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장편소설

동반자

  • 작가 김갑용
  • 발행 2026.02.26
  • 장르 일반
김갑용

김갑용

201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토성의 겨울』이 있으며, 2022년부터 소전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장편소설 『냉담』을 출간하였다. 두 번째 장편소설 『동반자』를 <월간 장편소설>에 연재 중이다.

댓글 0개

일견 혼란스럽게 하는데 이런 느낌의 소설들 한국문학에서 그간 잘 찾아보기 힘들었어서 뭔가 반갑습니다.앞으로 어떻게 진행이 될 지 궁금합니다

2026.03.24

「그만. 죽은 척 말고 눈 떠봐요.」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계속 속삭였다. 「오늘은 전염병이 끝난 뒤입니다.」 「전염병이 끝났다고요?」 「네, 우리는 마스크를 벗었어요. 또한 오늘부로……」 「오늘은 전염병이 끝난 언제입니까?」 말이 끊긴 그는 꽤 오래 말이 없었다. 참을성 없이 군 나를 침묵으로 책망하는 것일까? 잠시 후 그가 자기 말을 끊은 다른 누군가에게 고개를 젓고는 순순히 웃어 보였다.

상대를 속이기 위해 즉각적으로 입가에 지어진 그 비굴한 미소는, 훔쳐보는 나조차 가학적인 추동이 일만치 매혹적으로 애처로워 보였다. 그가 나를 잡아끌었다. 그의 앙상하고 마디진 손은 차갑게 젖어 미끄덩거렸다. 나를 힘주어 붙든 손끝에서 번져오는 아린 한기가 내 정신을 계속 깨어 있게 했다. 그가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끌려갔다.

그의 해쓱한 입술에 여태 걸려 있던 미소가 머뭇머뭇 이울었다.

밤이었다. 한 치 앞이 가늠되지 않는 암중에 그의 희묽은 하관이 둥실 떠 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어디든 불이 밝혀지지 않았거늘 그의 낯에만 부유스름한 빛무리가 져 있었다. 걸음에 흔들거리는 그 모습을 어지러이 올려다보던 중 한 의문이 나를 불안케 했다. 이 야음은 내일이 되기 전 오늘인가, 아니면 어제가 지난 후 오늘인가?

「어제와 내일 사이의 오늘이요. 어제는 끝이 났고, 내일은 오지 않았어요.」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비웃듯 덧붙였다.

「전염병은 이제 한물갔어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 이후의 사태죠.」

화가 난 것일까? 나는 그의 눈을 볼 수 없었다. 눈을 힘껏 치떠도 밤의 찬기에 훌쩍이는 콧방울까지가 한계였다. 그가 고개 숙여 나를 바라봐 주면 좋으련만. 바삐 이동하느라 그럴 경황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짐승 무리 한복판을 거쳐 나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 수 없는 의미의 우짖음이, 어쩌면 뜻이란 담기지 않은 단지 고통에 찬 신음이 어둠길에서 단속적으로 들려서였고, 만일 사람 목소리라면 이야말로 아비규환이리라는 끔찍한 예감을 하던 참에, 울음소리가 하나둘 가까워지더니 종내 우리를 에워싸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멈추면 안 돼. 계속 걸어야 해. 나는 숨죽인 채 눈으로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라면 내 눈빛만 보고도 무슨 의미인지 알 텐데. 그가 멈춰 섰다. 누가 그를 불러세워서였다.

「당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쫓아오게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의 저열함입니다.」

그 말과 함께 마침 목자가 양들을 몰아낸 듯 주위가 차츰차츰 조용해졌다. 아우성이 멀어지자, 도축장에서나 날 법한 코를 찌르는 누린내가 어둠 속에 감돌았다.

「당신은 빠져나갈 수 없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다소 후련한 어투로 그에게 말을 거는 상대는 누구지? 나는 상대를 볼 수 없었다. 나는 품속에 감춰졌다. 품이 슬며시 벌어진 틈으로, 나를 숨긴 그의 창백한 하관이, 희끄무레한 조각달같이 은은한 그 회백색 살갗만이 엿보였다. 그의 깜깜한 품속은 검불로 채워진 듯 귓가에 온통 버스럭 소리만 들렸고 아무런 온기도 내게 전하지 않았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저열함이 탄로 나는 순간 자기가 알고 보면 대단한 인간이라며 제 책을 내보이겠지요. 당신의 책으로 인해 상대와 멀어진다면 이 이야기가 곧 자신이지 않고 단지 지어낸 소설이라고 발을 뺄 테고요. 당신은 저열해요. 뿐만 아닙니다. 당신 책은 책대로 또 저열하지요.」

상대는 그를 나로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나를 미워하는 상대에게 오히려 호감을 표시하듯 예의 순순한 미소를 입가에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누구든 기분 좋게 만드는 그 미소에 상대마저도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상대는 한결 소곳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는데 여전히 나를 향한 비난뿐이었다.

