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생활

읽는 사람들의 독서 생활을 함께 나누는 자유게시판, 〈읽는생활〉. 지금 읽고 있는 책, 추천받고 싶은 혹은 추천하고 싶은 책, 마음에 담은 책 속 문장부터 동네서점 추천, 도서전 후기까지! 여러분의 지극히 일상적인 '읽는생활'을 묻고 나눕니다. 이곳에 차곡차곡 쌓이는 이야기들이 모여, 읽는 사람들의 '읽는생활'을 더욱 풍성하게 채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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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이달의 소설

5월 이달의 소설 선정작 미리보기 👀

안녕하세요, 읽는사람 참여자 여러분. 5월 〈이달의 소설〉 선정작을 도서 신청 전에 미리 공유드립니다. 도서 신청 전에 미리 살펴보세요! > 5월 도서 신청: 5/2(토) 1) 『영원히 계속되다가 끝이 난다』, 앤 드 마르켄 | 허블 | 184페이지 소설은 화자인 ‘나’의 상념으로부터 시작된다. 왼팔을 잃은 나. 어깻죽지에서 깔끔하게 떨어져 나가 뭔가 이발한 느낌이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 화자는 아포칼립스 이후의 세계를 떠도는 좀비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자는 죽은 까마귀 한 마리를 발견하고 갈비뼈 아래 몸속에 품는다. 죽었지만 때때로 말을 내뱉는 까마귀. 그 까마귀를 가슴에 안은 순간부터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나’는 죽은 연인을 향해 서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2) 『슬픈 호랑이』, 네주 시노 | 열린책들 | 368페이지 어릴 적 의붓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성적 학대를 당한 저자가 쓴 자전 소설이자, 에세이, 회고록이다. 책의 제목인 『슬픈 호랑이』는 블레이크의 시 「호랑이」에서 비롯했다. 저자는 〈그분은 어린양을 만들고도 그대를 만들었는가?〉라는 시구를 강박적으로 떠올리면서 강간범과 자기 자신이 정녕 같은 흙으로 빚어졌는지를 곱씹고 악의 근원에 대해 파고든다. 3) 『손을 찬양하다』, 헤수스 카라스코 | 민음사 | 388페이지 소설 속 화자는 아내 아나이스와 두 딸과 함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낡은 시골집을 오가며 10년을 보낸다. 소유주가 돈을 마련하는 대로 철거하겠다는 집, 기껏해야 1년이라고 생각했던 기간이 결국 10년이 된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수선들을 통해 정작 변하는 것은 집이 아니라 사람이다. * 참고: 5월 〈이달의 고전〉 선정작 1)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문학동네 | 144페이지 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대표작. 소설의 화자인 한탸는 삼십오 년간 폐지 압축공으로 일해온 인물이다. 그는 어두침침하고 더러운 지하실에서 맨손으로 압축기를 다루며 끊임없이 쏟아져들어오는 폐지를 압축한다. 2)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 문학동네 | 400페이지 200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대표작으로, 자전적 성격이 짙은 소설이다. 남편의 빈자리를 딸이 대신해줄 것을 기대하며 딸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고 간섭하는 어머니와, 그에 억눌려 사도마조히즘 성향을 보이며 욕망을 비뚤어진 방식으로 표출하는 딸 에리카의 이야기를 그렸다. - 『피아노 치는 여자』는 출판사 재고 품절로 인해 전자책으로 발송됩니다.

