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넛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음식이다. 안에 뭐든 넣을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수백, 수천 가지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한 연유로 나는 도넛을 사랑했다. 여의도에 도넛 가게를 차렸다. 왜 하필 여의도냐 하면, 어린 시절 뉴스를 볼 때마다 늘 여의도의 크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여의도 몇 배 면적에 달합니다, 여의도 몇 배 면적이 불탔습니다, 기타 등등. 놀랍게도 여의도는 섬이었다. 나만 몰랐나? 아무튼 내가 판 도넛을 합하면 아마 여의도만큼은 될 거다.
도림도넛.
초심자의 행운인지 장사가 꽤 잘됐다. 아침이면 오픈 런하는 사람들이 빌딩을 한 바퀴 빙 두를 정도였다. 그걸 빵픈런이라고 한다나. 서울 3대 도넛이라고도 했고, 빵지 순례 성지라고도 했다. 유명 크리에이터의 〈대동빵지도〉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어찌 된 일인지 외국인 손님 비중이 점점 늘어나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아르바이트생을 캐셔로 뽑았다. 손님들은 최대로 구매 가능한 수량인 열두 개, 즉 한 더즌씩 도넛을 사갔다. 대표 메뉴인 〈도림도넛〉이 제일 잘 나갔고 다른 도넛들도 골고루 인기가 많았다. 나는 빵을 튀기고, 튀기고, 또 튀겼다. 그것들은 매대에 진열되자마자 팔려 나갔다.
더현대에 새로 생긴 도넛집에 손님을 조금 뺏기긴 했다. 그래도 오픈 4개월 만에 블루리본을 받았다. 〈도림도넛〉이 동물성 생크림이 두둑하게 들어간 도넛으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입소문을 타면서였다. 특유의 중독성 때문에 〈마약도넛〉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나는 유리문을 깨끗이 닦고 블루리본 스티커를 붙였다. 수전증 때문에 조금 삐뚤어지긴 했지만. 도넛을 고르던 손님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나는 조리모를 벗어 가슴에 대고 인사했다.
기념할 만한 날이었지만 직원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청소와 마감을 한 뒤 하나둘 퇴근했다. 매출 정산을 마치고 포스기와 조명을 끈 나는 가게 열쇠를 챙겨 유리문 앞에 섰다. 창밖이 캄캄했고 인적이 드물었다. 저녁 7시 이후의 여의도는 거의 무인도나 다름없었다. 나는 다시금 스티커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라고. 그래도 기분 좋았다. 평생 뭘 잘해 본 적이 없던 터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하자 스티커가 똑바르게 보였다.
그때 유리문에 어떤 얼굴이 어른거렸다. 내 얼굴이 비친 줄 알았는데 나랑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마터면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유리문이 벌컥 열어젖혀졌다. 문 위에 달린 새 모양 크리스털 종―2년 전 수학여행으로 간 교토에서 사 온 것이었다―이 발작적으로 울렸다. 내 어릴 적 소꿉친구이자 유일한 친구인 조지희였다. 「뭘 그렇게 놀라. 귀신 봤어?」
「깜짝이야. 연락 좀 하고 오라고 몇 번 말해.」
「우리 사이에 연락은 무슨.」 조지희는 가슴에 전공 서적을 안고 있었다. 아직 새내기라 그렇게 하고 다니길 좋아했다. 내 속을 뒤집어지게 할 의도는 물론 아니었다. 가슴이 훤히 드러나고 딱 붙는 슬립 모양 레이스 나시에 펑퍼짐한 검은색 나일론 바지를 입었다. 「에미야, 물 좀 다오.」
「비켜. 퇴근해야 돼.」
「세상에, 이게 뭐야. 블루리본? 너 출세했다.」
우리는 맥줏집에서 조촐하게나마 축하 파티를 했다. 프라이드치킨 세 마리와 콜라 대짜를 주문했다. 조지희는 대식가였고 우리는 둘 다 술을 못 마셨다. 그래서 조지희가 오티니 엠티니 개강 총회니 종강 총회니 재밌는 걸 제쳐 두고 나랑만 노는지도 몰랐다.