「뭐예요. 설마 당신이 모두를 속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당신은 스스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소설이랍시고 써왔지요. 무엇이든 본문에서 먼저 받아들여지기만 하면 글 밖의 당신 삶에서도 수용되리라고 믿는 것처럼요. 당신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글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런 당신이, 발생하고 있는 미래에 관해 쓰겠다고요? 소설에 미래를 반영해 보겠다고요? 당신이 왜 그런 망집을 버리지 못하는지 압니다. 당신은 도래하는 매분 매초가 미치도록 무섭거든요. 그래서 글에서라도 미래를 아는 체해야 조금 견딜 만해지는 거예요. 당신이 아는 오직 하나는 미래가 당신에게만은 현시하지 않는다는 항구적 진리입니다. 쓺으로써 자기 자신을 미래에 편입시키려 발버둥 친다는 걸 누구든 모를 줄 알았어요? 당신은 음모론자에 지나지 않아요.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더라면 사이비 교주도 가능했겠으나 그만한 능력도 매력도 없지요. 거기에다 아주 어정쩡한 양심을 지녀서 누구를 잠시간은 속일지는 몰라도 상대가 속은 걸 평생 깨닫지 못하도록 지속하여 농간하지는 못해요. 그게 당신이 여느 사기꾼보다 낫다는 증거는 물론 아닙니다. 남을 속이는 데에도 열과 성을 다하지 않는다는 방증일 뿐이죠.」

그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가 숨은 품속이 서걱대는 소리를 내면서 흔들거렸다. 그가 은연중 몸서리친 것이다.

나는 동요 없이 차가웠다. 오늘은 언제고 예감한 바로 그날이리라. 내가 글 속에 은폐했으나 나조차도 정체를 다 알지는 못하던 것들이 모두에게 낱낱이 밝혀졌을 테다. 그간 왜 그들이 진작에 색출하지 못했는지 도리어 의아해하지 않았던가. 그날을 기다려 마지않으며 매일 머릿속에서 작성하고 한 치 틀림없도록 끝없이 고쳐 오던 목록을 이제 펼쳐 볼 시간으로, 나는 그들이 제기한 혐의에서 혹여 누락한 죄목이나 부당한 억측, 던적스러운 무고가 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대조해 볼 것이다. 머릿속 가상의 목록일지언정 거기 적힌 모든 것의 출처는 다름 아니라 내 책이다. 종이를 빗돌 삼아 나의 본심과 일기를 영구히 새긴 셈이다. 이를 모두 적는 데는 책 한 권 분량이 족히 필요했다. 그 내용에는 내가 남몰래 품어 온 불가역적인 반감, 그악스러운 복수심, 재앙에의 염원은 물론이요, 나의 배덕한 사생활과 부박하기 짝이 없는 기망 행위들 또한 빠짐없이 진술되어 있다.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중죄지만 가장 극악한 대죄는 내가 문학이라는 암호 체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폐부를 책 본문에 은닉했다는 혐의 자체다. 그런데 내가 그것들을 진정 숨겼나? 단지 과거 그들이 발견하기를 게을리한 건 아니었는가.

「하지만 책에 적힌 건 이제는 나와 상관없어.」

그렇게 나직이 중얼거리자마자 내 안에서 눅진한 기운이 아래로 비어져 나와 그의 품을 적셨다. 나는 급격히 메마르고 쇠진했다. 그의 차갑게 젖은 손이 뒤늦게 품을 비집고 들어왔다. 품 바깥에서 상대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아득했다. 더는 주절대지 못하도록 입을 막을 줄 알았던 그 손은 잠시 머뭇대다가 내 빠진 밑을 받쳐 틀어막았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얼음장 같은 한기가 정신을 잃어 가던 나를 퍼뜩 깨웠다. 점차 커지고 분명해지는 목소리로 상대가 내 말에 반박하고 있었다.

「상관없다니. 당신은 언제나 자신과 책을 밀접하게 관련지었잖아요. 자기 책을 통해서가 아니면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조차 거부했으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오로지 책을 통해서만 그쪽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숫제 당신은 책을 제하면 그 존재가 지극히 미미한, 오로지 소설에 비추어야만 겨우 한 사람분 몫을 다하는 인간이 아닙니까?」

그도, 나도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품속의 그것은 무엇입니까?」 상대가 다소 누그러진 체하는 목소리로 그를 떠보았다. 「회중시계요. 고장 났어요.」 누가 목이 찢어지도록 지른 고성이 저 멀리 메아리쳤다. 사위가 잠잠해지고 나서 상대가 한 번 더 그에게 주지시켰다. 「당신의 책은 당신이 살아온 궤적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나의 소설은 내 삶을 무릅쓰고 존재했다. 살아온 지난날은 훗날 쓰일 글에 앞선 시행착오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 좌절했던 것과 달리 책은 온전히 하나 된 가능성이었다. 상대의 발언은 나뿐 아니라 그에게도 부당한 모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침묵하기만 했다. 그의 삶은 나의 소설과 관계없이 존재했다. 그는 연루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은연중에 그를 끌어들이지 않았다고 엄밀히 단언할 수 있을까?

