. 그의 낯이 짓는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낱낱이 그를 요해할 수 있다는 게 희한할 지경이었다. 그는 자살할 속셈이고, 누가 자신의 마지막 계획을 지켜봐 주기를, 기어코 동반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당신은 낭만주의자군요. 현대에 의학으로 자신의 고통을 낭만화하는 건 자못 시대착오적입니다. 괜찮아요. 당신은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의중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척 짐짓 의연하게 대꾸했지만, 그가 내가 잘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그러나 나 자신이 아닌 타자라는 숙명론적 직감으로 은연중 목소리가 떨렸다. 「유사시를 대비하는 대피소라는 게 그러하듯이 이 승강장의 벽에 휴대용 조명등이 거치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함께 살아남아야 해요. 서로 얼굴을 익힐 필요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한편으로 나는 그의 낯을 자세히 살펴보기 두려웠다. 그를 살피는 내 낯에서 드러날 안도나 실망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가 조용히 아마도 고개를 끄덕였고, 서로 축축한 손을 맞붙잡고 나란히 차가운 벽에 납작 붙어 서서 왼손으로 벽을 훑어가며 게걸음 했다. 그렇게 얻은 세 개의 조명등은 방금 내뱉었던 빈말 그 이상의 용도를 지니지 못하고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벽에 달린 함에서 꺼내는 즉시 자동으로 켜지는 조명등은 다시 제자리에 꽂지 않는 이상 꺼지지 않아 아껴 쓰려면 하나씩만 꺼내야 했는데 건전지의 노후화로 미약하게 깜박이다가 금세 불이 나가기 마련이었다. 나와 단독자는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깜박등을 화톳불처럼 바닥에 놓고 에워 앉아 낭패감 어린 서로의 응달진 낯을 곁눈질하며 철로에서 스며들어 오는 냉기에 덜덜 떨기만 했다. 얼마 안 지나 세 개의 조명등을 모두 소진한 뒤에는 단독자의 낯이 짓던 불쾌하도록 어수룩한 표정이 머릿속에 점멸하는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나 자신도, 내가 아는 자도 아닌 제삼자였지만 의식에 남은 그의 심상을 상기하는 것으로도 고통이 일었다. 지하에 이르고서부터 동반자와 부산물에 관하여 얼핏 기억도 떠올리지 않은 것도 그의 패배자같이 고분고분한 낯이 내 의식을 점유한 탓으로 여겨졌다. 실상 내 속은 온통 그에 대한 혐오와 동정으로 그득하여 적개심이 한도를 넘어서기 직전으로, 어찌나 적대적인지 그 부정의 관념들을 일소하려면 그를 뜨겁게 껴안고 입술을 훔치며 억지 사랑에라도 빠져야 한다는 극단적인 상상마저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자포자기하지 않았던가? 감시 카메라로 녹화된 영상을 보고 나는 이미 동반자와 부산물이 내게 있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그 부재를 타성적으로 영원성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예외적 사태가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냐면 그렇지 않다. 나는 이미 집 안에서 안주하는 한편으로 떠나려는 충동으로 몸서리쳤고 내가 사대문 안으로 향하고 동반자가 출근한 것은 일상의 굴레대로였을 따름이다. 그렇게 되기로 한 일이 마침맞게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영상에는 급조된 꿈같은 거짓된 일면이 있다. 내가 상상하던 모종의 파탄 중 하나를 누군가가 구현한 거라는 그 의구심은 하여 내가 목도한 이 나라 정부와 수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기어이 발생한 저 나라의 국지 도발 사태 또한 매한가지다. 사람들은 저 나라의 가여움에 대해서 쉽게 얘기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그들을 언젠가는 거두어야 할 거지 집단으로 보는 모양인데, 그들이야말로 불한당이다. 우리의 시선 아래서 그들은 이론적 이상향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땅 위에 섰는데 집이 없고, 뭘 먹는데 음식이 없고, 치부를 거적때기로 가렸음에도 옷이랄 게 없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에게서 인간이 지녀야 할 마땅한 것들을 시선으로 모두 빼앗고 저 땅 너머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내가 세 든 집에 쳐들어와 동반자와 부산물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탓이 아니다. 우리 탓이다. 그들은 거지가 아니다. 우리가 만든 무뢰한이다. 이리하여 안팎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게 벌어졌다. 나의 동반자를 비롯하여 오늘 내가 맞닥뜨린 모두가 이를 대비하고 마치 오늘을 고대한 듯이 자신의 본색을 제각각 드러내었는데, 하물며 부산물에게도 형용하기 어려운 변화가 일어났거늘, 사태 속에서 누구보다도 순진한 기색을 드러내며 지하 깊숙이에 숨어 이미 사라진 일상을 끝끝내 정주하려는 자는 다름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몇 날 며칠 같은 몇 시간이 지났고, 곁의 단독자는 언젠가부터 줄곧 기척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생존이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명약관화한 사실이 나를 깨우쳤다. 동반자와 부산물은 산 건너편 역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떠났을 터이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자는 이 역시 나뿐이다. 여기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여기 지하에까지는 아무 소식도 닿지 않는 까닭이다. 나는 잠자코 있는 그가 말이라도 건 것처럼 대답했다.
「그래요.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쪽이 원한다면 그렇게 합시다. 그러나 내가 당신의 바보짓에 동참하리라고 여긴다면 오산입니다. 위로 올라가면 무언가가 벌어지고는 있을 테니 그걸 지켜보고서 각자 헤어질지 아니면 지금과 같이 서로가 옆에 있음에 보잘것없는 위안이라도 얻을지를 결정해 봅시다. 나는 불이 켜진 곳에 가서 자초지종을 물어볼 요량입니다.」 그는 자고 있었던 것인지 내 말에 놀라 움칫거리고 깊은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그가 잠든 때에야 내가 사유라는 걸 할 수 있었다니, 놀라운 우연이군〉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좋습니다. 어두컴컴한 지하는 벌써 지긋하네요. 저 아래와는 이제부터 작별입니다.」 그래서 나와 단독자는 암중을 더듬어 두 손 두 발로 기다시피 하며 작동을 멈춘 자동계단을 힘겹게 올라 역 바깥으로 나왔다. 하늘은 해가 제법 기울었지만 전과 같이 푸른빛을 띠고 넓게 퍼진 높쌘구름이 천상의 사람들이 기거할 탑을 쌓는 듯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늦은 오후였다. 태양이 부유스름하게 져가는 방향 반대편에 낮게 기울어진 채로 떠오른 전보다 큼직하고 창백한 달이 얼마 안 남은 보름을 향하여 가려진 왼쪽 얼굴을 부지불식간에 서서히 드러내는 중이었다. 산기슭 동네는 잿빛으로 그늘져 갔다. 역 출입구 가까이에 가로수로 심긴 침엽수의 우듬지가 전깃줄에 매여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조잡한 철제 나뭇가지를 단 전봇대였다. 허공에는 끊어진 전선 하나가 교수대에 걸린 올가미처럼 매듭지어져 을씨년스럽게 팔랑였다.