「아리따운 여자들의!」 조지희가 500 시시 얼음 맥주잔에 담긴 콜라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쉿.」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지희를 말렸다. 호프집에는 파리가 날렸고―사실상 파리도 없었다―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노래도 안 틀어서 약간 독서실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사장님이 한쪽 테이블에서 노트북으로 리니지를 하고 있었다. 「조용히 해.」 내가 속삭였다.
「장난해? 빨리!」
「우정을 위한…….」 내가 마지못해 건배사를 이었다.
「디지게 먹는 파티!」 오직 혼자서만 뒤질 때까지 먹는 조지희가 나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며 외쳤다.
그리고 우리는 입 모아 〈아우디!〉 하고 잔을 부딪쳤다. 호프집 사장님은 게임에 열중하느라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조지희는 〈일개 학생〉이고 나는 〈무려 사장〉이니까(조지희의 주장이다), 그리고 축하할 일도 생겼으니까 오늘은 내가 계산했다. 평소에도 내가 내긴 하지만. 「스티커 나한테 붙여달라고 하지.」 헤어질 때 조지희가 말했다.
하루는 인터뷰 요청이 왔다. 직원을 더 구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바쁜 때라 고사하려 했는데, 조리고 학생이라고 해서 받았다. 인터뷰는 교내 신문에 실릴 예정이라고 했다. 인터뷰어는 꽤 진지했다. 대학을 안(못) 간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 스무 살에 창업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는지, 사적 혹은 공적인 도움을 받았는지, 2호점을 비롯해 n호점을 낼 생각이 있는지, 앞으로의 목표가 뭔지. 나는 딱히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진실되게. 도넛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였다.
대학은 안 간 게 아니라 못 갔다.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못했다. 수능을 치긴 했는데 120점인가 150점인가 받았다. 도넛 먹는 걸 좋아하니까, 도넛을 팔아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찾아갔다. 지금까지 미지급한 양육비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아니, 무력은 동원하지 않았다. 그걸로 도림도넛을 차렸다. 2호점은 아직 모르겠다. 가맹점 제안이 몇 번 오긴 했는데 만약 낸다 해도 직영점으로 할 생각이다. 남을 못 믿어서는 아니고, 뭐든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린다. 여기까지 말하고 내가 인터뷰어에게 물었다. 「참, 조리고 다닌다고 했죠. 졸업하면 뭐 할 거예요? 혹시 도넛 좋아하나요?」
그 학생―나보다 고작 한 살 어렸다!―이 어찌나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던지, 대화가 끝났을 때 나는 심리 상담을 받은 사람처럼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왜 도넛이 좋으세요?」 학생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것이었다. 「안에 뭐든 넣을 수 있어서요.」
안에 뭐든 넣을 수 있어서 나는 도넛을 사랑했다. 앞으로 이야기할,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갓 구운 도넛이 담긴 트레이를 매대에 내려놓았다. 요새 유행하는 두바이 초콜릿을 넣은 〈두바이도넛〉이었다. 카다이프, 피스타치오, 초콜릿이 주재료였다. 카다이프를 구하기 어려워 한동안 소면으로 대체해야 했는데 이제야 수급이 좀 되었다. 필링의 피스타치오 색깔을 살리려고 초콜릿은 검은색이 아닌 화이트 초콜릿을 썼다. 빵 색깔은 필링과 마찬가지로 연두색으로 했다. 메로나와 비슷한 색깔. 살짝 유치해야 잘 팔렸다. 윗면에 가나슈 아이싱을 올리고 중탕한 분홍색과 하늘색 초콜릿을 짜주머니로 페인트처럼 흩뿌려 장식했다. 트레이를 내려놓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집게가 날아들었다. 나는 칼을 피하는 사람처럼 허리를 꺾다가 몰려든 손님들 사이를 발레하듯 빙그르르 빠져나왔다.
