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소설에 대해

흰 사각형 벗은 낯: 김갑용, 『냉담』

소전문화재단 장학생 홍인표

『냉담』이 내일의 고전이라는 시리즈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은 절묘하게 느껴집니다. 내일의 고전. 시대의 검증을 미리 가로질러 고전의 성좌를 선취하고자 하는 이 야심찬 명명은 그 시도 자체로 몇몇 질문들을 견인합니다. 과연 문학에는 미래가 존재할까요? 고전이 더 이상 생산될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그 미래와 고전은 어떤 모습일까요? 공교롭게도, 그 질문들은 『냉담』이라는 소설이 이미 그 소설 안에서 던지고 있는 물음들이기도 합니다.

* 기시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남자는 전염병 시기의 도시를 배회합니다. 그는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이며, 마스크를 쓴 수수께끼의 “그녀”를 만납니다. 실제와 환상이 불분명하게 교섭된 이 전염병 시기의 세상을 가로지르며, 주인공은 “그녀”와 헤어지고 또 재회합니다.

이 소설은 ‘어디선가 본 듯한’ 소설입니다. 그것은 소설 속에 이미 우리에게 낯익은 다양한 고전들의 포즈가 변용되어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도시를 배회하는 남성 화자와 그가 우연히 조우하는 미지의 여성이라는 도식은 김승옥의 산문시대부터 수없이 답습된 근대적 소설의 전형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전염병이 팽배한 배경과 실존의 부조리는 카뮈를(부조리 3부작·『페스트』), ‘도끼’의 은유와 끝없이 지연됨으로써 유지되는 체계는 카프카를(『성』·『심판』), 힘껏 성장盛裝한 고양이와 신비로운 교수는 불가코프를(『거장과 마르가리타』), 일터의 층계참에서 기거하는 고용인은 멜빌(「필경사 바틀비」)을 떠올리게 하지요.

기시감. 숱한 고전이 코드화된 이 소설에서 우리가 읽어내는 것은 파편적인 기시감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 본문이 제시하는 맨 처음의 소제목 역시 기시감임은 우연이 아닙니다. “나는 자주 기시감에 빠졌다. […] 어느 때든 간에 기시감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을 이미 이전에 겪었다고 여기는 것이다.”(9면)[1] 즉 소설에서 발생하는 기시감은 이미 작가에 의해 메타적으로 인지되는 감각이며, 소설은 단순히 고전들에 관한 향수어린 오마주를 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기시감 자체를 문제적으로 탐구하고 있습니다.

기시감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창출될 수 없는 시대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감각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반복되는 일과가 가득합니다. 어제와 오늘이, 오늘과 내일이 다를 것이 없어서 실질적으로 오늘이라는 자리가 희미해질 지경입니다. 주인공이 “우리에게는 지금과 당장이 없었다. 그 대신 일이 있었다.”(37면)라고 짚어내는 것처럼.

고전들이 살아 숨쉬던, 격변기들은 이미 떠나보낸 지 오래입니다. 들끓었던 혁명에 대한 기대감도, 그 혁명으로부터 비켜선 음울한 데카당스도 우리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정체만이 존재하는 시기에 자본주의적 질서가 유일한 대안으로 군림해 유행의 반복으로 기시감만을 생산합니다. 이 침체된 시간성은 특히나 이 소설의 전염병 배경이 연상시키는 팬데믹 시기에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동선은 엄격하게 통제되고, 상호작용이 제한되며, 이 모든 제약을 우리가 내면화했던 시기. 삶의 부피는 줄어들었고 시간은 개성을 잃었으며 우리의 얼굴 역시 마스크라는 일관된 형식으로 통제되었지요. 생기 잃은 삶 가운데로 실질적인 죽음의 가능성이 으스스하게 떠돌았습니다.

이런 시대에 문학은 무의미해 보입니다. 세상이 항상 동질적이라면 소설이 굳이 새롭게 쓰이고 새롭게 읽힐 이유는 없으니까요. 이를 보여주듯, 소설을 쓰는 주인공은 더 이상 현실에서 소설을 쓰지 못합니다. 주인공은 어떤 미래에 한 사람이 깨어나서 바라보는 한 풍경을 상상합니다. 그 사람은 도서관에서 깨어나지만 “지금은 소설이 없는 시대이며 그 소멸로 완성된 시대, 아무도 읽지도 쓰지도 않았음으로써 평화와 번영에 이른 시대”(43면)라는 말을 전해 듣습니다. 기시감으로 충만하며 아무도 그 기시감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 그 사람은 그 시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격리 조치를 당합니다.

하지만 김갑용이 이 소설에서 시도하는 것은 그 격리 조치에 대한 위반입니다. 이 문제적인 감각과 기시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또다시 말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끝없이 변이하는 질환을 몸에 품은 보균자가 어떻게 이 기시감을 직면하고 마침내 교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냉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주제 의식이기도 합니다.

[1] 김갑용, 『냉담』, 소전서가, 2024. 이하 소괄호 안 쪽수는 모두 해당 도서. 강조는 인용자.