여전히 휴대 전화기는 터지지 않고 인적도 없는 가운데, 나와 단독자는 오갈 데 없이 여차하면 다시 굴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역 출입구 앞을 떠나지 못하며 날이 지기를, 해가 저무는 속에서 인공조명이 하나둘 그 빛을 드러내기를, 아니면 길모퉁이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누가 구조의 손길 내밀기를 기다리며 버려진 아이들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물녘이 가까워지자 주황 노을이 서쪽에서부터 스멀스멀 퍼지고 적요한 지상에 먹칠 같은 검은 응달이 드리워졌다. 동네 위로 우뚝 솟은 헐벗은 바위산도 서서히 암전되는 무대 배경처럼, 남색으로 짙어지는 하늘에 동화되어 차차 입체감을 잃고 검게 흐려져 가고 있었다. 나와 단독자는 마치 텅 빈 객석을 허무히 바라보는 배우라도 된 듯 사람이 없는 전경을 응시하면서 어디로 퇴장할지 몰라 한참을 미적거렸다. 의지할 데라고는 이제 막 잔잔히 빛나기 시작한 별빛밖에 없을 때 별안간 야음에 잠긴 검은 산봉우리의 멧부리에서 빛이 깜박였다. 내 시선이 닿자 푸르도록 흰 그 빛은 깜빡이기를 멈추고 나를 또렷이 마주 응시하는 듯했다. 그것은 화광이라기에는 빛깔도 그렇거니와 연기가 없었고, 달덩이처럼 동그란 형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전설 속 음화 같은 속성이 있었다. 또한 가까이서 타오르는 작은 촉광처럼 선명하였는데, 산과의 거리에 견주어 보면 실제로는 거대한 횃불에 가까울 터였다. 천애 고아 신세인 나에게 그것은 어느 몽상가의 등불이나 진배없었다. 나는 산 위의 푸르고 흰빛에 점차 빠져 들었다. 누군가가 신비한 흰 불을 피워 놓고 홀로 기다리는 중이다. 기다림의 대상은 몽상 자체일 테지만, 그는 부나방처럼 홀려서 찾아온 외로운 이들도 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몽상의 재료란 세상과 사람들인 까닭으로 제 발로 온 이들을 피할 연유가 없어서다……. 「저리로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빛에 홀린 단독자가 그 뒤로도 뭐라 주절거리는데도 나는 흘려듣고 계속 이야기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산을 올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든 댈 수 있다. 산 정상에는 통신 기지국이 설치되어 있을 테니 전파가 터질지도 모른다. 물론 산비탈을 오르는 일은 고생스럽겠지만, 그 보상으로 고지에서는 더 먼 데까지 톺아볼 수 있다. 그때 가서도 정 일이 안 풀릴 때면 판상절리에서 뛰어내려 단독자의 비밀스러운 바람대로 동반 자살이라도 하겠지. 그러나 산에 대해서는 내게 한 거부감이 있었다. 산을 향해서 나는 언제나 할 말을 잃지 않았던가. 거기서 내가 무엇을 쓸 수 있을까? 나는 길에 관하여 쓸 수 있지만 산은 모든 줄기가 길이다. 지천으로 나무고, 흙이고, 돌이다. 그것들은 어느 산에나 중구난방 흩어져 있다.
내가 써야 하는 건 어느 산에나 없는 어떤 무엇이다. 날이 어둑해져 가옥들이 검게 잠기자, 그 사이의 산비탈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이제 막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월광이 훤하게 가리켰다. 그러자 내게는 그 길이 동반자가 데리고 있을 부산물에게로 향하는 첩경으로 여겨졌다. 달이 차기 전에 둘에게로 돌아갈 거다. 더 번듯하고 적합한 병원으로 그를 데려가 가슴에 희망을 품은 의사를 만날 테다. 그 다짐은 또다시 정상 가정을 향한 애처로운 망집으로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동반자와 혼약을 치르고 그를 우리 둘의 아이로 거둘 것이다. 한쪽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벌써 깨달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어둠길을 걷지 않고서도 이미 알 수 있었다. 내가 둘을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야간 산행은 처음이랍니다〉 하고 내 단독자가 먼저 발걸음을 떼 행로에 올랐다. 「지금 함께 여정을 떠나는 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나씩 충분하게 주어졌어요. 하나의 목적지, 하나의 길, 한 명의 동행. 여기서 머뭇거릴 이유가 있나요?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고자 곁에 두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소용은 바로 지금 내 곁에 있음 자체에 있어요. 밤길을 걷기 더없이 좋은 날 아닌가요? 이리도 큰 월구가 길을 비추는 데다 쓸데없는 것들은 어둠에 다 파묻혔으니 우리는 휘영청한 월광이 인도하는 대로만 발을 디디면 될 거예요. 마치 우리에게 잊을 수 없던 것들을 잊고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바라보도록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듯해요.」 저자는 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 그의 속에는 죽음이라는 게 들끓고 있어. 이렇게 소탈한 척 구는 데는 제 속셈이 드러나면 죽음이 무위가 될 거로 생각해서야. 내가 결단코 자살을 허용치 않는 이 나라의 밀고자일지 걱정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의 원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저자를 혐오의 눈으로 바라보는 건 그에게 비친 내 모습을 두고 소스라침에 지나지 않아.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고로 길이란 나와 관계없는 자와 동행하는 노정이지 않던가. 내가 그를 따라나서며 대답했다. 「그래요. 어서 가요.」
걸음을 누차 옮겨도 산머리의 흰빛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법이 없었다. 그 빛의 영향으로 산 위에 작은 손바닥만 하게 밝혀진 하늘에는 비늘같이 촘촘한 잔물결을 이룬 털쌘구름이 기이한 힘에 이끌리듯 심상찮게 모여들고 있었다. 반면 산 아래로는 선선한 미풍이 불고 사위가 적막한 밤에 잠긴 가운데 달이 우리가 길을 걷고 어둠 속에서 서로를 분간하는 데 충분한 정도의 섬휘를 교결히 내려보냈다. 산의 지근에 이르면서 꼭대기의 빛은 비탈에 가려져 사라졌다. 가까이서 본 산간은 이리저리 비틀어진 소나무와 깎아지르고 얽은 듯한 지대가 이루는 다양한 층위의 검정으로 섬세한 점묘화를 구성하고 있었다. 화강암 지반을 깎아 조성한 등산로는 달빛에 반사되어 어둠 속에서도 디딤돌을 분간할 수 있었으며, 더불어 물안개 같은 희끄무레한 빛무리가 산을 감싼지라 굳이 휴대 전화기를 켜서 전지를 축내지 않아도 되었다. 산길은 심하게 구불거리지 않고 제법 똑바르고 가파르게 저 위로 향했다. 산은 깊숙한데 밤중의 원근감은 얄팍하여 우리는 자주 발을 헛디뎌 비틀거렸고, 술렁이는 마음에 뒤돌아볼수록 왔던 길이 암중에 잠겨 퇴로가 사라진 듯했다. 기암괴석의 풍화로 얽은 자국에 짙은 명암이 드리워져 생겨난 일그러진 낯들이 우리를 지켜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 같은 자조차 돌에서 사람의 표정을 찾아내고 동일시하려는 감각을 지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단독자가 신이 나 앞서 올라가는 동안 그의 흔들리는 등을 바라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째서 저자인가. 얼마든지 그와 헤어질 수 있었고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주어진 자와 상황이 하나라는 것은 달빛이 일구어 낸 착각일 따름이다. 난리의 와중에 동반자와 부산물을 잃어버려놓고는 왜 하필 생면부지의 낯선 자와 산중을 헤매는 것인가? 그것은 내가 나약하고, 사람이 곁에 있음에 안주하려 들기 때문이다. 나는 일변 혐오하던 그에게 진작부터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산에 올라 자초지종을 파악하는 대로 이만 헤어지도록 하자. 단지 내 약함을 부정하기 위해서 먼저 하산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만의 할 일이 있지 않던가? 그가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을 도리에 어긋나게도 방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전에 도망치는 것이 덜 어리석은 일일 테다. 디딤돌이 기우뚱거려 중심을 잃으면서 붙든 소나무 잔가지가 부러진 찰나 그가 내 팔을 붙잡았다. 손에 붙들린 썩은 나뭇가지에는 부패한 양서류가 꿰여 있었다. 산에 서식하는 때까치의 고약한 습성일 터였다.
