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한 시공간의 경계 없이, 한 페이지도 채 채우지 못한 채 투두둑 끊어지는 조각글들로 구성된 이 소설을 과연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규정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근래 읽은 작품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유와 이해력을 요구한 소설이었다는 사실이다. ARSON. 한국어로 번역하면 ‘방화’라는 뜻을 지닌 이 제목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은유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아르슨」 속의 ‘불’은 단순한 재난이나 물질적 현상이 아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삶을 연명하게 하는 필수 조건처럼 읽히기도 한다. 불은 직접적인 형상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소설이 흐름과 단절을 반복하는 동안 끊임없이 변모하며 불규칙하게 일렁인다. 초반부에서 난해하게만 인식되던 작은 불의 파편들은 소설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연결되며 메시지의 윤곽을 드러낸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이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었다. ────────────── ⌦ 불꽃을 지키는 자가 미쳐 날뛰면, 불도 미쳐 날뛴다. ────────────── 「아르슨」에서 ‘외부의 불’은 인간에 의해 점화된다. 무엇을 태울 것인지, 무엇을 남겨둘 것인지를 구분하지 않은 채 그저 연소할 뿐이다. 그렇게 번져나간 불은 결국 이를 초래한 인간에게조차 적대적으로 되돌아와 커다란 피해를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야생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영양분을 얻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다시 라이터와 성냥을 집어 든다. 한 개인이 피워 올린 불은 집단 방화로 확장되고, 자연을 불태우며 환경을 오염시키고, 끝내 인간을 덮치는 연쇄적 결과를 낳는다. 이렇듯 모든 인간은 연쇄 방화를 저지르는 방화범이자 공범이다. 반면 ‘내부의 불’은 우울과 불안, 불면, 무력감과 같은 심리적 병증의 형태로 타오른다. 결국 「아르슨」은 두 개의 불을 통해 위기에 직면한 인간을 비추는 이야기다. 단순히 소설의 주요 주제로 강조되는 기후 위기를 넘어서, 두 개의 불로써 인간이 불러일으킨 복합적 위기, 즉 생존과 파괴가 공존하는 상태를 은유한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불에 가장 강하게 매혹되면서도,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를 입은 인물이 바로 화자와 ‘그’다. 소설은 끝내 방화범이 누구인지 단정하지 않은 채 막을 내리는데, 이는 열린 결말이라기 보다는 애초에 단 한 사람을 지목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모든 인간은 라이터와 성냥을 들고 있으며, 연소 없이 살 수 없다’는 메시지를 떠올려보면, 불을 지른 방화범은 하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하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하나의 인간을 여러 갈래로 분해해 드러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나마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르슨」은 굉장히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완독 직후, 이 달의 소설 커뮤니티에 100자 서평을 남겼는데, 그 짧은 문장 속에는 이 작품이 남긴 혼란과 어지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난해한 분출과 단속적 사유의 교차.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어렴풋이 형성되는 불의 형상과 의도된 지연. 완독 이후에만 유효해지는 독해의 재구성.”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독서록을 남기게 된 건 이 소설을 언어로 정리하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100자 서평을 읽으며 든 아쉬움은 ‘독해’라는 단어가 이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아르슨」은 이해나 해석을 요구하는 소설이라기보다, 독자의 사색을 유도하고 의미를 직접 명명하게 만드는 글에 가깝다. 실험적인 문체와 파편화된 구성 역시 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그리고 그 불을 다루는 인간 자신을 되묻게 하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