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생활
[읽는사람 x 다산책방]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편집자와의 대화
안녕하세요, '읽는사람' 여러분! 읽는사람 운영자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신작,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잘 읽으셨나요? 한 권의 책이 편집자의 손을 떠나 독자의 마음속에 안착하기까지, 그 과정에는 수많은 고민과 문장들이 있습니다. 이번 작품을 애정하는 분들, 그리고 줄리언 반스라는 거장의 세계를 탐험 중인 여러분을 위해 특별한 〈편집자와의 대화〉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줄리언 반스는 자신의 (문학적) 부고를 본인이 기사에서 확인하는 것이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하며 은퇴를 선언했는데요. 작가가 선언한 마지막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독자님들께서 느낀 '정리' 혹은 '마지막 인사'가 어떻게 다가갔나요? 책을 읽으며 와닿았던 문장, 마지막 장을 덮으며 느꼈던 감상, 혹은 작품을 만든 편집자에게 묻고 싶었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무엇이든 좋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을 함께 나눠도 좋고요! (저는 작가 특유의 유머가 제 취향과 맞아서 낄낄거리며 읽었어요. ㅎㅎ) 정답을 찾는 시간이 아닌, 각자의 감상을 나누며 작품의 의미를 확장해 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남겨주신 소중한 댓글에는 이벤트 종료 후 편집자가 직접 답글로 대화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 참여 기간: 2/26(목) ~ 3/2(월) * 참여 방법: 본 게시글에 작품에 대한 생각이나 편집자에게 궁금한 점을 댓글로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 참여 기간이 종료된 후, 순차적으로 편집자가 답글로 대화를 이어갑니다. * 베스트 댓글을 남겨주신 3분께는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헤르쉬트07769> - 독서후기. (스포주의)
독일의 한 작은 마을 사람들이 각종 사건들로 인해 두려움에 떠는 이야기. 4-5일 빡시게 벼락치기 하면 읽을 수 있겠거니 싶었지만 역시 호르커이 아저씨의 소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제출일자가 훌쩍 지나버렸지만 오기와 끈기로 다 읽었다. <뱅크하임 남작의 귀환> 보다는 편하게 읽혔으나 약간의 차이 일 뿐, 등장인물들의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쏟아내는 특유의 필체는 나를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작은 마을에서는, 주인공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수시로 불안해 한다. 동네의 낙서 테러부터 시작해서 늑대의 출몰이나 주유소의 폭발같은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나 규칙은 거의 아무도 모른다. 그저 자신들이 그동안 믿고 있었던 신념이나 규칙들로 어떻게든 그 사건들이 발생한 이유를 어림짐작하며 멋대로 해석하고 각자 결론들을 내리지만, 사실 사건이 일어난 특별한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마을 사람들이 자기 삶 앞에 펼쳐진 이상한 일들이 너무 불안해서 어찌 할 바를 몰라, 어떻게든 자기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어 불안감을 잠재우려고 발버둥 치는 것일 뿐이다. 마을의 문제아들, 과학자, 모범시민, 경찰 모두 각자의 논리로 가설을 세워 눈 앞에 벌어진 일들을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이 애써 머리를 굴려 만든 가설들은 전혀 들어맞지 않고, 세상은 여전히 혼돈과 미지의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주인공은 소설 초반부터 양자역학의 모호함에 자기 멋대로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총리에게 편지까지 보내는데, 주변 사람들은 주인공을 보며 한심하다거나, 가엾다거나 평가를 내리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또한 막연하고 근거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해할 수 없는 인생의 모호함에 마을사람들이 느끼는 근거없고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엄청난 분량으로 빽빽하게 전부 적어 놓은 것이 바로 이 소설. 나 또한 어떻게 흘러갈 지 전혀 감도 안잡히는 인생을 마주할 때 엄청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으로, 참으로 답답하고 괴롭게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를 읽으며 거울치료를 받게 되었다.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온갖 고민 중에 분명 독자들의 고민 하나쯤은 겹칠 것 같다. 그러나 고민은 그걸로 끝, 우연과 우연에, 오해와 편견까지 겹친 사건들로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인생 앞에서 대책, 고민, 해석, 좌절, 공포, 분노 다 부질없구나… 답없는 인생 좀 더 막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모두 포기하고 해탈하면 참된 기쁨이 찾아온다던가 하는 아름다운 메세지는 전혀 없다. 세상은 종잡을 수 없고, 우리는 있었다가 없어질 뿐이고, 인생의 흐름은 대체로 비극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독자들에게 넘긴 듯 하다.