한데 거기서부터 산의 풍모가 변화하였다. 모진 강풍이 아래서부터 위로 불어와 우리는 얼마 안 되는 옷자락을 여며야 했고, 병으로 고사한 소나무 군락에서 잔가지와 바늘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달 또한 시시로 구름에 가려지면서 그때마다 우리는 두 팔로 칠흑 속을 더듬으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산길을 올라야 했다. 「지금 우리가 속한 곡지로 바람이 모이고 있으니 길을 벗어나 산등성이로 올라가 능선을 타고 갑시다.」 내 제안에 단독자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으나 내가 다시금 재촉했다. 「산은 모든 갈래가 길이에요. 어디서든 어디로든 통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손목시계의 원형 테두리를 시계 역방향으로 돌려 59분 뒤의 시각에 맞추었다. 그 안에 피신할 장소를 찾지 못하면 어느 방향으로든 하산할 요량에서였다. 산을 오르는 노고를 겁내는 한편 신이 난 그의 흥을 깨지 않고 남몰래 헤어질 각오까지 한 것이다. 나의 제안대로 우리는 굴곡진 산길이 아니라 산면을 기어 올라가며 똑바로 위를 향하기 시작했다. 거센 밤바람 때문에 우리는 참호전을 벌이는 군인처럼 몸을 경사진 땅에 최대한 밀착해야만 했다. 전진 속도는 몹시 더디었다. 건조하고 찬 바람에 몸이 동결 건조된 건어처럼 차디차고 빳빳하게 메말라 갔다. 조바심에 뒤돌아 올려다볼수록 스산하게 흔들리는 앙상한 잔가지들과 빠르게 움직이는 먹구름 사이로 잠깐잠깐 드러나는 남동쪽의 저 노란 달이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더 크고 낮게 이운 것 같은 착시가 일었다. 「일어나야 해요.」 내가 잠들었나? 단지 경황이 없었을 뿐 계속 움직이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 단독자가 또 한 번 다그치며 뒤에서 내 등을 안아 들어 올렸다. 꼿꼿이 일어서는 순간 바람이 내 등을 밀어내며 앞장세웠다. 강풍에 떠밀리는 대로 우리는 발만 놀렸고, 쏜살같이 다가오는 나무와 돌부리를 마치 전자오락을 즐길 때처럼 간단히 피하기만 하면 되었다. 「한 번 몸을 일으켜 바람에 내 목숨을 맡겨 봤거든요. 한데 지금은 때가 아닌가 봅니다.」 내 의구심에 씩씩하게 소리쳐 대답한 그는 가히 탈춤을 추는 듯한 몸짓으로 씩씩하게 앞서 나갔다. 잠시 후 바람이 끄는 대로 걷는 데 익숙해지자 나는 눈을 감고 기꺼이 졸면서 내 목숨을 방금까지만 해도 버리고 갈 작정이었던 그에게 내맡겼다. 그것은 살아옴에 진력이 난 내게 적잖은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스스로 생애를 일군 게 아니라 생 자체가 나를 조종한 것이 명증했음을, 바람이 인도하는 그 끝이 죽음의 낭떠러지더라도 내게 아무 책임이 없음을 나는 눈물겹게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다잡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금방 오른 산등성이는 방화를 목적으로 나무를 모두 베어 버려 능선이 황폐하게 파헤쳐진 불모지대였다. 기암괴석이 군데군데 파묻히고 메마른 산의 등줄기는 마치 월면처럼 회백색 잿빛을 띠었는데, 마치 그 삭막한 외양을 식별케 한 달빛이 토양을 자신이 비롯된 위성과 동질화하였다는 착각이,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선 땅을 이처럼 헤집어 놓으면 실상 숨겨졌던 달의 표면이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해괴한 상상이 들었다. 그것은 산등성이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희한한 현상에서 기인한 생각들이었다. 우리는 다시 걸었다. 수도에 살면서 여태껏 본 적 없던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로, 황폐한 능선 말고는 기대할 풍경이라고는 없는 적막한 암중을 걸었다. 산 아래서 발견했던 멧부리의 빛은 보이지 않았고, 지상의 도시도 다시금 불을 밝히지 않았기에, 우리는 서로에게만 의지하며, 주어진 산로의 양편 가운데 오르막을 택해 점점 위험해지는 바윗길에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앞서 걷는 단독자의 검은 윤곽을 지켜보다 문득 겁이 날 때면 이름도 모를 그를 〈이봐요!〉 하고 부른 다음 의아스레 돌아본 그의 낯이 내 상상과는 달리 월면처럼 석회색을 띠지 않음에 남몰래 안도했고, 곧이어 내 얼굴이 그러하지는 않은지 정신없이 주물러 댔다. 〈달이 차고 있기는 한가 보구나. 내가 실성하는 중인 거야. 이전에 내가 수의사에게 보름달을 운운한 건 단지 그의 진단을 미신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려고 한 언행이었어. 그러나 지금 채 보름이 되기도 전이거늘 실로 영향받고 있는 나야말로 미신적인 인간이 된 게 아닌가. 아무렴, 나는 그에 걸맞은 광인이 되었다. 양복은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고, 병자처럼 삭발한 머리에, 동반자와 부산물마저 잃었으면서 더 잃을 게 뭐가 있다고 온갖 염려로 깜깜한 세상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오늘은 내게 가장 고통스러운 하루인데, 아직 다음 날까지 몇 시간이나 남았다. 무엇보다도 공포스러운 건, 내가 아직 그 고통의 크기가 얼만지 실감은커녕 가늠조차 못 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걷다 말고 실성한 사람을 흉내 내고자 울려고도 웃으려고도 시도했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 얼굴을 보지 못함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음을, 눈매와 입꼬리가 월석처럼 굳어 어떤 극적인 움직임도 자아낼 수 없음을 말이다. 「자, 가자.」 돌아선 그가 다정하게 채근했다. 거기에 대고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그래.」
마침내 바위 봉우리 아래에 이르렀을 때, 판상 형태로 갈라진 거암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틈새가 드러났고, 그 틈바구니로 새어 나오는 푸르도록 흰빛이 우리의 눈을 부시게 했다. 그것은 빛으로 충만한 암굴이었다. 우리가 그 협애한 사이로 거침없이 비집고 들어간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암굴 너머는 꿈꾸던 낙원이나 별세계가 아니었고 오래전에 허물어진 폐허에 불과했다. 그곳은 우람한 바위 멧부리에 감춰진 빈터였는데, 산이 보이는 동네에 살면서 어째 여태껏 보지 못했던 것일까? 터에는 아마도 저간 팔방에서 분 바람이 헤집었을 잡목과 수풀이 사방을 향해 강렬하게 뻗쳐 있었고 사이사이에 어둠이 검은 물처럼 고여 습지 같은 인상을 나에게 심기었다. 그리고 그 위에 옛적의 신전이나 사당 같은 석조 건축물에서 유래되었을 커다랗고 네모반듯한 축석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땅바닥에 심겨 살아남은 주춧돌로 그 터가 본래는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암굴 앞에서부터 장방형 회랑이 이어졌고, 그 끝에 제단으로 짐작되는 원형 터가 남아 있었다. 회랑과 제단을 이어 주는 출입구 입면에 선 정방형 문틀의 편마암 설주와 인방만 세월로부터 온전히 버텨 내어 황량한 유적지에 방문한 우리를 고적히 반겨 주었다. 훤한 달빛 아래서 오묘한 물결무늬를 드러낸 편마암 유적지가 가진 조형적인 특이성은 제단 터의 원과 개구부치고는 지나치게 널찍한 입면의 정방형이 이루는 두 면적이 겉보기에 일치해 보인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저 외로이 서 있는 정사각형이 언젠가 세월의 풍파에 의하여 뒤로 넘어가 쓰러지는 순간 바닥의 원과 그 크기와 모양이 꼭 들어맞으리라는 공상으로 이어졌다. 빈터의 끄트머리이자 낭떠러지에는 썩어서 검누른 빛을 띠는 널빤지로 조잡하게 얼기설기 지어진 측간 같은 육면체 판잣집이 위태로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벼랑에 걸쳐져 비죽이 튀어나온 모서리 아래로 오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가파른 비탈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를 여기까지로 이끈 희고 푸른빛은 어디에 있지? 그것은 측간의 차양에 달려 푸른 근자외선으로 날벌레를 꾀어내는 살충등의 보잘것없는 인공조명으로, 등 아래에는 지난여름 수도 북쪽에 창궐했던 털파리 사체가 검게 화석화되어 수북한 더미로 쌓여 있었다.