이달의 소설

대문자 뱀

『대문자 뱀』 속에서 ‘뱀’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상념이자, 기억을 갉아먹는 포식자로 존재한다. 작품은 ‘마틸드’라는 인물을 통해 끊임 없이 ‘근원적인 악’을 자각하게 만든다. 유능한 킬러였던 마틸드는 흐르는 세월 속에서 점차 기억을 잃어간다. 무너진 기억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사악함과 본능을 여전히 간직한 그녀의 행보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불편한 몸과 정신으로 부지런히 이어가는 노력은 계속해서 살인으로 귀결된다. 살아가기 위해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타인의 삶을 갈갈이 찢어발기는 움직임은 때로 경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기억이라는 제어 장치가 사라졌기에, 더욱 가차 없는 잔인함이 드러났는지도 모른다. ────────────── ⌦ 삶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일이 우리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 이 작품에서 모든 죽음은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일반적으로 창작물에서 죽음은 인물의 비중이나 서사에 따라 각기 다른 무게를 지닌다. 그것이 일정의 ‘공정함’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대문자 뱀』은 이러한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난 행보를 보인다. 작가가 머리말에서 언급한 ‘상당히 가혹하다는 평판’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듯, 거침없고 빠른 템포의 죽음이 이어진다. 특정 대상에게 불공정하지만, 모두에게는 가장 공정한 방식이다. 인물의 비중이나 서사의 깊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허무하게 느껴질 법한 죽음 앞에서도 작가는 망설이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죽음은 의미를 덧입지 않은 채, 그저 죽음으로 남아 침묵할 뿐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잔혹한 죽음은 정신을 피로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대문자 뱀』은 강한 흡인력과 입체적인 인물, 개성 강한 문장들로 불공정함과 공정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른다. 죽음의 무게를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그 잔혹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한 인간의 삶과 시선을 따라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완성된 결말은 마틸드가 살아오며 쌓아온 시간과 선택이 축적된 결과일 것이다.

이달의 소설

단절만이 답인가

단편적으로 읽을 수 없는 소설이다. 사회문제를 지적하고 고발하는 이야기만도 아니고, 사회 초년생의 사랑 이야기도, 그저 한 인간의 성장 스토리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다. 노동자와 회사, 내국인과 외국인, 정규직과 비정규직, 1층과 2층, 통과할 수 있는 문과 그렇지 못한 문, 이쪽과 저쪽. 소설은 끊임없는 대비를 통해 차단과 단절을 이야기한다. 경계가 분명했던 세계에 노동자도 정규직도 아닌 6개월 계약직 대학생 ‘막’이 등장하며 경계의 층위는 한층 도드라진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장 노동자와 사측 간에 갈등이 발생하고 늘 그러하듯 약자는 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뭉쳐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 막이 이 과정을 지켜보던 중에 자신이 마음을 준 외국인 노동자 라히루가 기계 사고의 피해자가 되고 그를 위한 복수로 은단의 능력을 빌려 정전을 계획한다. 공장은 막의 계획대로 정전이 되지만 그 순간 그녀는 깨닫는다. 단절이 답이 아니었다는 것을. 은단의 말처럼 심장에서도 전기가 일고, 그 흐름 속에서 맥박이 뛰며, 눈을 깜빡이고 말을 하듯,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고 흘러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야기는 막이 공장으로 돌아갔는지 복학을 했는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막이 자신과 다른 부류였던 사람들, 수지와 영준, 조안과 조합원, 그리고 마침내 은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끝내 자신은 피켓을 들지 않았지만 확성기를 만져보고 그것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됐고, 은단에게 나중에 자신의 이야기도 해주겠다며 악수를 건넬 수 있게 됐다. 막은 그것으로 자신의 경계를 벗어났다. 사실 이 소설은 아주 다양한 측면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아 더 흥미롭다.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답다고나 할까? 한 호흡에 읽기 좋은 소설인 것 같다.