그가 다시 걸음을 뗐다. 상대의 걸음 소리가 느긋이 뒤따랐다. 어째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품속의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여럿이 뒤엉켜 악써대는 아우성이 우리 바로 앞을 가로막았다가 마치 사람들이 끝없이 추락하면서 내는 비명처럼 찰나에 아득해졌다. 그렇게 구렁 깊숙이 빠져 금세 조그매진 그 새된 불협화음은 도로 방향을 거슬러 올라와 다시금 우리에게 요란스레 곤두박질쳤다. 그러고는 푹 꺼져버렸다. 그들은 사냥감을 치고 빠지며 희롱하는 맹수 같기도, 우리에게 차마 닿지 못하고 애처로이 맴도는 망령 같기도 했다. 소리가 또다시 낭떠러지 아래로 투신하여 아득해졌을 때 그가 남몰래 내게로 고개 숙였다. 품속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천창처럼 높은 곳에 벌어진 틈새 너머 그의 회백색 살갗뿐이었다. 거기 한가운데 외눈처럼 유일하게 자리한 핏기 없는 입술이 불쑥 검게 열리면서 미지의 계시를 속삭였다.

「숨을 멈추고, 말하지도 마. 속으로 수를 세는 거야. 1부터 하나씩 더하여 셀 수 있는 가장 큰 수까지. 그다음 처음으로 돌아와 다시 헤아려야 해. 반드시 전보다 더 큰 수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돼. 그렇게 멈추지 않고 매번 더 큰 수를 갱신할수록 너는 살게 되는 거야.」

그것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다. 내가 세는 데 정신이 팔리면 이 순간을 잠자코 견디게 되리라고 예상했을까? 어쨌거나 그는 내가 기척을 드러내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기력을 아끼려면 그러는 게 나을 터기는 했다.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자명했다. 죽어감에도 내 정신은 흐려지지 않았고 반대로 죽음이라는 현상이 그러하듯 명료했다. 내 맑은 생각에 비추어 보건대 그는 지금을 타개해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내던져 버린 채 줄행랑치지 않고서는 어떤 시도든 불가능하다. 수줍은 그는 상대에게 자신을 가만히 두라고 요구할 줄도 모른다. 그가 요구할 수 있는 대상은 나뿐이며, 실제로 나만이 그의 지시를 이행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만큼은 잠자코 속으로 수나 세며 허송세월할 마음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했다. 그러자 내가 셀 수 있는 가장 큰 수가 얼마나 작은지를 깨달았다. 나는 다시 1로 돌아와 처음부터 세어 나갔고 방금보다도 더 작은 수에서 셈을 중단해야 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죽었으며, 현재의 명료성은 내 정신이 아니라 죽음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얼마 안 있어 내 머릿속에는 세 자연수만이 남았다. 하나. 둘. 셋. 이것이 지금 내가 셀 수 있는 최대한의 수, 머릿속에서 한없이 맴도는 세 구간이다.

하나. 아우성이 환호하듯 일제히 높아졌다. 소리로 유추하건대 이제 그들은 숨바꼭질을 멈추고 개선 행렬을 맞이하는 군중처럼 우리 양옆에 늘어서 기대에 차 부르짖어 댔다. 나나 그를 향한 함성일 리는 없었다. 나는 군중을 향해 손을 추켜세우는 개선장군도, 그 손에 들린 전리품도 아니었다. 그들은 기다렸지만, 나를 고대한 건 아니었고, 단지 기다림이, 그리고 기다리는 그들이 무대 위에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품속에 감춰져 그들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들 또한 내게 보이지 않았다. 밖을 내다보는 것을 그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안대를 쓴 관객이었다. 마치 소설가라는 미명 하에 스스로의 근시안적 판단을 용인하던 예전에의 은유 같았다. 눈이 가려진 채로 내게 보이는 것만을 썼었지. 그들의 기다림이 끝나 가는 모양이었다. 소요가 차차 사그라드는 한편 깊고 낮은 탄식이 장중한 진혼곡같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둘. 나는 남몰래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점토로 빚은 듯 파리하고도 물러 보이는 턱과 입술을 가진 그는 누구지? 마치 죽음처럼 낯선 하관이었다. 나의 오랜 동반자임은 간명했는데, 어젯밤 낯익고 생생하던 타인이 내가 잠든 새 생전 본 적 없는 형상으로 차갑게 굳어 버릴 수도 있다고 이따금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내 탄식이 잦아들었다. 냉랭한 밤바람이 휭휭 소리를 내는 가운데 그와 상대가 자박거리는 걸음 소리가 적요하게 울려 퍼졌다. 이제부터 기다림이란 허용되지 않고 오로지 끝에 당도할 때까지 걸어야만 하는 곧은 길만이 용납된 듯한 고요였다. 그가 멈춰 섰다. 뒤따르던 상대의 걸음이 우리를 추월했다가 곧 따라 멈추었다. 상대가 발을 흙바닥에 끌며 걸음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뒤돌아서서 그를 주시하는 것일 터였다. 싸리비로 땅바닥을 쓸 때처럼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주저하고 두려워하는지도 몰랐다. 나를 버리고 도망쳐. 그가 내 눈을 본다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나의 은신처였다. 그 자신은 나를 두고서는 어디로도 떠나거나 숨을 수 없었다. 내 원과 관계없이, 그는 나의 시선이 멎는 곳에 붙박여 있어야 했다. 바람결에 그의 품이 조금씩 열리면서 안개같이 희읍스름한 빛이 내가 있는 속으로 새어 들어왔다. 미광으로 드러난 그의 속은 노르무레했다. 그것이 내게 안도와 슬픔을 선사했는데, 기억나지 않는 연유에서였다. 기다림을 상실하자 기억마저 부재한 것일까? 그와 나 사이에 어떤 구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슨 관계지? 함께라는 현상만 현전할 뿐 실체는 망각된 지 오래인 사이……. 아마 단지 장애물에 가로막힌 거였나. 이윽고 그가 조금 비칠거리며 방향을 옆으로 틀고 다시 걸음을 뗐다. 이번에는 상대의 발소리가 우리를 앞장섰다. 첫길이었다.