빛의 미몽에서 벗어난 나는 그동안 외면했던 피로와 추위가 찾아와 자제력을 잃고 폐허로 뛰쳐나가 배신감에 휩싸여 정신없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성역으로 들어서는 관문이라기에는 황폐하기 짝이 없는 편마암 문지방을 넘어 봤자 시계가 달리 트이는 일은 없었고 여전히 나는 신 없는 한 인간이었다. 단독자는 낭떠러지 둘레를 찬찬히 돌며 감탄하듯 〈그래, 이곳이야〉라고 연신 중얼거리다가 판잣집 앞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며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이 밤을 피할 마지막 장소가 우리에게 주어졌어. 삶이 나에게 허락한 조촐한 보금자리가 이제야 명약관화하게 드러났는데 어찌 마다하겠어.」 나는 그처럼 태평할 수가, 나에게 허락된 둘만의 뒷간이 내 끝임을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어 발로 바닥을 구르고 고함을 질러 댔다. 내 외침에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나의 메아리뿐이었고 밤중의 지평선에서 누구도 나를 향해 고개 들지 않았다. 내가 원망 어린 시선으로 돌아보았을 때 그는 이미 판잣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뒤였다. 나는 분노에 차 돌무더기뿐인 사위를 휘적휘적 돌아다니다가 회랑 터에서 반쯤 파묻힌 고동색 목봉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이 폐허의 상량식 때 쓰였을 마룻대 파편으로, 옛 왕조 시대 반역자의 이름들이 바래어 가는 먹으로 쓰여 있었다. 지금 내가 수백 년 된 썩어가는 몽둥이로 단독자에게 화풀이하는 것만큼 부당하고도 우스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이 난 내게 그의 자살을 막을 방법이라고는 폭력을 이용한 위협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에게 이 유물을 쥐여주고 그걸로 저 자신을 내리쳐 죽음에 이르라고 해보자. 산 정상까지 올라간 노고마저 수포가 되자 왜 그를 윽박질러서라도 살게 하려는 충격 요법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일까? 그가 정말로 죽을 작정이라고 내게 말한 것도 아니다. 모두가 나 자신에게서 비롯됨이다. 삶을 등지고 싶은 욕구, 스스로에게 몽둥이질하고서라도 자신을 다잡고파 어쩔 줄 모르는 좌절감 다 내 속에 자리한 것들이다. 하지만 스스로 저 자신을 매질로 죽일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썩어빠진 목봉으로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어째서 동반자가 아니라 단독자를 동일시하는지는 알 수 없는 연유다. 그렇지만 우리는 끝내 의좋은 형제처럼 함께 몽둥이를 부러뜨리고 그 분풀이를 통해 솟아난 새 힘으로 하산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반역자들의 명단이 적힌 막대기를 오른손에 들고서 다른 한 손으로 판잣집 문을 열어젖혔을 때 깜깜한 안에서는 단독자가 다른 누군가와 끙끙대며 몸싸움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몽둥이를 치켜들었다가 곧 포기하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닥에 엎어져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을 그들이 바깥의 월광에 비친 내 윤곽을 보았는지 잠잠해졌다. 그러자 밤중의 산등성이에서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는 산바람이 괴이한 곡소리를 내는 게 멀찌감치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귀 기울일수록 아주 가까이 다가와, 내 귓전에서 소용돌이치는 것만 같았고, 나중에는 상처 입은 늙은 짐승이 동료를 부르며 내는 소름 끼치는 우짖음처럼 들리기도,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불가해한 심연의 주파수인 양 아득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러자 이 오두막이 늪과 같은 심연 위에 떠 있다는 착각과 함께 바닥이 출렁였는데, 나는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엎어지는 그대로 박차를 가해 둘이 엉켜 있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나야!」 한 명이 던진 말에 다른 이가 질세라 헐떡이며 소리쳤다. 「바로 나야!」 두 목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중 누가 단독자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나는 양손으로 두 사람의 옷가지를 각각 잡아당겨 가며 윽박질렀다. 「산 이전에 우리가 어디에 있었지?」 오른손에 잡힌 자는 〈지하에!〉라고, 왼손에 잡힌 다른 한 명은 〈기다림의 장소〉라고 화답했다. 나는 오른손에 잡힌 자를 잡아 끌어낸 다음 상대의 온몸을 더듬은 끝에 목을 찾아 움켜쥐었다. 그제야 그자가 다급하게 벽에 등 개폐기가 있다고 이실직고함으로써, 내 손에서 풀려난 다른 한 사람이 서둘러 벽을 더듬어 불을 켜 소동은 마무리되었다.