이달의 소설

구름 사람들

※ 일부 스포일러 포함 인간의 삶을 조여매는 비극을 다루는 방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을 서술하는 문장과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대개 이러한 주제를 품은 작품들은 슬픔과 가까운 자리에서 독자를 붙든다. 그런 점에서 『구름 사람들』은 다소 낯선 결을 지닌 소설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이 아니라, 통증이라는 감각이었다. 문장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뾰족하게 곤두서 있었다. 읽는 내내 일방적으로 학대를 당하고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다 읽고난 뒤에도 감정은 말끔히 수습되지 않고, 피부에 남은 생채기처럼 따끔거렸다. 예상했던 만큼, 혹은 그 이상의 비참함으로 막을 내린 소설은 어딘가 허탈함을 남긴 것도 같다. 그래서 『구름 사람들』은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라기보다 ‘아프고 비참한 이야기’라는 표현에 더 가까워 보인다. 부정적인 시선에 치우쳐 본다면 불행을 과잉 나열한 불쾌감을 주는 작품이고, 긍정적인 시선에 치우쳐 본다면 가난에 잠식된 불우한 삶과 사회적 시선을 집요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읽힌다.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여러번 구름 사람들을, 그리고 하늘을 불쌍히 여겼다. 구름을 찾아온 땅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하늘의 아빠가 단장했을 때, 새빨간 동생의 볼을 바라봤을 때, 남은 삶을 알 것 같다고 자조하는 하늘을 봤을 때. 나도 모르게 그들을 안타까워했고, 동정했고, 동시에 그런 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움츠러들었다. 스스로를 역겹게 느끼기도 했다. 연민이란 결국 선민의식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감정일까. 어쩌면 작가는 바로 그 불편함까지도 계산했던 걸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행위 자체가 또 다른 기만은 아닌지 쉽게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이 전개 되는 동안 여러가지 형태로 변주 되는 폭력 또한 극심한 고통을 안겨 주는 또 하나의 요소였다. 아빠에게서 하늘로, 하늘에게서 동생으로 내려오는 ‘폭력’, 욕망의 형식을 취한 원의 ‘폭력’, 시간과 사건에 의해 전개되는 죽음으로서의 ‘폭력’까지. 이처럼 작품 속에서 폭력은 단순히 물리적 행위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흡인력이 강한 글이었기 때문에 연쇄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은 극심한 통증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가장 아프게 남은 것은 ‘죽음’이었다. 여러 죽음 사이의 간격은 지나치게 짧았고, 그 짧음이 충격을 증폭 시켰다. 다만, 다가오는 비극들이 감정이 아닌 감각으로 체감되었기에 분명 슬퍼야 했을 순간들임에도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그저 고통스러웠을 뿐이다. 때문에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는 깊은 인상을 넘어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그러나 농담은 금방 끝이 나지만, 삶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 결국 하늘은 행복해지지 못한다. 자유로워지지도 못한다. 책을 덮은 나 역시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감정의 잔여물들이 찌꺼기처럼 여기저기 들러붙은 채 오래도록 남는다. 한 사람어치의 불우한 삶이 지나치게 선명한 형태로 마음에 눌어붙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쾌하다고 표현해도 크게 이질감이 없을 감각이 느껴짐에도, 어딘가에는 반드시 이런 소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이 환기하는 이야기와 감정들이 결국 현실과도 맞닿아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쁜 것은 무엇이며, 나쁘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이 질문조차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폭력으로 남게 될까.