셋. 아마 그 길은 우리를 위해 닦인 행로였다. 고요 속으로 사라졌던 모두가 대번 통곡하기 시작한 것이다. 애도의 울음소리가 굽이굽이 너울졌다. 생전에 들을 수 없는, 나를 향한 곡소리였다. 달콤한 웃음이 치밀었다. 나의 죽음이 비참을 홀로 견디다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묘한 승리감마저 들었다. 죽음 속에서 나는 깨어 있었고, 울음바다 가운데 나의 장송 행진이 거행되고 있었다. 한동안 상여가 기우뚱거렸다. 서서히,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구토증이 일었다. 미지의 향심력에 속의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빠진 밑으로 쏠렸다. 어쩌면 선두에 선 상대가 끝없이 그리는 원을 따라 그 또한 어지러이 걷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밑을 차갑게 받치던 그의 손이 더는 틀어막기 역부족이었는지 품속에서 나를 통째로 뒤집어 들었다. 그러느라 품이 잠시 크게 벌어져 바깥의 검은 허공이 내 뒤집힌 시야로 드러났다. 심연에 내던져졌다는 아찔한 착각이 잠깐 일었다. 그때 홀연 흰색 휘장이 펄럭이며 검은 하늘을 유영하는 게 보였다. 그것은 백지장 같은 몸을 나부끼며 망망한 심해로 침잠하는 원해어처럼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정체와 연유를 모를 흰 장막은 깃대에서 떨어져 나간 백기처럼 자유로이 날아 내가 목도할 수 없는 저 밑바닥으로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은 진정 꿈꾸던 죽음이었다. 내가 잃어버린 죽음이었다. 낯에 달린 구멍들로 끈적한 체액들이 천천히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의 손이 나를 원상태로 세워 들면서 품이 도로 닫혔다. 상대의 발소리가 멎었다. 우리는 멈추었다.

셋보다 더 큰 수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세어 나가야만 했다.

「단을 오르세요.」

상대가 요령잡이라도 되는 듯 우리는 그 지시에 순복해야만 하는 것일까? 잠자코 그가 걸음을 옮겼고, 뒤이어 상대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느릿느릿 층계를 한 단 한 단 올라서는 순간마다 품속의 내가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이제 곡소리는 아래서 들려왔다. 뒤로는 상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를 재우쳐 댔다.

「당신은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이 어려워하기를 원하지요? 별 볼 일 없는 작자가 이런 대단하고도 깊은 생각을 품고 있다고 여기기를 바라지요? 당신을 추앙하기를? 아니면 반대로, 꺼림칙하게 여기며 피하기를? 이 책을 읽는 저간에는 잠시나마 그럴지도 모르죠. 본문이 타인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다면요. 하지만 책 한 권 독파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어요? 다 읽고 난 뒤 몇 날만 지나도 사람들은 당신을 잊을 거예요. 당신이 독자로서 그래왔듯이요. 그래요. 작품은 잊히고, 그보다도 존재감이 희미한 작가는 말할 것도 없죠.」

분이 안 풀린 상대가 헐떡이면서 소리쳤다.

「그 순진성! 글 뒤편에서 무위도식하는 작가의 가증스러움!」

그는 아무 반응 없었다.