천장의 수명이 다해 가는 형광등이 파르르 떨며 여태 밤중에 의지한 월광보다 훨씬 강렬한 빛을 내는 가운데, 내 손에 힘이 풀린 틈을 타 뿌리치고는 누운 채로 숨을 헐떡이는 자를 나는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인공조명에 아득해진 시야가 천천히 초점을 잡아 가는 동안 내 아래의 그는 차츰차츰 주름진 노인의 형상으로 또렷해졌다. 노인은 코를 기점으로 다른 부위가 빨려 들어가는 중인 듯 응축되고 구겨진 생김새였다. 공격을 피하려는 듯 옹송그리던 그는 내가 일어나 차차 물러서자 꼿꼿하게 일어나 내 앞에 섰는데 나처럼 키만 크고 비쩍 마른 작자였다. 나는 노인의 목을 졸랐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다른 한 사람이 숨을 고르며 서 있는 문가 쪽으로 물러났다. 곁의 그자는 내가 알던 단독자였고, 그는 내가 자신을 단번에 분간한 데 감명받은 듯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지난 생애를 돌이켜보니 나는 산지기올시다.」 산지기 노인이 그렇게 말하면서 한쪽 벽에 자리한 목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네다섯 평쯤 되어 보이는 판잣집 내부는 단출했다. 그가 앉은 침대를 제외하면 가구랄 것이 없었고, 바닥에 유선 전화기 한 대가 아마 방금의 소동으로 쓰러져, 수화기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바깥에서 집을 측간으로 오해하게 한 오물 흔적은 벼랑 쪽 구석의 구식 변소에서 비롯된 듯했다. 손님을 맞이하거나 여가를 즐기기에도 마땅치 않고 식사도 목욕도 할 수 없는, 이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사생활이란 오직 딱딱한 목침대에 몸을 누여 산바람 소리에 불안스레 귀 기울이며 잠을 청하는 것 말고는 다른 여흥이나 안식을 기대할 수 없는 세간이었다. 궁색한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으레 그러하듯 나는 바쁜 것처럼 자동적으로 손목의 잠수부용 시계를 내려다보았는데, 이미 아까 설정한 생존 시각이 넘어서 있었다. 산지기가 내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시계를 보고 있으신가? 산 아래서 약속이 있나 보구먼.」 하지만 그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비웃음 섞인 어투로 말을 이었다. 「튼튼해 보이는 시계로군. 자네는 시계가 혹시나 큰 충격을 받았을 때 고장 나기를 두려워하는 거야. 그렇다면 자네의 시간이 멈출 테니까. 우리는 본디의 시간과 괴리된 현재야. 시계 속에 갇힌 시간이야. 우리는 절대적인 시간을 통제한다고 착각하지. 그러나 실제로는 겨우 시계 속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인데, 그게 우리가 속한 시간대기 때문이지.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이란 없어. 우리는 한 번이라도 멈추는 순간 사라지는 시간에 속해 있다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시계를 튼튼히 하는 수밖에. 절대 깨지지 않고 이물질 하나 못 들어오는 튼튼한 시계를 만들어 우리를 보존하는 거야.」 그의 딴죽에 불퉁해진 나는 목침대에서 일어서려는 그를 밀어뜨려 주저앉히고는 바닥의 수화기를 집어 귀에 대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속음을 들으며 중얼거렸다. 「여기도 전화가 불통이군.」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고개를 숙인 채 발에 힘을 줘 괜스레 낡은 마룻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게 했다. 〈내통하는 자가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런데 어찌하여 여기만 전기가 통하는 걸까? 분명 숨겨진 방에 발전기가 있는 거야.〉 불안감에 나는 도리어 코웃음 치면서 누가 들이닥치기 전에, 그리고 조금이라도 체력이 남아 있을 때 하산하고자 단독자를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그때 산지기가 애처롭게 하소연했다. 「날 떠나지 말게. 날 떠나지 말아…….」
그 말에 단독자가 동했는지 침대의 노인에게 다가가 임종을 지키듯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추하게 퉁퉁한 손을 어루만지며 측은히 응시했다. 「이 자는 자신보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중이야. 한 사람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나 다름없어. 산이 그자이고, 그는 오래된 절대자야. 당신은 왜 산을 떠나지 못하는 건가요?」 다정한 질문에 그가 선뜻 충실하게 대답했다. 「결코 물에 잠기지 않을 고지라서 그렇다네. 그 사실이 내 눈에 산을 낙원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해수면에 가까운 땅은 지옥이 되었어. 모든 게 이미 쓰였어. 나의 죽음만이 그렇지 않을 따름이야. 쓰인 건 언젠가 읽히게 되기 나름이지. 그렇잖은가? 내가 아는 건 나 자신이 죽지 않은 현재까지야. 자신이 없는 미래를 알지 못함은 내가 한 시대에 멈춰 선 까닭일세. 나는 한 시대를 오롯이 풍미하였고, 그때에서 평생을 정주하기로 작정했어. 내가 사는 이곳은 그보다 전 시대에 만들어진 장소야. 이곳은 나의 원대로 과거는 망각되고 미래 없이 현재만이 지속된다네.」 나는 한동안 그를 딱하게 내려다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자도 한때는 글쟁이였던 모양이라는 단상이 들어서였다. 그러고 보니 그는 행색도 말이 아닌 게, 까마귀처럼 검은 누더기를 걸치고 씻지도 않은 듯했다. 나 또한 그처럼 미쳐서 산속에 기거하게 될 거라고 여겨왔던 때가 있었지. 그때 나를 꺼내 준 사람이 동반자로, 그에 따라 나는 한 상상의 세계를 잃게 되었으니, 그것은 한 사람의 죽음이 세계의 멸망으로 이어지리라는 묵시록적 환시였다. 그 세계를 닫고 나온 존재가 부산물이며, 그는 가능성의 소멸로 새로이 생겨난 가망이었다. 그들은 이제 내게서 동떨어져 있다. 그게 여태껏 실감이 나지 않음은 이상한 일이다. 내가 그들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관성적으로 예전의 상상 속 세계로 돌아간 것일까? 「그런데 왜 우리를 공격한 거요?」 불현듯 떠올라 던진 내 물음에 산지기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나는 지상의 불이 죄다 꺼진 걸 보고 사람들이 모두 죽었을 거로 생각했다네.」 그것은 올바른 답이 아니다. 생존자가 산까지 올라왔거늘 그렇다면 우리를 귀신으로 보고 쫓아낼 작정이었단 말인가? 「나는 당신이 석연치 않습니다. 당신은 마치 기다리는 자가 있는 듯 초조하게 굴고 있어요.」 내 말에 그가 싱긋 웃었다. 「늙은이가 기다리는 건 하나, 죽음이지.」 그 말은 내게도 진실하게 들렸다. 「바깥 공기가 차니 문을 닫으시게.」
산지기가 권하는 대로 그렇게 했으나 판잣집 안도 냉골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나와 단독자는 산지기를 사이에 두고 딱딱한 목침대에 모여 앉아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변소에서 나는 악취를 맡으며 말없이 창도 없는 널빤지 벽을 멀거니 쳐다만 보았다. 오늘이 지나 내일의 해가 밝는 대로 나는 이 둘이 반대하더라도 홀로 하산할 것이다. 아니, 나에게 오늘은 없다. 오늘은 마치 어제 꾼 악몽처럼 송두리째 잊히고 꺼림칙한 감각만 채 소진되지 않고 남게 될 것이다. 단지 내일만이 있을 뿐이다. 그 내일에 동반자와 부산물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은 이 나라에 재앙이 벌어질 거라는 징조들이 있었다. 하지만 재앙은 없었다. 그저 재수 없게도 바람에 날린 검은 비닐봉지가 사람의 눈을 가릴 때처럼 잠시 내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래도 내일은 어제와 같지도 오늘과 같지도 않을진대,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산지기가 느닷없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추하게 일그러진 그의 낯이 마룻바닥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는 고통을 견딜 수 없는 듯 힘이 들어간 두 손을 이리저리 비틀어 댔다. 