* 꿈을 내파하는 꿈
꿈. 이 소설은 내내 주인공이 꾸는 꿈 같기도 합니다. 1부에서 주인공은 꿈에 자주 사로잡힙니다. 꿈의 기다림이라는 소제목의 본문에서 주인공은 연속적으로 꿈을 꾸며, 이전의 꿈은 다음의 꿈에 의해 “화제를 전환하면서 퇴장당”(61면)합니다. 연쇄되는 꿈속에서 독자는 과연 이 모든 장면이 주인공의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모두 경험하는 공통 감각일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가 지극한 현실이 된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기억 장애를 지니고 꿈처럼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다고 파악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항상 상품처럼 대체 가능하며 가변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정한 정체성을 토대로 기억을 구성하는 작업에 실패합니다. 그리고 기억을 구성하는 데 실패해야만 계속 붓날리는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있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확실하게 형성될 수 없는 이 사회에서, 마크 피셔는 프레더릭 제임슨의 말을 빌려와 “우리는 이제 다른 어떤 사회도 이 사회만큼 표준화되지는 않았으며 또한 인간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성이 이토록 동질적으로 흐른 적은 없었다는 점도 깨닫고 있다”고 말하며, “모든 것이 유행과 미디어 이미지의 영속적인 변화에 종속된 상황에서 앞으로는 어떤 것도 더 이상 변화할 수 없다는 점”을 짚습니다.

기억 장애가 작동하는 방식은 꿈과 같습니다. 어떠한 불편함이나 이상함이 있더라도 매끄럽게 평탄화하는 역할. 꿈속에서는 그 아무리 기이하고 난데없는 이미지가 돌출하더라도, 완벽한 내적 논리에 따라 서사에 부합시킵니다. 또한 꿈은 깨어난 뒤 곧바로 망각되며, “우리가 망각했다는 사실도 망각”[1]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꿈이 지닌 비일관적 일관성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망각적 성질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현실의 모순성을 의심 없이 체화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에 미치지 않고서는 꿈꾸듯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자본주의적 꿈이 무엇보다 소설에서 잘 드러나는 곳은 1부의 굴속입니다. 주인공은 떠나간 “그녀”를 찾기 위해 지하 주점의 노인을 고용하게 되고, 뒤이어 자신 역시 그 지하로 들어갑니다. 그 굴속에서 주인공은 “죽음!”이라고 외치는 고양이를 뒤쫓아 홀린 듯 문들을 넘어서 지하에 도사리는 수많은 환상적 정경을 만납니다. “놀이공원에서 쓸 법한 고양이 귀 모양 머리띠를 쓰거나 얼굴에 조악한 분장을”(97면)하고 교복을 입은 남녀 무리. 수많은 방에 시중을 드는 웨이터. “형광 조명이 깜빡이는 컴퓨터와 부속품들, 헤드셋, 방송용 간이 장비”(103면)를 갖춰두고 마치 성매매를 암시하는 듯한 말을 꺼내는 여자아이. 하나같이 자본 사회의 편린들을 보여주면서, 이들은 “요즘 세상에 상사가 어딨어요. 다 개인 사업자예요.”(104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모든 사람을 하나의 개인 사업자로 원자화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그들을 비정규화하며, 안정의 감각을 느끼기 위해 끝없이 성과를 욕망하도록 추동시키는 기제를 지적합니다. 이렇듯 하나의 꿈에 의해 그 분열증이 통솔되는 사회의 일면은, 소설 내에서 꿈과 같은 풍경으로 알맞은 형식을 입은 채 드러납니다.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은 그 꿈에 균열을 가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꿈속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 꿈을 꾸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꿈은 이해받을 수 없고, “발설하는 순간 속임수가 되기 십상”(67면)인 기이한 고유성의 영역입니다. 그렇기에 그 카프카적인 꿈은 역설적으로 거대한 꿈의 구조를 안으로부터 파훼할 단서를 제공합니다.

자본주의가 꿈을 작동시키는 방식과 카프카가 꿈을 경험한 방식은 상이합니다. 자본주의에서 꿈은 기묘한 것을 순치시키고, 일어난 것을 망각시킵니다. 하지만 카프카는 꿈을 꿈으로써 기묘한 것을 생산했습니다. 또한 꿈을 도저히 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오직 꿈을 꿀 뿐입니다. 잠 없는 꿈을.”[2] 카프카의 꿈은 “잠이 들기도 전부터 그의 깨어 있는 상태로 침입해 들어오”기도 했고, 꿈은 또 하나의 현실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꿈이 존재했기 때문에, 카프카는 꿈과 깸의 “중간의 영역에 있을 때 자신의 작가적 능력을 온전하게 인식”[3]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적 꿈은 자본-꿈의 외부를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 됩니다. 꿈을 통해 꿈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다른 차원의 꿈은 도서관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 소설은 도서관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과거에도 도서관에서 일했고, 현재에도 도서관에서 일합니다. 도서관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만 일종의 헤테로토피아처럼 여겨지지요. 현실의 중력과는 다른 고유한 배가 법칙에 따라 정돈된 고전들이 갖가지의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 보여 숨을 잠시나마 돌릴 수 있게 하는 공간. 하지만 『냉담』의 도서관은 그러한 환상을 파괴합니다. 도서관이야말로 앞서 언급한 기시감에 남김없이 잠식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1부와 2부의 도서관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1부의 도서관은 현실의 도서관입니다. 이곳은 본사와 지부가 나뉘어져 있으며, 명확하고 위계적인 기업 구조에 의해 움직이는 사업체입니다. 문학적인 아우라는 이곳에서 모두 해체되지요. 이 사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의 풍경은 “구성주의 회화 속 기하학적 패턴”(53면)처럼 일관될 뿐이며, 주인공의 작업은 “전국 도서관 시스템에 접속해 빈칸들을 입력하는 일”(51면)처럼 문학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기계 노동입니다. 주인공이 도서관에서 발견하는 정경은 문학이 아니라 자본의 현실입니다.