점심시간에 단골손님이 가게로 들어왔다. 흰 와이셔츠를 입은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뭐랄까, 증권맨 그 자체였다. 우리 가게 손님들은 대개 어리고 젊은 여자들이었으므로 나는 그를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도림도넛〉을 하프 더즌으로 사가는 손님이었다. 어찌나 자주 왔으면, 평일 11시 30분
만 되면 알바들이 알아서 도넛 여섯 개를 상자에 포장해 둘 정도였다. 우리는 그의 방문으로 점심시간이라는 걸 알곤 했다.
「사장님!」 알바 하나가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그 손님을 곁눈질하며 재빠르게 속삭였다. 「또 왔네요.」 그러고는 씩 웃었다.
그게 뭐? 그가 또 왔다는 건 나도 이미 보았다. 말 그대로 단골손님이니까. 아마 새로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의 존재가 이제야 각인되었는가 보았다.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보낸 다섯 시간 동안에만 일하는 젊은 아줌마였다. 남편이 고관절 치료로 유명한 한의사라고 했다. 한남동에 있는 아파트―계엄령으로 탄핵된 전 대통령의 관저 근처였다―에서 재규어를 타고 출퇴근했다. 새빨간 시트의 2인승 자동차. 세 식구가 타는 자동차는 따로 있다는 뜻이었다. 면접을 볼 때 서정 언니는 〈줄 서기 싫어서〉라고 지원 이유를 밝혔다. 「처음 오픈했을 때부터 〈도림도넛〉에 중독됐거든요. 신랑 환자가 선생님 덕분에 걷게 되었다면서, 고맙다고 사다 준 걸 우연히 제가 먹게 된 거예요. 신랑은 단 걸 안 좋아하거든요. 그때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도대체 뭘 넣은 거예요? 진짜 마약 넣은 건 아니죠? 어머, 사장님 이름이 도림이구나. 성이 도, 이름이 림? 사장님을 갈아 넣어서 맛있나? 농담이에요. 애 유치원 합격시켰으니 마침 시간도 남을 것 같아서요. 일하러 들어올 땐 줄 안 서도 되죠?」 나는 그 자리에서 서정 언니를 채용했다. 서정 언니는 다른 알바들과 마찬가지로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편히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데도 꼬박꼬박 사장님이라고 해주고, 다른 알바들처럼 나이로 기싸움하려 들지 않아서―비밀로 하는데도 그들은 어떻게든 알아냈다―나는 서정 언니를 좋아했다. 돈 주는 사람이 갑이고 돈 주는 사람 말을, 그게 뭐가 됐든, 들어야 한다는 게 서정 언니의 지론이었다. 물론 그렇게 점잖게 표현하진 않았고 〈기라면 기고 까라면 까야죠〉라고 했던 것 같다. 다른 알바들, 특히 주말 알바들은 이름도 외우기 전에 바뀌곤 해서 직원 관리가 어려웠는데 고맙게도 매니저 역할까지 해주었다. 아무튼 서정 언니가 기강을 잡아 준 덕에 사장 노릇이 한결 수월해졌다.
「알아요, 저도.」 내가 서정 언니에게, 덩달아 속삭이며, 말했다. 「평일 점심마다 오는 분이잖아요. 〈도림도넛〉 하프 더즌으로 사가시는. 은나래 언니가 벌써 포장해 놨네요.」
「저 여우 같은 가시나.」 서정 언니가 카운터의 은나래 언니를 흘겨보았다. 은나래 언니는 〈영어 가능자〉로 뽑은 캐셔 알바였다. 외대 휴학생이었나 그랬다. 내가 abcd만 알았어도 인건비를 아낄 수 있었을 텐데……. 서정 언니가 내게 물었다. 「은나래 씨 주말에도 출근해요?」
「네.」 내가 대답했다.