기타

참을 수 없는 그 존재들의 가벼운과 무거움 그 사이 어디쯤

자주 ‘내’가 선택한 ‘나’의 삶이 ‘나’에게 어울리는지 질문해 본다. 같은 또래를 기준으로 할 때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결혼하지 않았다. 아이가 없다. 즉, 가정을 만들지 않았다. 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더 자주 나의 결정에 대해 의심하고 의문이 들었다. 과연 적절한 선택이었어? 나이가 들어도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괜찮겠어? 이런 두려움은 나와 비슷한 삶을 선택해 살아간 사람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된다는 인생의 미본이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유를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을 준다. 삶을 여러 번 반복하고 연습해 살 수 있다면 덜 두려웠을까?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다양한 관계와 그들의 여러 선택이 녹아있는 삶을 보여준다. 그 다양성 안에서 나는 과연 누구와 어떻게 더 닮아있는가를 생각하며 읽었다. 이 책은 10년에 한 번쯤 읽게 된다. 처음 이 책을 읽은 건 21살이었고 30대에도 한 번쯤 읽은 기억이다. 그리고 40대의 중반인 지금 다시 한번 읽게 되었다. 질긴 인연의 연인 같은 느낌이다. 때 되면 한 번씩 찾아오는 지긋지긋한 전 남자 친구. 지긋지긋한데 생각하면 안쓰럽고 애잔한 마음이 들어서 다시 한번 안아주고 곧 역시, 지긋지긋해.라고 생각하게 되는 아련한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과연 토마스의 테레사에 대한 사랑은 연민일까. 연민과 동정, 사랑은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감정인가. 나에게 사랑은 측은지심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 순서는 명확하다. 사랑하게 된 대상에 대해서는 연민과 동정이 넘쳐흐르게 된다. 그렇다고 연민과 동정으로 인해 사랑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연민과 동정이라는 큰 집합 안에 사랑은 부분집합으로 존재한다. 연민과 동정과 애정이 모두 갖추어졌을 때 그것은 사랑이 된다. 그러나 동정과 연민이 발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되지는 않는다 사랑에는 한 방울의 애정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토마스의 테레사에 대한 감정은 사랑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동정과 연민만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어기고, 삶의 방향성을 바꾸어버리는 게 과연 가능할까. 하지만 토마스는 그 사랑에서 크게 느껴지는 연민이라는 감정이 그가 그녀와 함께하게 된 연유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토마스는 착각하고 있다 자신이 이상하는 자신의 모습과 실존하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살아가게 되는, 느껴버리는 삶에 대한 괴리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거 아닐까. 그 괴리를 메우기 위해 그는 다른 여자들을 만나며 자신이 이상하는 자신의 모습을 채운다. 그리고 본능의 자신은 테레사와 함께하며 편안함을 느낀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사비나였다. 그녀의 가벼움과 명확함이 좋다. 작가는 사비나의 행동들에 배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과연 적절한 단어인가. 사비나에게 있어 배신이란 ‘나로 살아감’을 의미한다 관계 맺음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건 사고에서 상대를 배신하지 않고 상대의 뜻에 따른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는 스스로를 배신하는 행동이다. 사비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본인을 잃지 않기 위해 혹은 사비나 본인으로 살기 위해 상대를 ‘배신’하지만 그것은 본인에 대한 충실함이다. 오히려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이 본인의 충실함을 강요한 플란츠의 어리석은 행동에 그는 멍청함을 정직으로 가리려는 ‘키치’한 사람이라고 판단되었다. 테레사를 생각하면 답답하다. ‘사랑밖엔 난 몰라’라고 하지만 과연 그녀의 사랑은 순수한가 라는 의심을 계속해서 품게 된다. 그리고 소설의 끝에는 결국 그녀는 고백한다 토마스가 필요했던 거라고. 여성의 애정에 너그러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사의 어리석어서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을 인정하게 되었다. 주변에도 가끔 발견되는 테레사 같은 현실 캐릭터들이 있다. 깊은 애정결핍으로 인해 지독한 소유욕을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의 연애는 위험하다. 