그래. 맞아. 나라도 그렇게 답해야 했겠지만, 수를 세느라 그럴 수 없었다. 셋까지 연상하기에도 벅찰 만큼 머릿속이 산란했다. 사고가 해체되어 간다는 건 내가 죽음 뒤의 소멸에 가까워졌다는 징후일 수도 있었다. 한데 어째서 정신이 흐릿해지는 그 과정이 한편으로는 명징하게 인식되는 것일까? 나는 꺼져가는 의식을 판단하는 의식 그 자체로 무심히 존재했다. 어쩌면 죽지 않았고, 그가 나를 받치고 내가 수를 반복하여 세면서 이루는 모종의 항상성으로 남몰래 연명했다. 나는 인식자로서 새로이 소여된 자아였다.

수를 세던 기존의 의식은 혼미해지다 못해 곧 소멸했다. 세 자연수는 이제 무의식 기저에 갇혀 스스로 돌림노래처럼 맴돌면서 나를 유지하는 셈을 이어 갔다.

「그래. 맞아.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야.」 나는 뒤늦게 상대의 말에 대답했다. 말한다고 해서 더는 쇠약해지지 않았다. 마치 육신이 지던 멍에를 벗어나 자유로이 성찰하는 목소리가 된 듯했다. 기쁨에 겨워 눈을 치뜨고 품 밖을 올려다보았다. 내 감정이 그에게 전달되었기를 바랐다.

그의 입이 살포시 웃었다. 그 웃음은 미소로 드러낸 그의 두려움, 공포에 떠는 그 자신이었다.

상대는 여전히 내 목소리를 그가 내는 것으로, 동시에 그를 나로 아는 듯했다. 「그럴 리가요. 당신은 항상 사람들을 속이는 게 천직인 것처럼 굴었지요.」 그랬지. 또한 술수 속에서도 어떤 진정성을, 믿음을 선사하려고 했다. 그 또한 눈속임이었겠지만. 「이제 더는 작가가 아니야.」 내가 대꾸했다. 그걸로 말을 끝내야 했으나 입이 트임으로써 생겨난 희락으로 주절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앞으로 쓰일 글에 불과해. 아직 글이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쓰이기로 정해진.」 내 오만한 주장에 상대가 할 말을 잃은 건지 품 밖으로 잠시 정적이 깔렸다. 나로서는 보이지 않는 상대가 내 불호령에 썩 물러난 것처럼 기분이 우쭐했다. 실상 내 말은 다름 아닌 나에게 깊은 강박을 심기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글을 써야 한다. 어찌하여 그는 집에 가지 않고 나를 품은 채로 암중을 헤매는 거지? 미루어보건대 지금은 정전 사태야. 집에는 내가 교정을 보던 붉은 펜이 하나 있고, 그것으로 쓰면 돼. 작도기 없이 더할 나위 없는 원을 그려야 해. 무한한 파문처럼 한없이 생성되면서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동심원을. 한데 다른 한편으로는 살면서 겪어 마땅한 사건들을 골방에서 글을 쓰느라 놓칠지 몰라 평소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내가 쓸 수 있는 사건이 없게 될 거라고 말이야.

「이상하군요. 말로는 아니라지만 당신 속에는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작가가 있는 것만 같아요.」 그를 떠보는 상대의 목소리에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자의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그러면 어때서? 그 작가는 쓸모를 다하면 사라질 거야.」 

내 항변을 두고 상대가 맑게 웃는 소리만이 적적하게 울렸다. 어느 틈에 곡소리가 멎었고 우리는 단을 모두 올라 아마도 단상 위에 서 있었다.

「당신의 직업은 생에 앞서지 않습니다. 반대로 생의 그림자와 다름없습니다. 그림자는 제 주인을 앞서지 않는 것이 순리입니다.」

상대의 발언은 앞서 내가 주절댄 궤변에의 논박이자, 나에게 언도된 결과에 대한 규범적 근거이며, 나의 죄와 벌을 공회에 통고하는 포고문의 서두였다.

군중의 침묵이 주시하는 가운데 서 있는 게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형벌인 걸까? 꽤 많은 층계를 올랐으니, 우리가 선 단상은 드높고 트여 있을 것이다. 전보다 바람이 거셌다. 어느 잔칫집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고기 탄내가 강풍에 실려 왔다. 기이하게도 아무런 허기가 일지 않았다. 그가 나를 잘 먹인 건지, 음식을 향한 갈망마저 잊힌 건지 모를 일이다. 나는 내 모습을, 피골이 상접했을지 알 리 없는 그 몰골을 볼 수 없었다. 반면 품이 벌어진 틈새로 비치는 그의 핏기 가신 하관, 살집 없이 버석거리고 노르무레하게 뜬 품…… 그는 기아 상태일 터였다. 그에게는 사람의 온기가 없었다. 바람결에 그의 품이 펄럭일 때마다, 서광으로 짐작되는 어렴풋한 빛이 들락거렸다. 나는 그의 노르께한 속이 빛에 희롱당하여 풍전의 등화처럼 분란히 일렁거리는 것을 한참 속절없이 응시했다.