읽는사람의 질문 | 최근 가장 좋았던 책은?
안녕하세요, 읽는사람 여러분! 앞으로 읽는생활에서 읽는사람에게 질문을 하고, 그 답변을 모아, 「월간 읽는사람」에서 함께 소개해 보려 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첫 번째 질문입니다. 최근 읽었던 책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은 무엇인가요? (모든 장르 포함 / 이달의 소설, 이달의 고전 제외) 작품명과 함께, 관련된 생각과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세요. (최소 200자) 보내주신 답변을 최대한 담아 「월간 읽는사람」 Vol.21(3월 발간)에 소개합니다. - 기한: ~2/28(토) - 게재: 「월간 읽는사람」 Vol.21호 - 주제: 최근 읽었던 책 중 가장 좋았던 작품 & 자세한 이유 (최소 200자)
부럽다 엘리자베스
부럽다! 엘리자베스 처음부터 편견을 가득 품고 읽을 수밖에 없는 책 ‘오만과 편견’ 이미 많은 매체들을 통해 스토리는 알고 있었다. 오만 가득한 다아시라는 ‘재수’가 결국 편견으로 가득했던 나의 왕자님이 되는 스토리. 모든 로맨스 소설의 원류라고 일컬어지는 이야기이다. 서로를 오해하고 편견으로 미워하다가 결국 좋아하는 감정이 싹트고 결국 사랑하게 되는 결론. 심지어 남자 주인공은 왕자님. 이 소설은 읽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가지고 있는 책의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실패했었다. 그래도 내용은 알아야지 라는 생각에 영화로도 접했고 오래전에 방영된 BBC의 드라마까지 찾아두었다. 심지어 드라마는 좋아하는 배우 콜린퍼스가 다아시 역을 맡는다. (참고로 콜린퍼스는 이 역할로 영국에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니, 눈에 하트가 그려진다.) 하지만 긴 호흡의 드라마는 못 보는 타입이라 드라마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읽기 전부터 여자 주인공은 키이라 나이틀리(영화 속 여 주인공) 남자 주인공은 콜린퍼스로 지정되었다. 소설원작의 영화나 드라마를 본 이후 책을 읽을 때의 단점은 이미 시각화된 이미지가 머릿속에 들어있어 자유로운 상상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번역이 안 좋은 이런 소설을 읽을 때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다아시에 콜린퍼스를 앉혀놓고 읽으니 그 오만 마저도 사랑스럽기만 했다. 소설의 배경이 18세기이니, 왜 이래? 하고 배경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의 재산이 딸에게 상속되지 못한다는 충격. 결국 베넷가의 어머니가 그토록 천박하게 딸들의 결혼에 목매는 이유는 재산이 상속되지 못해 그녀들이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거 아니겠는가.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베넷부인을 품위 없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녀가 전혀 천박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행동이나 말이 가벼운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런 사람은 세상에 널렸다. 그녀는 자신의 딸들의 행복한 미래만이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였다. 물론 그런 목표를 가지고도 고고한 품성의 사람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런 귀엽고 생각이 말과 행동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람도 나쁘지 않다. 혹으로 꿍꿍이를 가지고 음흉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더욱 천박하다 사실 모든 인간의 내면이 베넷여사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다들 세간의 평가를 고려해 조심하며 사는 거지. 두 번째로 소설을 읽으며 18세기 귀족들은 좋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딱히 노동하지 않아도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여행을 다니고 아침이면 치장을 하고 저녁이면 무도회에 참석하거나 사람들을 초대해 시간을 갖는다. 뭐 이런, 호화로운 삶이 있어. 부럽다. 18세기에 태어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귀족으로 태어나고 싶다. 잠깐 본 드라마에서 실내에서는 파티가 진행 중인데 밖에서는 더럽고 냄새날 것 같은 사람들이 진흙길에서 이게 진짜 춤이지 라며 춤을 추었다. 아마 그들은 귀족들이 데리고 온 마차꾼이거나 하인들이었겠지. 18세기에 잘못 태어나서 신분이 미천했다면 어땠을까. 아이고. 케서린 부인은 어쩌다 보니 콜린즈와 친분이 있고 그가 결혼한 이후 신혼집에 방문해서는 갖가지 충고를 한다. 신분이 높고 콜린즈의 생계와 명예에 적잖게 영향을 끼친다는 건 알겠는데 남의 집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건 아니지 않나.라는 현대적인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당시는 작은 네트워크의 사회. 인맥과 인물평 그 외등등 소문이라는 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던 사회이니 뭐,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마지막에 엘리자베스에게 다아시의 청혼을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 (혹은 캐서린 자신을 위해) 거절하라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이 할머니 선 세게 넘네.라는 생각을 했다. 이전에 엘리자베스는 속으로는 못마땅하면서도 그냥 넘어갔다.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할머니가 뭔데 악기를 배워라 마라에요) 하지만 결국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에 대한 캐서린할머니의 충고에는 대차게 할 말을 한다. 이 부분은 꽤 통쾌했다. 그래, 캐서린도 한 번쯤은 이런 면박을 당해봐야지. 