나의 경우 연애제외대상 1순위이다 (그럼에도 나도 애정결핍에 약간의 소유욕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소설 속의 테레사의 그것과 완벽히 일치한다. 대체로 조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들은 아름다운 외모로 상대를 홀리고 그 이후엔 상대가 떠날 수 없게 계속해서 측은지심을 자극해 동정과 연민을 유발한다. 상대가 우선 외모에 반했고 선한 마음이랄까. 따뜻한 마음이랄까. 덜 냉정한 사람이라면 그들은 테레사 같은 사람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들은 일생을 테레사 같은 사람의 안위를 위해 일신을 다 바치게 된다. (소설 혹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들 아닌가) 테레사 같은 캐릭터를 두려워하고 좋아하지 않지만, 한편으로 애정한다 그 어리석음을 빙자한 영악함 그 키치 한 모습을 나도 가지고 싶다. 물론, 가지고 있겠지만 차마 상대에게 그 마수를 뻗혔을 때의 자기혐오가 더 괴롭기에 나는 깔끔하게 상대를 버린다. 가장 언급의 가치가 없는 플란츠는 매력적인 남성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그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플란츠 같은 남자는 플란츠 같은 여자 혹은 테레사 같은 여자를 만나서 사랑했다면 행복한 삶이었을 테다. 그러나 연애의 잔인한 점은 플란츠 같은 남자는 사비나 같은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는 점이다. (참고로 비슷한 다른 연애의 불행은 토마스 같은 남자는 쉽게 테레사 같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삶을 저당 잡힌다는 점이다) 그가 사랑하게 된 사비나가 원치도 않는 관계의 공개를 통해 스스로의 연애를 망친다. 그런데 이 불행한 연애는 플란츠가 자초했다. 그는 상대에 대한 깊은 고민과 공감이 없다. 그렇기에 상대는 원치도 않는 선택을 하고 결국 사비나가 그를 떠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 자처한 일이다. 이후 그의 일련의 선택과 죽음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그 답다. 진심을 궁금해하지 않고 게으른 사고를 하며 본인에 대한 고민도 상대에 대한 고민도 없는 어리석은 남자의 표본. 테레사와 플란츠가 한눈에 반하고 연애를 하게 되었다면? 토마스와 사비나가 비밀스러운 연인관계를 유지했다면, 그 이야기들은 소설이 되지 못했겠지. 테레사와 플란츠커플을 상상해 본다. 그들은 안정적인 연애를 유지할 테다. 플란츠의 자기중심적인 사랑표현이 애정결핍의 테레사에게는 적절하다. 그러나 그런 밋밋한 연애라는 건 금방 싫증 나기 마련이다. 사비나와 토마스가 계속해서 비밀스러운 연인으로 남았다면, 그들은 좋은 친구이자 연인으로 긴긴 연애를 했겠지. 확정되지 않은 관계의 불안과 은밀함이 그들의 관계의 긴장감을 유지해 서로에게 싫증 나지 않게 했을 거라 생각한다. 테레사의 토마스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토마스의 그 끊임없는 바람으로 인해 더더욱 불타오르고 유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소유욕만큼 끊임없는 욕망이 있을까. (물론 테레사는 그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소유욕으로 인한 괴로움으로 그를 떠날 결심을 했지만, 과연 그거 진짜였어?라고 의심되었고 마지막 그녀의 고백에서 역시, 그녀는 그저 그의 애정으로 포장된 순종을 시험해 본 거라고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끝에 토마스와 테레사의 모습은 가장 슬픈 연애의 결말이었다. 소진되고 늙어버린 연애의 끝은 그렇게 슬픔만이 가득 차게 되는구나라는 감각이었다. 그저 곁에만 있는 과거의 연인들 그리고 변해버린 그 감정과 감각들은 무시하고 익숙함과 편안함으로 유지되는 관계 모습이었다. 내 안에서 그것은 가장 슬픈 연애의 끝이다. 차라리 그들은 진즉 헤어져 서로를 그리워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랑에는 일말의 동정을 하게 되었을 텐데. 이 소설은 이런 애정관계를 줄거리로 가지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 작가의 철학과 질문 또한 멋지다. 그 질문들에 대한 이야기로도 아마 전혀 다른 방향의 서평이 완성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즉, 여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철학적 담론들은 아직 내 안에 정리되지 않은 사항이기에 천천히 생각을 발전시키고 그 이후 느긋이 적어볼 생각이다. 다시 읽어도 역시 좋았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내용이 눈에 보인다는 게 이런 의미일까. 하고 생각하며 읽었다. 곧 다시 읽어야지 하고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책을 이번 기회에 깊게 다시 읽을 수 있어서 책을 읽은 3주간 무척 행복했다. 내 머릿속의 일정 부분이 늘 토마스와 테레사 그리고 사비나, 플란츠로 할애되어 있었다.