그러던 중 한 기억이 잉걸불처럼 일었다. 그것은 기억이 아닐 수도, 섬망일 수도 있었다. 의식 저편에서 미미하게 깜박이던 촉광은 이내 광체같이 자력으로 떠올라 하나의 광경으로 현격히 번져 나갔다. 나는 휘영청한 불빛에 가뭇없이 삼켜졌다. 그리하여 화광의 일부로 표변했으나 금세 큰불로부터 도로 떨어져 나왔다. 바깥은 옮겨붙을 홰 없고 달이 부재한 겨울밤이었다. 나는 제 몸을 연소해 가며 보잘것없는 불티로 전락하도록 암중모색을 거듭한 끝에 거리의 한 상이군인이 입은 옛 장교복에 깃들었다. 짤막한 망토가 달린 푸른색 외투로, 상이군인이 추썩일 때마다 언뜻언뜻 내비치는 모직 안감에 깃든 샛노란 색이 바로 나였다. 풍광 너머에서 그가 홀린 눈으로 외투의 안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계가 째깍대듯 내 무의식이 세 자연수를 반복해서 셈하는 게 전해졌다.

온기 어려 보이는 구석이라고는 내가 노랗게 밝힌 장교복 안감뿐인 밤중이었다. 상이군인은 선 채로 발이 굳은 듯 가만히 음영에 잠겨 있었고, 이대로 망부석처럼 굴다간 얼어 죽기 십상일 터였다. 내 의식에 덧씌워진 이 장면이 어느 기억에서 비롯되었을지 그려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와 내가 함께 관람한 전시회나 영화관 벽에 걸린 작품 속 한 정경이였으리라. 정말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그가 나를 그리 진실하게 본 적이 없었다. 나를 향해 그가 품은 흉금을 나는 훔쳐볼 수 없었다. 한데 지금 나를 들여다보는 시선은 내가 명증하게 파악하고자 했던 그의 내면 자체였다. 그 시선에는 아무런 숨김이 없었다. 나는 그가 비밀을 만들 필요가 없는 사물, 작품이었다. 마치 겨울날 창밖의 고아가 따스한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는 내가 깃든 색의 온기에 매료되었다. 그가 자신의 내향성에도 불구하고 시인성이 강한 색에 외경심을 품은 까닭은 나로서는 짐작하기 힘든 부분이다. 겪어보지 못한 옛 시대에의 향수일까? 그가 지닌 볼품없이 빛바랜 노란 속 또한 스스로의 원대로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명상에서 깨어나듯 천연스레, 나는 나 자신으로, 그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아까 그의 내면으로 통하는 눈길이 내게 닿았을 때 밀려왔던 느꺼운 감정마저 빈자리로 남았다. 「이 소설은 아직 쓰이지 않았어.」 여태껏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투의 말이 불현듯 내게서 비어 나왔지만, 누구도 그 말을 듣지 못했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바람이 멎고 품이 닫혔다. 불빛의 사념은 끝이 났다. 새삼 침침한 누옥에 유폐되었다는 고독감이 찾아왔다. 아무도 없이 나 홀로. 내가 그 존재를 확실히 인식한다고 믿어 온 그도, 상대도 바깥에 있었다. 지금의 소동이 내게 무심한 군중을 기만하고자 스스로를 볼모 삼아서 벌이는 마지막 발버둥 같았다. 그렇다면 처절한 실패였다. 관중들은 침묵했다. 정녕 그들이 구경하기는 했나? 부지불식간부터 상대가 나라는 소설가에 대하여 강력히 성토 중이었다. 그 소리 말고는 기이할 만치 정적이었다.

「……당신 글은 할 말을 잃게 만들어요. 독자의 개입을 완강히 거부하지요. 자기 글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자신 뿐이라는 것처럼요. 평론가나 다른 작가, 편집자에게도 그렇습니다. 누가 당신 책의 처음과 끝에 부연을 덧붙이겠어요? 그것은 당신 글이 닫혀 있다는 뜻입니다. 결단코 열리지 않아요. 본문 내부로 통하는 문을 누구에게도 열어 주지 않고서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며 절망하고 또 안도하겠죠. 닫혀 있다고 설마 모를까요? 문 너머란 당신의 텅 빈 마음속입니다. 당신이 속이 비었다고 멸시하는 단어들이 있지요? 영혼이라느니 사랑이라느니. 당신은 자기 내면이 속 빈 강정이라는 걸 여지없이 드러내는 그런 단어들을 혐오하지요. 그러면서 어떨 때는 편의적으로 이용해 왔어요. 정녕 어떠한 술수도 없이 진실한 장을 형성할 수는 없는 겁니까? 창조성이라고는 부재하여 유적지에서 훔친 돌들로 전대 양식을 모방한 탑이나 쌓는 자에게 무리한 요구일지도요. 당신 본문이 설핏 지니는 모든 문양은 과거에의 표절이며, 이미 파훼되어 폐기된 옛 교훈에 불과합니다. 나는 당신을 잘 아는 상대입니다. 당신이 특정한 공동체를 향한 적개심 없이는, 복수를 계획하지 않고서는 한 자도 적어 내려가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압니다. 자기 이름 건 책을 내면서 한편으로는 무명씨처럼 구는 이유도요. 누가 당신에게 적개심을 품고 복수할까 봐 두려워서지요. 당신은 모릅니다. 당신은 자기 이름 덕에 살았고 이름 탓으로 이 지경인 거예요. 나는 당신의 적입니다. 그렇지만 나를 배제하고 오직 당신 책에 쓰인 소여만을 문자적으로 열거할 따름입니다.」 