마지막에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대화에서 다아시는 본인이 신분다운 교육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오만함에 대해서는 한 번도 충고를 듣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되었다는 고백을 한다. 이 고백이 다아시의 모든 행동 중 가장 매력적이었다. 본인 스스로 이제까지 자신의 삶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걸 심지어 말로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용기는 쉬운 게 아니다. 혼자만 몰래 알고 싶은 본인의 부끄러운 부분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솔직히 이야기한다는 건 꽤 멋졌다. 다아시 만세. 나는 속물이다. 그래서 다아시 같은 왕자님이 나타나길 기다리다 결국 혼자 살고 있다. 생각이 통하는데 심지어 상상불가의 재산가인 남자가 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기다려 주고 한번 더 청혼해 준다면 앗싸. 아니, 나라면 첫 번째 청혼에서 이미 고마워서 넙죽 절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다아시는 외모도 근사하게 나온다(내 안에서 그는 콜린퍼스다) 아니, 사랑에 안 빠질 수 있겠냐는 말이다. 신분 차이로 그가 나를 눈에 들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조금 경멸하는 것 같다면 좀 소심해지고 본인의 처지가 안타깝기는 하겠지만,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데, 노 땡큐를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나는 정말 자신 없다. 당장 두 손 모으고 “네 저도요.” 할 것 같다. 다아시 내게 오라.
눈먼 자들의 도시
예전에 영화 개봉했을 때 관심 가졌던 작품인데, 영화 시놉시스로 줄거리 파악하고 난 뒤 책으로는 읽어보지 못했어요. 대충 어떤 내용이겠거니 생각만 했던 작품인데, 이번에 읽는 생활에서 1월 이달의 고전책으로 선정되었길래 맘먹고 읽어봤습니다. 눈먼 자들 속에서 유일한 눈뜬 자의 시선으로 진술하는 이야기들에서 인간의 본능, 인간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하는 책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대사 중 '우리는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었습니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영화로 봐서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글로 낱낱이 서술되는 인간의 저열한 본성은 끔찍하고 역겨웠다. 작가가 펼쳐놓은 잠깐의 디스토피아는 인간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정말 세상이 그 지경이 되면 선과 악, 옳고 그름은 필요 없는 걸까? 극한의 상황에서는 오직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까? 책을 덮을 때까지도 답은 얻지 못했다. 다만 시력을 회복한 그들의 남은 삶은 이전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적어도 시력이 있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이전의 삶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더불어 나라는 인간도 극한의 상황에서 최소한의 인간성은 유지할 수 있길 빌어본다.
양심의실명
문명은 시력이 아니라 양심으로 유지됨을... 내면의 실명, 양심의 실명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필력에 빨려들듯 읽어내려갔습니다.
현실인가 환상인가
E.T.A. 호프만은 인상깊은 중단편들을 주로 쓰는 작가인데, <모래 사나이>는 제가 <호두까기 인형> 이후에 두 번째로 읽는 책입니다. 이 책은 최근에 읽은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는 책 에서 고전으로 언급된 책이기도 해서 주저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모래 사나이는 아이들의 꿈에 등장한다는 무서운 Sandman의 이야기를 E.T.A. 호프만의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주인공 Nathaniel은 Clara와 결혼할 사이였는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Coppelius라는, Nathaniel이 Sandman이라고 인식한 사람에게 혹독하게 당해서 불에 타 죽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그에게 환상일까요, 악몽일까요, 아니면 현실일까요? 작가는 이 장면을 정말 환상적으로 그려내서 독자로서 혼선이 오고, 이후부터 Nathaniel이 처한 세계와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가 다 자라 성인이 되어 Clara와 막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지금 새로운 여인인 Ophilia가 나타나고, 아름답고 피아노도 잘 치는 이 여인은 말은 잘 못하지만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한없이 바라봅니다. 그런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있자니 다정다감했던 Clara와 그녀의 오빠이자 친구 Lothair는 꿈나라에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Ophilia도 Coppelius가 변신한 듯한 Coppola가 나타나면서 산산이 부서지고... 이야기는 점점 악몽처럼 변해갑니다. 작가의 이야기에 홀려서 읽다 보니 어느덧 이야기의 끝에 다다랐어요. 결론이 섬뜻하면서도, 호프만이 이 책을 썼을 시대를 생각해보니, 당시 정말 기발한 상상력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블랙 먼데이
스피드한 전개력과 그에 따른 흡입력으로 소설의 매력 중 하나를 발산하였으나 그 외에는 사유할 만한 무언가가 없다고 느꼈다. 단지 이것만으로 '소설화'에 대한 점수가 높았던 것일까? 아니면 수상작이라 하여 내 기대가 높았던 것일까? 후자인듯 하다.