기타

독서 마니또

문득 생각나서 이런 프로그램을 읽는 사람에서 기획해준다면 좋겠다 싶네요. ㅎㅎ(일이 늘어나는 것일라나요 ㅎ..)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과 해도 되겠지만 잘 모르는 분들과 읽은 책에 대해 서로 편지 전달하고 또 책을 추천해주기도 하고 그런 독서 펜팔 같은 게 있으면 뭔가 재밌고 의미있는 활동 같겠다 싶어요. 상대에 대해 모를 수록 오히려 이런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요 ㅎ

소전독서단

<헤르쉬트07769> - 독서후기. (스포주의)

독일의 한 작은 마을 사람들이 각종 사건들로 인해 두려움에 떠는 이야기. 4-5일 빡시게 벼락치기 하면 읽을 수 있겠거니 싶었지만 역시 호르커이 아저씨의 소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제출일자가 훌쩍 지나버렸지만 오기와 끈기로 다 읽었다. <뱅크하임 남작의 귀환> 보다는 편하게 읽혔으나 약간의 차이 일 뿐, 등장인물들의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쏟아내는 특유의 필체는 나를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작은 마을에서는, 주인공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수시로 불안해 한다. 동네의 낙서 테러부터 시작해서 늑대의 출몰이나 주유소의 폭발같은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나 규칙은 거의 아무도 모른다. 그저 자신들이 그동안 믿고 있었던 신념이나 규칙들로 어떻게든 그 사건들이 발생한 이유를 어림짐작하며 멋대로 해석하고 각자 결론들을 내리지만, 사실 사건이 일어난 특별한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마을 사람들이 자기 삶 앞에 펼쳐진 이상한 일들이 너무 불안해서 어찌 할 바를 몰라, 어떻게든 자기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어 불안감을 잠재우려고 발버둥 치는 것일 뿐이다. 마을의 문제아들, 과학자, 모범시민, 경찰 모두 각자의 논리로 가설을 세워 눈 앞에 벌어진 일들을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이 애써 머리를 굴려 만든 가설들은 전혀 들어맞지 않고, 세상은 여전히 혼돈과 미지의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주인공은 소설 초반부터 양자역학의 모호함에 자기 멋대로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총리에게 편지까지 보내는데, 주변 사람들은 주인공을 보며 한심하다거나, 가엾다거나 평가를 내리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또한 막연하고 근거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해할 수 없는 인생의 모호함에 마을사람들이 느끼는 근거없고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엄청난 분량으로 빽빽하게 전부 적어 놓은 것이 바로 이 소설. 나 또한 어떻게 흘러갈 지 전혀 감도 안잡히는 인생을 마주할 때 엄청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으로, 참으로 답답하고 괴롭게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를 읽으며 거울치료를 받게 되었다.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온갖 고민 중에 분명 독자들의 고민 하나쯤은 겹칠 것 같다. 그러나 고민은 그걸로 끝, 우연과 우연에, 오해와 편견까지 겹친 사건들로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인생 앞에서 대책, 고민, 해석, 좌절, 공포, 분노 다 부질없구나… 답없는 인생 좀 더 막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모두 포기하고 해탈하면 참된 기쁨이 찾아온다던가 하는 아름다운 메세지는 전혀 없다. 세상은 종잡을 수 없고, 우리는 있었다가 없어질 뿐이고, 인생의 흐름은 대체로 비극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독자들에게 넘긴 듯 하다.