침묵이 펼쳐진 가운데 말들이 공허하게 웅웅거렸다. 상대가 언표하는 바가 언외에 있는 듯 말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말들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적확히 짚어내기에 반대로 나를 홍보하는 것만 같은 천박한 문구들이었다. 상대도 뒤늦게 이를 깨닫고 이어 갈 여지를 잃었는지 조용해졌다. 상대는 낭패의 수렁에 빠졌다. 어쩌다가 아무런 대책 없이 그와 나를 조리돌리고자 단상에까지 올랐는가? 상대의 언행은 선고가 아니었다. 최후통첩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이미 집행되었을 것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것을 모두 빼앗겼음을, 하물며 의식과 고통스럽게 달라붙어 있어야 할 몸뚱어리마저 떨어져 나갔음을 확신 어린 체념으로 견뎌 내고 있었다. 내게는 그밖에 없었다. 상대는 그를 간과했다. 어쩌면 내게 나는 없고 그만이 있었다. 상대가 군중에게 아직 벌해지지 않았음을 고발해야 하는 죄목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정말 내 동반자가 맞기는 한가? 항시 의심하지 않았던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와 죽음 끝까지 함께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인간이 잃어버리고 끝끝내 되찾지 못한 수많은 무위의 신화 중 하나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모든 수가 막힌 상대에게 무도한 범의가 느껴졌던 것일까? 상대의 걸음 소리가 퍼뜩 가까이 다가온 순간 그가 나를 믿기지 않는 완력으로 붙안았다. 깜깜하고 검불덤불 얼크러진 품속 세계가 나를 숨 막히도록 짓눌렀다. 제한된 감각은 마치 내가 어두운 구석에서 저 자신을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존재를 구겨 버리고 있다는 것을 경악하며 깨달은 듯한 공포심을 자아냈다. 웃음소리가 귓속말같이 지척에서 들렸다. 그것은 그가 웃으면서 내는 숨소리였다. 더없이 그와 밀착된 지금, 웃는지 흐느끼는지 모를 발작적인 숨소리가 내 내면에서 비롯된 것처럼 아주 가까이 들렸다. 내가 보지 않는 새에 그는 아무 말 없이 상대를 향해 계속 웃고만 있었다.

상대는 분노를 속에서 태워 가며 그의 웃음기를 없앨 회심의 일격을 가하고자 앙버틴 것이다.

「소설은 정해진 진리가 없다고 당신이 말했었지요. 단지 개별적인 사례들만이 있다고요. 맞아요. 모든 소설은 각각의 임상입니다. 그러한데 아무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거부하고 있어요. 임상에 의거하지도 않고요. 우리는 진단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임상에 임해야 합니다. 임상적으로 소설을 대해야 합니다. 당신은 자기 말이 자폐나 다름없이 아무도 못 알아듣는 읊조림일까 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실은 발화의 주체조차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그저 제 기질에 따라 입속말을 주체 못하는 데 불과한지 의심했잖습니까? 당신의 온 생이 저 하나 존재밖에 모르는 깜깜한 진공을 헤매는 데 지나지 않고 그동안 있어 왔던 모든 외부와의 접촉이 그저 착란이었는지 회의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의구심이 맞습니다. 당신은 환자예요. 나아가 질병으로 인한 증상과 예후 그 자체입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진단하기 두려워하였지요. 그럼에도 다른 누구에게가 아닌 자기에게 먼저 임상의가 되어야 했습니다.」

살가죽을 호되게 때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얻어맞은 뺨 반대쪽으로 기울어져 쓰러지면서, 나는 품 밖으로 내팽개쳐졌다. 진회색 혼응토 바닥에 널브러진 그가, 그의 하관이, 고통스러운 듯 혹은 희열에 찬 듯 일그러진 입이 보였다. 검푸르게 부은 한쪽 뺨에 살비듬이 거칠거칠하게 일어나 파르르 떨렸다. 그는 핏기 없이 추진 양손으로 눈가를 감추고 있었다. 마디지고 앙상한 설탕 과자 같은 손가락들 아래로 벌어진 입술이 소리 없이 부르짖어 댔다.

