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혼자 읽는 거라고 생각하던 시간이 있습니다. 실은 꽤나 길었죠.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쓰고 말하는 일을 하며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게 지금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그때 제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각이었습니다. 누구도 저를 대신해서 책을 읽어주거나 글을 써주지는 않으니까요. 무엇보다, 한 권의 책이 제게 주는 감동(이렇게 말하면 조금 오글거리지만—이걸 오글거린다고 생각하는 제가 이상한 것 같기도 하지만—다른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네요)만으로 충분하기도 했고요.
이렇게 서두를 뗐다면 이어질 이야기는 뻔하겠죠?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나중에는 당연한 것 같기도 했어요. 적지 않은 책을 읽어왔으니, 각각의 책이 주는 감흥들에 조금쯤 무뎌지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요. 한계효용의 법칙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책에 무뎌지고, 관계에 무뎌지고, 삶에 무뎌지고, 그렇게 나이를 먹고……
그러다 해방촌에 있는 한 작은 서점에서 책을 함께 읽는 모임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모임장이 되어 책을 고르긴 했지만, 각자 책을 느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그런 모임이었는데요. 무척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그러면서 깨달았죠. 언제부턴가 책 읽기가 예전만큼 즐겁지 않다면 그건 너무 많은 책을 읽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책을 혼자 읽었기 때문이라고요. 이 계절의 소설을 함께 읽으며, 여러분들 역시 저만큼 즐거우셨기를 바랍니다.
이번 계절에는 김갑용 작가의 『냉담』과 이미리내 작가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을 함께 읽었는데요. 2016년 등단한 김갑용 작가의 『냉담』은 팬데믹 상황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소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카뮈적인 인물이 보르헤스적인 공간에서 카프카적인 상황에 처하는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무엇보다 ‘고전이 불가능한 시대’에 소설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소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읽으신 분들의 의견을 (제 멋대로) 모아보자면, 고유명사와 같은 구체성을 제거하고 오로지 소설 내부의 힘으로만 밀고나가는 박력이 있는, 조금은 낯설지만 끝까지 읽도록 만드는 힘이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미리내 작가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한국에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생활하던 작가가 영어로 발표한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조금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품입니다. 노예로, 탈출 전문가로, 살인자로, 테러리스트로, 스파이로, 연인으로, 어머니로 살아온 묵 할머니의 ‘믿을 수 없는’ 일생을 통해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과 한국전쟁, 남북으로 갈린 두 나라의 이념 갈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다루고 있는데요.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흥미진진하게 그린 무척 몰입감 넘치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분들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시기도 했는데요, 저 역시 인생의 시기에 따라 다양한 배우들이 연기하는 묵 할머니의 모습을 영상으로 만나보고 싶네요. (넷플릭스 관계자분들, 보고 있나요?)
다음 계절에는 더 많은 분들과 더 많은 작품을 함께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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