이달의 소설

[읽는사람 x 다산책방]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편집자와의 대화

안녕하세요, '읽는사람' 여러분! 읽는사람 운영자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신작,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잘 읽으셨나요? 한 권의 책이 편집자의 손을 떠나 독자의 마음속에 안착하기까지, 그 과정에는 수많은 고민과 문장들이 있습니다. 이번 작품을 애정하는 분들, 그리고 줄리언 반스라는 거장의 세계를 탐험 중인 여러분을 위해 특별한 〈편집자와의 대화〉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줄리언 반스는 자신의 (문학적) 부고를 본인이 기사에서 확인하는 것이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하며 은퇴를 선언했는데요. 작가가 선언한 마지막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독자님들께서 느낀 '정리' 혹은 '마지막 인사'가 어떻게 다가갔나요? 책을 읽으며 와닿았던 문장, 마지막 장을 덮으며 느꼈던 감상, 혹은 작품을 만든 편집자에게 묻고 싶었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무엇이든 좋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을 함께 나눠도 좋고요! (저는 작가 특유의 유머가 제 취향과 맞아서 낄낄거리며 읽었어요. ㅎㅎ) 정답을 찾는 시간이 아닌, 각자의 감상을 나누며 작품의 의미를 확장해 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남겨주신 소중한 댓글에는 이벤트 종료 후 편집자가 직접 답글로 대화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 참여 기간: 2/26(목) ~ 3/2(월) * 참여 방법: 본 게시글에 작품에 대한 생각이나 편집자에게 궁금한 점을 댓글로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 참여 기간이 종료된 후, 순차적으로 편집자가 답글로 대화를 이어갑니다. * 베스트 댓글을 남겨주신 3분께는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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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사람의 질문 | 최근 가장 좋았던 책은?

안녕하세요, 읽는사람 여러분! 앞으로 읽는생활에서 읽는사람에게 질문을 하고, 그 답변을 모아, 「월간 읽는사람」에서 함께 소개해 보려 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첫 번째 질문입니다. 최근 읽었던 책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은 무엇인가요? (모든 장르 포함 / 이달의 소설, 이달의 고전 제외) 작품명과 함께, 관련된 생각과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세요. (최소 200자) 보내주신 답변을 최대한 담아 「월간 읽는사람」 Vol.21(3월 발간)에 소개합니다. - 기한: ~2/28(토) - 게재: 「월간 읽는사람」 Vol.21호 - 주제: 최근 읽었던 책 중 가장 좋았던 작품 & 자세한 이유 (최소 2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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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 엘리자베스