위에서 상대의 쌀쌀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한 대로 끝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당신은 알겠지요.」

그의 품은 나를 향하여 적나라하게 벌어져 있었다. 온통 빛바랜 짚단으로 채워진 품속은 내가 담겼던 형상대로 우묵하게 파여 있었다.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전하려는 듯했다. 입이 다물리지 않아 그는 한동안 쉽사리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웅얼댔다. 이때 나의 귓전에 대고 누가 또렷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생전 전염병이라고는 없었던 시절 건강한 그의 음성이었다.

「당신의 원대로 되었어요.」

옛 석조양식에 인각된 잔혹한 교훈극이나 기괴한 상징물같이, 그는 제 눈을 고통스레 뽑듯 손을 힘주어 세우고 입이 터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지금이 언제인지. 오늘은 내일이다.

볼거리가 끝나 인파가 해산하는 소리가 들렸다. 잔인할 정도로 무심한 거리의 소음이다. 사람들이 한가하게 이리저리 오가면서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있었다. 행인을 얼어붙게 하는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떠드는 말들이 알아들을 수 없게 뒤섞이고, 저들끼리 순서라도 정한 듯 웃음과 외마디 짜증이 쉼 없이 이어졌다. 수많은 목소리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메아리를 남기며 멀어지고, 그들이 절박하게 철문을 손톱으로 긁고 두드리는 듯한 쇳소리로 변주되었다가, 돌연 지반이 내려앉는 굉음과 함께, 웅장한 관현악단이 연주를 마칠 때 그러하듯 긴 여음을 남기면서 마침내 잠잠해졌다.

상대의 검댕투성이 맨발이 내 눈앞에 섰다. 힘없이 밑바닥을 나뒹구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듯했다. 이내 나는 상대의 눈높이로 들어 올려졌으나 거기에는 낯이 없었다. 내가 시선을 비스듬히 아래로 깔자, 그제야 예전의 나처럼 메마른 장작가리 같은 작자의 몸체가 내려다보였다. 나를 든 모습이 마치 내가 자기에게 맞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상대가 고심 끝에 나를 단상의 철제 난간 위에 위태로이 올려놓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쟁기질한 밭처럼 굴곡지고 뒤엎어진 차로가 희부연 빛에 드러났다. 내 뒤로 상대가 맥을 못 추고 나가동그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품속에서 상상한 길은 어찌나 대로였던가. 수많은 인파를 품은 광장과 거기에 면한 가도를 은연중 전제하지 않았던가. 그와 내가 오른 단 역시 내심 웅장한 제단이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굴러떨어진 세상은 가난한 청년 시절 여러 해를 셋방살이했던 구시가지의 회전교차로였고, 제단은 오래되어 칙칙한 빛깔로 변한 철골에 혼응토를 채워 굳힌 육교에 불과했다. 그것 말고도 눈에 보이는 대개가 검은 하늘에 물들어가는 듯 중후한 회색을 띠었다. 회전교차로의 교통섬에는 그을린 차들이 반시계 방향으로 돌다 멈춘 그대로 버려졌고, 그 위로 교통섬의 방첨탑이 쓰러진 모습이 내게는 거대한 시곗바늘로 첫새벽쯤을 가리키는 것처럼 내려다보였다. 군중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거리 군데군데에 위성의 이면처럼 빈 구덩이들이 파여 있고, 큰 화재가 있었는지 온통 재로 뒤덮여 회색 땅 같았다. 내가 들은 아우성은 환청이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민중을 의식하고 그들이 내게 무엇을 요구할지를 궁구했다. 그들에게 잘 보이고파 늘 어쩔 줄 몰랐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머릿속 한편으로는 세 자연수가 빠르게 쉼 없이 맴돌았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번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때면 으레 나는 세 수를 반복해서 세고는 했다. 내 머리를 돌게 하는 수레바퀴의 세 살이다. 그것은 한없이 선고되었고, 집행되었고, 유예되었다. 끝없이 커지고, 그지없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왜 동이 트지 않는 것일까? 쓱싹쓱싹 바닥을 솔질하는 소리가 먼발치에서 들렸다. 소제부일 것이다. 이런 때야말로 소제부는 꼭 있어야 하는 법이다. 치워야 할 것이 산더미니까 말이다. 어느 지혜로운 소제부 이야기를 안다. 난간에 방치된 나는 쓰러진 그와 상대를 등지고 구덩이뿐인 살풍경을 앞둔 채로 입을 열어 운을 뗀다. 어느 사람도 초대에 응하지 않아 비어 버린 장소에서 관계자만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경우는 내게 익숙하다.

소제부는 자기가 메꿔야 하는 구덩이를 보러 온 구경꾼 뒤에 서며 권한다.

「원한다면 가까이서 마음껏 들여다보시오. 인생의 첩경이 그 안에 있으니.」


*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거꾸로』, 「출간 20년 후에 붙인 서문」, 유진현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07)
** 앙리 보스코, 『이아생트』, 최애리 옮김(서울: 워크룸프레스, 2014)

 

 

  • 글자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