단독자가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행운아랍니다. 오늘만 해도 내가 누구를 만날지 전혀 알지 못했지요. 우리는 다 같은 처지입니다. 내가 만난 자가 나와 다른 처지인 사람이었다면 일이 지금과 같이 흘러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나는 행로병자였고, 목적 없이 배회하는 일은 지긋지긋하지요. 그러나 이제는 모든 길이 목적성을 띱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 되어, 살아남고자 산에 올랐고, 죽음에 다다르고자 정상에 이른 셈입니다. 예컨대 내가 전철역 지하 승강장에서 당신을 기다렸음에도 다른 이를 만났다면 일은 다르게 흘러갔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자는 필시 겁쟁이였을 테니 전철이 정상 운행할 때까지 기다렸겠죠. 그리하여 그자와 나는 열차를 얻어 타고 그자의 집으로 갈 겁니다. 나는 오갈 데가 없는 행려고, 그자는 가정이 있으니까요. 그자가 사는 공동 주택은 안전하고 편리하게도 전철역과 지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가족은 모두 안전하게 해외로 피신했거든요. 하지만 살림만 보아도 그자네 가정의 화목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아이의 흔적들. 장난감, 작은 책상, 만화가 그려진 공책, 구구법이 적힌 책받침. 부부의 침실 침대 위에는 두 사람의 실내복이 나란히 개켜져 있고, 부엌에는 식재료와 간편식이 쟁여져 있습니다. 내 미천한 상상력으로 더 말하자면, 서재가 있을 테고, 거기 꽂힌 책들은 나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그자가 책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말고는 종잡을 수 없는 책들만 책장에 꽂혀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화목한 가정에 대하여 나 역시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 상상 속에서 그자의 가족은 자리를 비운 것이고, 이리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그자에게 질투심을 품지요. 배반당한 것처럼 그자를 바라볼 것이고, 낯선 이방인이 되어 집 안을 낱낱이 관찰하면서 정작 머릿속으로는 그자의 가족을 재료로 음험한 상상을 할 겁니다. 그러한 사고 행위는 나에게 엄청난 가책감을 줍니다. 그런 자들과 함께한다는 건 줄곧 가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겁니다. 매분 매초 나에게 죄를 심기는 것이지요. 도저히 견디지 못한 나는 그자의 집으로부터 떠나 다시 행로병자가 될 겁니다. 그자는 내가 눌러앉지 않음에 안도하며 이 난리 속에서 자신의 공동 주택 가격이 얼마나 하락할지를 마저 궁리하겠지요. 하지만 내가 전철역에서 만난 신사는 나와 마찬가지로 모든 걸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게 얼마 없음이 어찌나 감사한 일인지요! 아무것도 없이 우리는 산을 올라 여기에 이르렀는데 여전히 주어진 것은 제한적입니다. 그것은 내 꿈이었어요. 우리만 남는 것. 더도 말고 덜도 말고요. 이제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나는 더는 행로병자일 수가 없게 되었으니, 동반자가 생겼고 이렇게 조촐한 집도 마련한 까닭입니다.」
그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자니, 동반자와 부산물과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을 꿈꾸었던 나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일었다. 하지만 그런 가정을 경험한 적이 없는 이자의 상상력이 빈곤한 것 또한 진실이었다. 아무렴 어떠한가. 단독자와 같은 이를 동반자보다 먼저 만났다면 내가 집 밖으로 배회를 다녀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반자라고 해서 내게 불가능한 가정에의 꿈을 품으라고 강요한 건 아니었다. 그것은 촛불을 바라볼 때 내 마음속에도 저런 온기와 안온함이 가득 채워지리라 착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의 가정을 돌보기보다는 심연 속에서 피어난 촛불에 정신이 팔려 심지 위 불꽃의 환시 가운데에서 가족을 발견하고자 했으므로, 유책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 녹화된 영상에서 그들은 집을 떠났다. 동반자가 부산물의 모험을 따라나서는 방식으로. 단독자가 일면 없는 자의 화목한 가정에 초대 없이 방문한 정황을 서툴게 상상하듯이 나 역시 어쩌면 그들의 모험이 어떠한 양상으로 이루어지는지, 그 여정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를 소설가라는 직업인으로서 전문적인 솜씨를 발휘해 흥미진진하게 써낼 수 있을 것이다. 그야 간단하다. 그들이 마주하는 어떤 사건에서든지 거기서 나를 당연하게 제외하면 되는 것이니까. 나는 그들의 족쇄였고, 걸림돌이었으니까, 그들이 이전보다 더 자유로이 움직이리라는 점은 자명하다. 「이 친구도 우는군.」 산지기가 마치 자는 나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단독자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나는 잠들지도 울지도 않는다. 그러나 무릎 사이에 고개를 박고 움츠리는 중임은 확실하다. 그러고 있는 연유란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나만의 동굴 속에 침잠하여야 동반자와 부산물이 더욱 확연하게 그려져서다. 오금 사이의 조그만 어둠은 아무런 필기도구가 없는 지금 내 가족을 머릿속으로 써낼 수 있는 아늑한 작업실이다. 그래. 내 가족. 나는 아무런 감동 없이 동반자와 부산물을 아우르는 그 낯선 공동체 이름을 처음으로 의식에 각인시킨다. 사람이 아니라 평소 애정하지 않던 사물이더라도, 무엇이든지, 군중 속에서 놓쳐 잃어버리는 순간 그것은 영원히 되찾지 못할 이산가족으로 격상된다. 나는 전란으로 떠밀려 올 인파가 두려워 스스로 둘의 손을 놓아 버렸다.
「자네는 왜 말이 없는고?」 「이 사람은 아마 가족을 잃어버렸을 겁니다.」 건너편의 단독자가 대신 대답하였지만 산지기는 다시금 나에게 물었다. 「결혼하였는가?」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한데 번복했다. 「결혼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렇다면 나에게 동반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혼했어요.」 그가 다시 물었다. 「아이는?」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노인이 말귀를 못 알아들었는지 재차 물었다. 「죽었어요.」 내가 대답했다. 당황한 단독자가 내 편을 들었다. 「이이는 지금 혼란스러워하고 있어요. 그만 괴롭히세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가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그렇다면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게 뭐가 있나? 왜 망설이는 거지?」 더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더욱 곤혹스러운 건 심금을 들켰는지 크게 몸을 들썩이더니 엎질러진 물을 급히 담듯 산지기의 두 손을 꼭 부여잡는 단독자의 태도였다. 〈나를 놀리는 게 틀림없어. 저 노인이 우리를 붙잡아 두는 데 성공해서 긴장이 풀린 모양인데. 그런데 이자는 왜 노인에게 애원의 눈길을 보내는 거지?〉 나는 부정한 자를 반려자로 맞이하게 된 것처럼 배신감에 더는 사이 좋게 앉아 있을 수 없어 판잣집 밖으로 나갔는데, 날이 갠 밤하늘로 아까보다 더 커진 상현 망간의 노란 달에 나룻배처럼 납작하고 길찍한 진회색 구름이 수평으로 걸린 광경이 보였다.