부럽다! 엘리자베스 처음부터 편견을 가득 품고 읽을 수밖에 없는 책 ‘오만과 편견’ 이미 많은 매체들을 통해 스토리는 알고 있었다. 오만 가득한 다아시라는 ‘재수’가 결국 편견으로 가득했던 나의 왕자님이 되는 스토리. 모든 로맨스 소설의 원류라고 일컬어지는 이야기이다. 서로를 오해하고 편견으로 미워하다가 결국 좋아하는 감정이 싹트고 결국 사랑하게 되는 결론. 심지어 남자 주인공은 왕자님. 이 소설은 읽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가지고 있는 책의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실패했었다. 그래도 내용은 알아야지 라는 생각에 영화로도 접했고 오래전에 방영된 BBC의 드라마까지 찾아두었다. 심지어 드라마는 좋아하는 배우 콜린퍼스가 다아시 역을 맡는다. (참고로 콜린퍼스는 이 역할로 영국에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니, 눈에 하트가 그려진다.) 하지만 긴 호흡의 드라마는 못 보는 타입이라 드라마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읽기 전부터 여자 주인공은 키이라 나이틀리(영화 속 여 주인공) 남자 주인공은 콜린퍼스로 지정되었다. 소설원작의 영화나 드라마를 본 이후 책을 읽을 때의 단점은 이미 시각화된 이미지가 머릿속에 들어있어 자유로운 상상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번역이 안 좋은 이런 소설을 읽을 때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다아시에 콜린퍼스를 앉혀놓고 읽으니 그 오만 마저도 사랑스럽기만 했다. 소설의 배경이 18세기이니, 왜 이래? 하고 배경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의 재산이 딸에게 상속되지 못한다는 충격. 결국 베넷가의 어머니가 그토록 천박하게 딸들의 결혼에 목매는 이유는 재산이 상속되지 못해 그녀들이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거 아니겠는가.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베넷부인을 품위 없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녀가 전혀 천박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행동이나 말이 가벼운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런 사람은 세상에 널렸다. 그녀는 자신의 딸들의 행복한 미래만이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였다. 물론 그런 목표를 가지고도 고고한 품성의 사람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런 귀엽고 생각이 말과 행동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람도 나쁘지 않다. 혹으로 꿍꿍이를 가지고 음흉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더욱 천박하다 사실 모든 인간의 내면이 베넷여사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다들 세간의 평가를 고려해 조심하며 사는 거지. 두 번째로 소설을 읽으며 18세기 귀족들은 좋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딱히 노동하지 않아도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여행을 다니고 아침이면 치장을 하고 저녁이면 무도회에 참석하거나 사람들을 초대해 시간을 갖는다. 뭐 이런, 호화로운 삶이 있어. 부럽다. 18세기에 태어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귀족으로 태어나고 싶다. 잠깐 본 드라마에서 실내에서는 파티가 진행 중인데 밖에서는 더럽고 냄새날 것 같은 사람들이 진흙길에서 이게 진짜 춤이지 라며 춤을 추었다. 아마 그들은 귀족들이 데리고 온 마차꾼이거나 하인들이었겠지. 18세기에 잘못 태어나서 신분이 미천했다면 어땠을까. 아이고. 케서린 부인은 어쩌다 보니 콜린즈와 친분이 있고 그가 결혼한 이후 신혼집에 방문해서는 갖가지 충고를 한다. 신분이 높고 콜린즈의 생계와 명예에 적잖게 영향을 끼친다는 건 알겠는데 남의 집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건 아니지 않나.라는 현대적인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당시는 작은 네트워크의 사회. 인맥과 인물평 그 외등등 소문이라는 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던 사회이니 뭐,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마지막에 엘리자베스에게 다아시의 청혼을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 (혹은 캐서린 자신을 위해) 거절하라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이 할머니 선 세게 넘네.라는 생각을 했다. 이전에 엘리자베스는 속으로는 못마땅하면서도 그냥 넘어갔다.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할머니가 뭔데 악기를 배워라 마라에요) 하지만 결국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에 대한 캐서린할머니의 충고에는 대차게 할 말을 한다. 이 부분은 꽤 통쾌했다. 그래, 캐서린도 한 번쯤은 이런 면박을 당해봐야지. 마지막에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대화에서 다아시는 본인이 신분다운 교육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오만함에 대해서는 한 번도 충고를 듣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되었다는 고백을 한다. 이 고백이 다아시의 모든 행동 중 가장 매력적이었다. 본인 스스로 이제까지 자신의 삶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걸 심지어 말로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용기는 쉬운 게 아니다. 혼자만 몰래 알고 싶은 본인의 부끄러운 부분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솔직히 이야기한다는 건 꽤 멋졌다. 다아시 만세. 나는 속물이다. 그래서 다아시 같은 왕자님이 나타나길 기다리다 결국 혼자 살고 있다. 생각이 통하는데 심지어 상상불가의 재산가인 남자가 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기다려 주고 한번 더 청혼해 준다면 앗싸. 아니, 나라면 첫 번째 청혼에서 이미 고마워서 넙죽 절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다아시는 외모도 근사하게 나온다(내 안에서 그는 콜린퍼스다) 아니, 사랑에 안 빠질 수 있겠냐는 말이다. 신분 차이로 그가 나를 눈에 들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조금 경멸하는 것 같다면 좀 소심해지고 본인의 처지가 안타깝기는 하겠지만,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데, 노 땡큐를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나는 정말 자신 없다. 당장 두 손 모으고 “네 저도요.” 할 것 같다. 다아시 내게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