「주말에도 저렇게 풀메 하고 와요?」
「음, 아니요.」
「그럴 줄 알았다니까.」
은나래 언니가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그 증권맨의 도넛을 계산해 주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수줍어하며 웃었다. 반면 그는 무표정이었다. 그때 홀의 테이블에서 커피와 도넛을 먹고 있던 손님이 비명을 질렀다. 도넛을 골라 트레이에 담고 있던 손님 몇몇이 일제히 그쪽을 주시했다. 몇 분 전 아이스아메리카노 레귤러 사이즈와 두바이도넛 하나를 주문해 먹고 간다고 했던 손님이었다. 그녀가 한입 베어 문 도넛을 도로 뱉는 게 보였다. 나는 손님들을 헤치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죄송해요.」 서서 길을 내어 준 손님들을 향한 사과였지만, 곧 테이블에 앉은 저 손님에게도 사과해야 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게 뭐죠?」 내가 당도하자 그 손님이 어김없이 말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괜찮으세요? 무슨 일 있나요?」 뱉어 낸 도넛을 보며 내가 물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했다. 날이 더워 상했나? 그럴 리 없었다. 진열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은 것이었다. 바로바로 팔리니 오래 진열할 필요가 없었다. 「두바이도넛에는 피스타치오가 들어가는데, 혹시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으신가요?」 그렇게 당부했건만 계산할 때 은나래 언니가 미리 확인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런 거 없어요.」 손님이 포크로 도넛 안을 뒤적거렸다. 「너무 매워요. 초콜릿인데 왜 매운맛이 나요?」
「네? 그럴 리가…….」
손님이 호피 무늬 하금테 안경을 벗고는 화장이 뭉개지지 않게 냅킨으로 조심조심 눈가를 찍어 냈다. 마스카라를 칠한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냅킨을 반으로 접어 코를 꽉 잡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나는 손님이 남긴 도넛을 집어 들었다. 잇자국이 난 통통한 초승달 모양이었다. 반대편을 베어 물었다. 이제 사과 심지 모양이 된 도넛을 가만히 내려놓고는 엄청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피카츄가 전기 공격을 한 것처럼 뇌에 전류가 흘렀다. 얼굴에 나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 다 물이 나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앞에 있는 손님에게 사과는커녕 그녀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도대체 안에 뭐가 든 거야. 먼저 봉변당한 그 손님은 마음씨 좋게도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팔을 잡아 주었다.
와사비?
그때 서정 언니가 증권맨의 손에 들린, 〈도림도넛〉 하프 더즌이 담긴 봉투를 낚아채더니 이쪽으로 달려왔다. 「축하합니다!」
「네?」 손님이 도로 안경을 쓰며 물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당첨입니다!」 서정 언니가 손님의 품에 막무가내로 봉투를 안겼다. 「홀에서 드시는 손님 중 매일 한 분을 추첨해서 저희 가게 대표 메뉴인 〈도림도넛〉을 드리는 이벤트를 하고 있어요.」
「진짜요?」 손님이 의심했다. 「저 이런 거 처음 돼봐요.」
서정 언니가 휘파람을 불며 환호하자 도넛을 고르던 손님들도 다 같이 기뻐해 주었다. 그런 한편 자신들이 행운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데 못내 아쉬워했다. 카운터에 줄을 선 손님들도 무슨 일이 생겼나 힐긋대며 웅성거렸다. 이벤트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우리도 하나 먹고 갈까?」 커플 손님 중 남자 쪽―휴가를 나왔는지 군복을 입고 있었다―이 여자 친구에게 물었다. 여자가 〈매일 한 명이라잖아〉라고 퉁을 놓았다. 내일 다시 오자면서.
와사비도넛에 깜짝 당첨된 손님이 〈도림도넛〉 하프 더즌을 들고 행복해하며 떠났다. 상황이 마무리되자 서정 언니가 유니폼을 갈아입으러 창고로 향했다. 데런의 하원 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다.
내가 깜짝 놀라 서정 언니를 붙잡았다. 「참, 언니. 그 손님은요?」
「네?」
「아까 도넛 뺏긴 저희 단골손님이요. 증권맨.」
「아, 난 또 뭐라고.」 서정 언니가 긴장했던 표정을 풀었다. 「뭐야, 벌써 보고 싶은 거예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니. 이미 계산한 도넛이었잖아요. 다시 드린 거 맞아요?」 화생방 훈련을 방불케 하는 와사비의 여파로 정신이 없어서 미처 챙기지 못했다.