이리도 큰 달을 본 적이 있던가? 나는 넋을 잃고 군청색 밤하늘의 남쪽 중앙에 자리해 가는 외계의 거대한 모선 같은 위성과 명령 한 마디에 당장이라도 지구로 쏟아질 것처럼 위협적으로 빛나는 별 무리를 올려다보았다. 저간 광해에 가려져 있던 우주가 열리는 순간을 목도한 나는 그 아득함에 숨이 멎을 듯한 황홀경이 일었다. 구름이 수평으로 가로지른 달의 모습은 마치 고리를 가진 한 혹성이 지구의 위성 자리를 차지한 듯했다. 〈토성의 춘추다. 10년 전의 나는 토성의 겨울이라는 미망에 사로잡혀 그 영향으로 내가 미쳐 간다고 착각했었지. 토성은 지금 한 해가 지나고 온화한 춘추가 왔어. 하동이 되기 전까지 다시 모든 게 시작이다.〉 한결 기분이 산뜻해지자 나는 집 안에 남아 있을 단독자와 산지기에게 생각이 미쳐 그들을 불렀다. 「어이!」 이제 그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였는데, 전란 속에서 사람들이 쉽게 애착을 가지고 미래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상대에게 투영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동안 읽은 책에서 배운 바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미쳤으니 그렇다 치고 단독자는 함께 고생하여 산을 오른 만큼 나 역시 이미 그를 향하여 동질감이 솟아오른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로 전란이라면 이제 기나긴 불행을 향한 시작인데 무턱대고 남에게 마음을 열 수는 없었다. 설령 이 소동이 하룻밤 춘몽에 불과하다면, 오늘 밤이 지나는 대로 깨어나 동반자와 부산물에게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어찌 경거망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들이 판잣집 안에서 꾸물거리는지 영 나오지 않던 참이었다. 둘이 나 없는 사이에 작당 모의를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까의 곤혹스러운 대화가 이번에는 합을 맞춘 둘에 의해서 더 집요하게 펼쳐질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들던 찰나였다. 전투기 편대가 어둑한 대기를 가르며 날 때 들리는 파열음이 들렸으나 일반적인 비행 물체라고 보기 어려운, 땅에서 치솟은 유성우인 듯 불타는 광체 수십 발이 밤하늘을 잠시 푸르게 밝히고 연기로 이루어진 궤적을 그리면서 북녘을 향해 미끄러지듯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들이 멀어지고 난 뒤에 유도탄들의 행렬은 한동안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전란이 발생하였음을 더는 부인할 수 없는 간명한 증거 앞에서 나는 북쪽으로부터 뒤돌아 주저앉아 그것들을 외면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터무니없는 진실을 마주한 부모가 아이에게 이를 알려 주기 막막해하듯, 전란에 대하여 생각도 않는 둘에게 이 상황을 어찌 알릴지 나는 전전긍긍했다. 세상을 등진 산지기와는 달리 단독자가 상황의 심각성에 대하여 그간 전연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이 기이하게 다가왔다. 밤하늘이 다시금 잠잠해지면서 유적 터가 본래 지닌 고적에 싸이고 판잣집에서 단독자와 산지기가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 취한 듯 왁자지껄 떠들면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주저앉은 그대로, 유도탄이 대기를 가르는 파열음이 이미 지나간 뒤인데도 그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듣지 못했단 말이야?」 「무슨 소리?」 단독자의 반문에 나는 일어서면서 말을 바꿨다. 「내가 부르는 소리.」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옳아. 우리를 부를 만하군. 달이 밝아.」
무슨 술수가 부려졌기에 조금 전 계곡을 타고 내려가던 산바람이 흐느끼던 울음소리도 선명하게 들린 판잣집에서 창공이 찢어지는 소음이 감지되지 않았던 걸까? 노인은 이제 마음이 완전히 놓였는지 내 앞에서 뒷짐을 진 채 제자리걸음으로 장단을 맞추면서 대대로 이어져 온 이곳 산지기의 터에 관하여 구전 설화를 흥얼거리듯 이야기했다. 옛 왕조 시절부터 이 산은 대대로 무정부주의자들이 숨어 살던 곳이었으며, 새로운 산지기가 계승할 때마다 기존의 가옥을 허문 다음 폐허에서 쓸 만한 석재와 목재를 골라내어 그 터 위에 새로운 집을 그보다 작게 짓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러 대에 걸쳐 반복되어 오다 보니 그의 대에 이르러 판잣집이 된 것이고, 다음 대에서는 야영이라도 해야 할 판이라며 그는 킬킬댔다. 「무엇을 지키기에 산지기인가요?」 내 물음에 그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모른다네. 그저 내 임무는 지켜보는 것. 그것은 한 시기의 멸망이야.」 「당신은 언제 그 끝이 오는지도 모르는 모양이군요.」 내가 그렇게 비웃으며 쏘아붙인 이유는 한 시기의 멸망이 곧 닥쳐올지도 모르는데 그가 태평하기 그지없어서였다.
「그야 알고야 말고. 바로 오늘, 달이 남쪽 하늘 가운데를 지나 막 저물어 가기 시작할 때쯤이라네. 그때는 이미 내가 죽어 시신이 된 뒤로, 그 도래하는 마지막은 후대 산지기가 목견할 테지.」
태연스러운 그의 대답에 나는 당황을 감추려고 웃은 그대로 입매가 딱딱히 굳었다. 나는 남쪽 밤하늘 한가운데의 커다란 노란 원을 흘낏 올려다본 뒤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지나가 정방형 문틀 앞에 선 단독자를 향해 〈이제 여기서 기대할 건 없으니 천천히 내려가자고〉 크게 외쳤다. 회랑 터에서 걸어오는 나를 보고 그가 달밤에 체조하듯 사지를 사선으로 쭉 곧게 뻗어 〈이거 봐!〉라고 환호했다. 〈무엇을?〉 나는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가운데 속으로 되물었다. 「그래, 봤어. 그러니 이제 내려가자.」 「어디로?」 「내 가족을 소개해 줄게.」 사위가 어둑한 가운데서도 그가 두 팔을 내리고 울상을 짓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보였다. 「나는 네 가족이 될 수 없는 것일까?」 내가 상황을 모면하려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즉각 화답했다. 「그래. 알았으니까 우선 내 말대로 하자.」 내 걸음이 몹시 더뎌 여전히 회랑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에게 전혀 이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내달리려던 차에 인기척을 느껴 뒤를 돌아보았는데, 산지기가 뒤춤에서 아까 내가 떨어뜨렸던 부러진 마룻대를 꺼내 두 손으로 움켜쥐고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때는 단독자가 〈나는 너를 진작부터 알아보았어〉라고 말하던 참으로, 그는 내가 성급히 달리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꼴과 그 뒤로 몽둥이를 치켜든 노인을 발견하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미친 산지기가 몽둥이를 크게 휘두르려고 높이 세워 든 순간 앞을 막아선 그는 장작이 도끼에 쪼개질 때 나는 명쾌한 타격음과 함께 이마를 붙안고 쓰러졌다. 그와는 다르게 내가 여태껏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깨달음이 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잡풀을 움켜쥐고 일어서 그의 몸 위로 몸을 날려 다시 엎어졌다. 아래에 깔린 그가 찢어진 이마에서 눈가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를 닦아 내면서 내 생각에 응답했다. 「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건 당연해. 너는 나의 것이니까. 너는 나의 극히 일부분인데 일부가 총체를 알아볼 리가 없지. 너는 그저 지금처럼 나와 붙어 있으면 되는 거야.」 그가 피를 멈추려고 자기 이마를 짓누르는 내 손을 천천히 끌어당겨 추진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고, 그러자 그의 차가운 입술이 신부 화장을 한 듯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두 사람은 일어나 나란히 서시오.」 내가 그를 부축해서 같이 일어섰을 때 노인은 아까의 타격으로 부러져 뾰족하게 날이 선 목봉을 들고 황망히 서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폭력에 그 또한 당황한 모양새였다. 그가 쥔 것 없는 한 손으로 원형 제단 터를 정중히 가리키며 말했다. 「두 단독자는 언약의 제단 앞에 가서 서로를 마주 보시오.」 내가 거부하려는 몸짓을 보이려는 찰나 그가 목봉을 제 머리에 거듭 내려치면서 끝끝내 피 칠갑이 되어 흉흉한 눈빛으로 다시금 제단을 가리켜 우리에게 지시했다. 「그 앞에 서서 각자를 마주 보시오.」 우리는 그렇게 했다. 문을 통과하여 제단 앞에 서자 때마침 머리 위 밤하늘에서 북측의 저 나라에서 날아온 박격포탄이 요격되면서 폭발음과 더불어 환한 불꽃들이 피어났다. 축포였다. 산지기는 성역으로 들어서지 않고 그 주변을 초조하게 서성이며 예식을 이어 갔다.