우리는 아직 라이터와 성냥이 있다.
명확한 시공간의 경계 없이, 한 페이지도 채 채우지 못한 채 투두둑 끊어지는 조각글들로 구성된 이 소설을 과연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규정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근래 읽은 작품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유와 이해력을 요구한 소설이었다는 사실이다. ARSON. 한국어로 번역하면 ‘방화’라는 뜻을 지닌 이 제목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은유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아르슨」 속의 ‘불’은 단순한 재난이나 물질적 현상이 아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삶을 연명하게 하는 필수 조건처럼 읽히기도 한다. 불은 직접적인 형상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소설이 흐름과 단절을 반복하는 동안 끊임없이 변모하며 불규칙하게 일렁인다. 초반부에서 난해하게만 인식되던 작은 불의 파편들은 소설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연결되며 메시지의 윤곽을 드러낸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이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었다. ────────────── ⌦ 불꽃을 지키는 자가 미쳐 날뛰면, 불도 미쳐 날뛴다. ────────────── 「아르슨」에서 ‘외부의 불’은 인간에 의해 점화된다. 무엇을 태울 것인지, 무엇을 남겨둘 것인지를 구분하지 않은 채 그저 연소할 뿐이다. 그렇게 번져나간 불은 결국 이를 초래한 인간에게조차 적대적으로 되돌아와 커다란 피해를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야생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영양분을 얻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다시 라이터와 성냥을 집어 든다. 한 개인이 피워 올린 불은 집단 방화로 확장되고, 자연을 불태우며 환경을 오염시키고, 끝내 인간을 덮치는 연쇄적 결과를 낳는다. 이렇듯 모든 인간은 연쇄 방화를 저지르는 방화범이자 공범이다. 반면 ‘내부의 불’은 우울과 불안, 불면, 무력감과 같은 심리적 병증의 형태로 타오른다. 결국 「아르슨」은 두 개의 불을 통해 위기에 직면한 인간을 비추는 이야기다. 단순히 소설의 주요 주제로 강조되는 기후 위기를 넘어서, 두 개의 불로써 인간이 불러일으킨 복합적 위기, 즉 생존과 파괴가 공존하는 상태를 은유한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불에 가장 강하게 매혹되면서도,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를 입은 인물이 바로 화자와 ‘그’다. 소설은 끝내 방화범이 누구인지 단정하지 않은 채 막을 내리는데, 이는 열린 결말이라기 보다는 애초에 단 한 사람을 지목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모든 인간은 라이터와 성냥을 들고 있으며, 연소 없이 살 수 없다’는 메시지를 떠올려보면, 불을 지른 방화범은 하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하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하나의 인간을 여러 갈래로 분해해 드러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나마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르슨」은 굉장히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완독 직후, 이 달의 소설 커뮤니티에 100자 서평을 남겼는데, 그 짧은 문장 속에는 이 작품이 남긴 혼란과 어지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난해한 분출과 단속적 사유의 교차.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어렴풋이 형성되는 불의 형상과 의도된 지연. 완독 이후에만 유효해지는 독해의 재구성.”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독서록을 남기게 된 건 이 소설을 언어로 정리하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100자 서평을 읽으며 든 아쉬움은 ‘독해’라는 단어가 이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아르슨」은 이해나 해석을 요구하는 소설이라기보다, 독자의 사색을 유도하고 의미를 직접 명명하게 만드는 글에 가깝다. 실험적인 문체와 파편화된 구성 역시 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그리고 그 불을 다루는 인간 자신을 되묻게 하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