서정 언니가 그제야 경악하며 〈내 정신 좀 봐〉 했다. 그러고는 카운터의 은나래 언니를 보았다. 은나래 언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는지 그냥 휙 가버리던데요?」
「그냥 보내면 어떡해.」 서정 언니가 은나래 언니를 혼냈다. 은나래 언니를 못마땅해해서라기보다는, 인이 박여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나오는 말투였다. 본 적은 없지만 왠지 데런에게 자주 쓰는 말투일 것 같았다. 밥 안 먹으면 어떡해. 유치원 안 간다고 하면 어떡해. 엄마 속상해.
「불렀는데도 그냥 가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요.」 은나래 언니가 딱딱거리며 휴대폰을 보았다. 그러고는 거의 들릴 듯 말 듯 〈연락처도 모르는데〉 했다.
「혹시 내일 오시면, 오늘 구매한 거 꼭 환불해 주세요.」 내가 은나래 언니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도넛 한 더즌 서비스로 드린다고 하고요. 아니, 오시면 그냥 저 불러 주세요. 제가 직접 말씀드리고 사과할게요.」
어쨌거나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한 서정 언니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 두어 개밖에 남지 않은 두바이도넛은 혹시 몰라 폐기했다. 더 만들 생각도 없었다.
서정 언니가 퇴근한 후, 은나래 언니가 물었다. 「근데 그 이벤트 진짜 하는 거 맞아?」 은나래 언니는 원래 반말을 했는데 자기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서정 언니가 내게 존댓말하자 조금 눈치를 보더니 자기도 존댓말을 쓰다가 이제는 서정 언니가 없을 때만 반말했다. 서정 언니가 있을 때만 반존대하기도 했다. 혼자 무슨 싸움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겠냐고요…….」 내가 허탈하게 말했다.
「와사비도넛이라니.」 은나래 언니가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매우 합당한 의문을 제기했다. 「대체 누구 짓이지?」
그러게. 나는 양동이로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충격받았다.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하고 있었을까. 도넛에 와사비를 넣은 게 누군지. 아까 서정 언니가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도림도넛은 망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왜, 일본의 초밥집에서 한국 손님에게 와사비 많이 넣은 초밥을 내줘 뉴스에 나온 적도 있지 않나. 초밥에 당연히 들어가는 재료도 많이 넣었다고 문젠데 하물며 도넛에 와사비라니. 입안 가득 들어오던 와사비의 맛이 떠올라 나는 몸서리쳤다. 와사비 테러를 당한 손님에게 또다시 죄송해졌다. 그래, 이건 〈테러〉였다. 도림도넛의 도넛들이 손님들에게 사랑받는 건 소가 풍성해서였다. 터질 듯해서 〈뚱넛〉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어디 한번 좆돼 보라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도대체 누구였을까. 누가 내 도넛에 와사비를 넣었을까. 진열된 지 30분도 안 된 그 잠깐 사이에. 빵을 핥는 영상을 찍어 소셜 미디어에 올린 초딩이 떠올랐다. 뾰족한 혀에 콕 찍힌 슈거 파우더. 이와 비슷한 예가 수도 없이 떠올랐다. 젓가락을 빤 다음 수저통에 도로 꽂아 놓는 걸 찍은 사람도 있었다. 하이디라오에서는 누가 훠궈 냄비에 오줌을 쌌다. 칭따오 맥주 공장에서도 누가 원료에 오줌을 쌌다. 전 지구적으로,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곤 하는 테러 행위였다. 행위자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가게들 또는 기업들은 망했거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노력했다 한들 좀처럼 회복하지 못했다. 그 운수 나쁜 희생양 중 하나가 여의도의 작은 도넛집이라면? 오싹했다. 당장 쇼케이스를 주문해야겠다. 아니, 락앤락에 꽁꽁 싸매야겠다.
며칠 전 했던 인터뷰가 문득 떠올랐다. 안에 뭐든 넣을 수 있어서 도넛이 좋다고? 얼마나 오만했던가.
* 〈나, 도림〉의 나머지 연재분은 단행본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1. 테러를 기회로 바꾸게 된 이야기. 주인공은 그 기회가 마냥 웃을 수 없는 복잡한 관계들로 섞여 있다.
2026.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