「성혼하기에 이곳은 조촐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어느 곳인들 편치 않은 두 사람이 여기에 서 있으니, 서로가 가진 신분과 나이, 성정으로 할 수 있는 최악의 군짓을 나 산지기가 강요하기에 이르렀소. 둘이 신혼에서부터 죽음까지를 함께할 땅이 주어졌고, 하물며 평상 군중을 두려워하던 당신네는 기꺼이 자기들만의 낙원을 여기에 새로이 지어 가리라 믿습니다. 또한 산지기로서 의무를 망각하지 않고 해수면에 가까운 지상에서 무슨 재앙이 벌어지는지 잘 관찰하기를 바라오. 울지들 마시오. 아무리 강제된 결혼인들 산 아래서 벌어질 아비규환만 하겠소? 너무 급작스러운 혼례식이겠지. 어느 혼인이 안 그렇겠소, 나를 이해해 주시오, 나를 이해해 주시오……. 당신들도 언젠가 다른 누구에게 날강도처럼 혼인을 강요할 날이 올 터이니. 나는 짝이 없어 스스로와 혼인하였고 그간 산을 내 배우자라고 여기며 살아가려고 했어. 그러나 산에는 당신들과 같은 온기가 없어. 나를 위해 몸을 던지지도 않지. 산은 나를 배신했어. 누군들 안 그렇겠느냐만. 어쨌거나 배덕한 이웃이 없다는 건 얼마나 좋은 것이오? 저간 더불어 살았던 이웃은 모두 지난 꿈처럼 잊으시오. 하늘 아래 이곳 산지기의 터전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니, 자, 서로에게 맹세하시오. 아니, 맹세는 이미 방금 이루어졌어. 이로써 혼인이 피로써 성사되었음을, 죽음마저 둘을 갈라놓을 수 없음을 사악한 저 달 아래서 선언하는 바요.」
나는 전쟁 속에서 피어난 사랑들을 안다. 하지만 이건 그렇지가 않다. 그저 전란 하에서 졸속으로 강행된 혼인일 뿐이다. 산지기는 자신이 죽기 전에 끝을 맺고자 서둘러 우리에게 배덕한 혼례를 강구했다. 정녕 모든 것이 끝났다면, 세상에 둘만이 남았다면 그때 우리에게 마음이라는 게 남아 있다면 서약 없이도 자연스럽게 맺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황량한 유적지 위에 우리 둘이 다다랐다는 이유만으로 관철된 있을 수 없는 언약이다. 산지기 말고 다른 증인이 누가 있는가? 그의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 그를 죽여야 한다. 아까 스스로를 인질 삼아 우리에게 제단 앞에 서라 할 때 제풀에 죽게 내버려둬야 했다. 인간으로서의 측은지심이 원치 않는 결혼으로 이어진다는 게 가당키는 한가? 내 앞에 마주 선 이자는 운다. 그게 공포나 부정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힘이 든다. 단독자가 이제 나의 동반자가 된 마당에 혼인을 거스르는 것은 또 다른 배덕이다. 한데 내가 언제는 배덕자가 아니었던가? 거스를 수 있다면, 무엇이든 거슬렀던 나다. 혼자서라도 하산하자. 산지기로서 의무는 그에게 맡기고, 나는 나의 진짜 동반자에게로 돌아가 부산물을 아이로 맞이하자. 아니야. 둘은 떠났다. 나는 그 사실을 자꾸만 받아들이지 않으려 드는군. 내가 녹화된 그 영상을 날조된 것으로 내심 여기고 있음이야. 이제 어찌한담? 이 성혼의 다음은 무엇이지?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로 산지기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의무와 역할을 마친 그의 어둑한 윤곽은 홀가분해져서 마치 소천할 것처럼 선선한 밤바람에 너풀거렸다. 그는 고개 숙여 황폐한 땅을 내려보고 있었다. 자신이 떠나게 될 운명의 때를 기다리거나 혹은 스스로 죽음을 감행하고자 마음을 다잡는 듯했다. 그는 가난하고 헐벗은 작자였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 자신의 존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 큰 불행과 고통이 필요해 보였다. 화약들의 소요가 잠재워진 적요한 밤하늘이 기묘한 삼각형을 이룬 우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에게 셋은 언제나 감히 꿈도 못 꿀 완벽한 숫자였다. 내가 이원적인 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건 셋의 완전한 균형에 다다르지 못하였음에 다름 아니었다. 이 균형도 기어코 깨질 것이고, 우리는 나와 단독자가 이루는 한 선분이 되어 새로운 꼭짓점을 찾아 나설 것이다. 아니면 새로운 자가 알아서 찾아올 터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또 다른 부산물을 만들어 낼 것이다. 내가 원치 않음에도 그렇게 될 것임을 나는 알았다. 사람은 길 위에서 끝없이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거나 전설이나 신화에서처럼 새로이 한 생명체를 생성하기 마련이니까. 마침내 결단을 내린 산지기가 명료하게 말했다.
「현재의 지속은 멸망이야. 나의 끝은 자살이고. 그것은 더는 구질구질해지지 않기 위한 최종적인 해결책이다. 내가 왜 여기서 누구를 또다시 해해야 하는가? 나는 아무도 해치지 않아. 방금은 내가 원치 않던 소동이었다. 원하는 것은 오직 내 피거늘, 끝이 바로 코앞인 까닭이다. 나에게는 더는 생에서 아등바등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뭘 애써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안락한 죽음을 향해서야. 사람들은 말하지. 제 목을 졸라 죽을 수는 없는 법이라고. 왜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이제 나는 소멸하는 거야. 더는 나는 없다. 영원히.」
그가 두 눈을 감고 손에 쥔 목봉의 날카로운 끝을 제 목에 단호하게 꽂아 천천히 사선 아래로 그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면서 그는 느릿느릿하게, 마치 모래 폭풍에 사라져 가는 신기루처럼 허물어졌다. 죽어 가는 그를 돌보고자 제단을 나서려는 단독자의 팔을 내가 붙잡았다. 이제 산지기를 놓아줘야 했다. 우리는 제단에서 떠날 줄 모르고 꽤 오랫동안, 그가 구멍 난 목으로 내는 괴상한 신음을 가만히 들으며, 신선한 피가 유적지에 검은 웅덩이로 고이는 정경을 멀거니 내려다보며, 한순간에 오지 않고 고통스럽게 미루적거리는 죽음이 얼른 끝나기를, 앞으로 우리를 엄습할 알 수 없는 다음이 부디 지금보다는 관대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고대했다. 그러나 그가 여태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밤바람에 하늘거리는 누더기 자락 때문에 나나, 이제 동반자가 된 단독자가 가까이 다가가 맥박을 재보지 않고서는 그의 죽음을 확언키는 불가능한 듯했다. 나는 붙잡았던 단독자의 팔을 놓고 그가 맘대로 움직이도록 놔두었다. 하지만 그는 죽음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