2부에서 나타나는 도서관 역시 근무지입니다. 국회 도서관을 연상케 하는, 하중도 내 돔 형태의 도서관에서, 주인공은 하급 노동자로 일합니다. 이곳에서 주인공은 “나”와 “너”라는 이름의 두 동료와 함께 “책을 꽂고 뽑”는 일을 반복합니다. 책을 펼쳐보지만 그것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검수”의 요식 행위에 그칩니다.

그러나 1부의 도서관과 다른 점이 있다면 2부의 도서관은 마치 꿈속 풍경 같다는 점입니다. 사실 2부의 전체 내내가 제게는 꿈처럼 느껴졌습니다. 주인공이 처한 이 수상하고 신비로운 도서관은 가운데 빈 사각기둥 공간에 세계수처럼 거대한 수삼목이 자라고 있고, 주인공은 갑자기 허공으로 떠오르기도 하며, 상공으로부터 거대한 검은 정사각형이 내려와 수삼목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꿈처럼 기이한 일들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도서관들은 모두 꿈이라는 질서로 포섭되며, 1부에서 그것이 자본-꿈에 의해 명백히 포섭된 공간이라면 2부의 도서관은 스스로의 카프카적인 꿈속에서 재구성된 공간입니다. 그렇기에 2부의 꿈의 도서관은 “더는 기시감이 없었다”(171면)고 표현되며, “내부가 한 사람의 의지와 의도만으로 축조된 공간”(171면)으로 드러납니다. 이 꿈에서 주인공은 바깥의 꿈으로부터 은폐됐던 논리를 탐험하며, 망각되었던 것을 다시 펼쳐냅니다. 1부에서 줄곧 1인칭이었던 주인공은 이곳부터 3인칭(“그”)으로 전환되고, 보다 메타적인 이 몽중몽夢中夢으로의 탐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이 됩니다.

[2] 마크 피셔, 박진철 옮김, 『자본주의 리얼리즘』, 리시올, 2024, 129면–130면, 강조는 인용자.
[3] 프란츠 카프카, 배수아 옮김, 『꿈』, 워크룸프레스, 2014, 11면.
[4] 같은 책, 19면.

* 검은 사각형을 깨부수는 검은 사각형
꿈속의 도서관의 핵심은 수삼목입니다. 이 세계수는 “완벽히 격리된 수직 공동” 속에 안전하게 보존되며, 세상의 “중심”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그녀”라는 성별이 부여된 채 신격화[대상화]되기도 합니다. 수삼목은 이 도서관의 맹목적인 상징 체계입니다. 노동자들은 마치 의례처럼 수삼목을 빙 둘러 가며, 어느 곳에서든 수삼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수삼목을 직접 만지거나 수삼목이 있는 공간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 수삼목을 두고 “나”와 “너”라는 주인공의 두 동료가 보이는 상반된 태도는 흥미롭습니다. “나”는 수삼목을 건드리면 그 아름다움이 해쳐질 것이라며, “우리는 그녀를 만지지 못함에”(176면) 기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너”는 그녀의 신성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녀와의 접촉 불가능성”(176면) 자체에 회의를 느끼지요. 사뭇 다른 입장이지만 결국 공통적으로 수삼목의 절대성과 불가침성에 대해서는 합의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수삼목이라고 목청 높여 추앙하는 것은 절대적인 예술성이며, 나무의 뿌리부터 가지까지 뻗치는 끝없는 파생성은 고전들의 계보와 전통을 나타냅니다. 이 절대적인 고전들은 기시감뿐인 세상으로부터, “밀폐된 속에서만 […] 영원히 안전하고 완전”(176면)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수직 공동의 정방형을 조감해본다면 하나의 도형이 떠오릅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1915년에 그렸던 「검은 사각형」은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출발점에 놓인 그림이었습니다. 캔버스에 그려진 단 하나의 검은 정사각형. 말레비치의 사각형은 회화의 모든 재현을 거부하는 절대주의적 근대 미학을 출발시켰으며, 스스로 하나의 절대적인 성상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미술사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이 검은 사각형에 대해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내렸던 평가 하나를 상기시킵니다. 이 검은 사각형을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성스러움 중의 성스러움”으로 인식했으며, “접근 불가하고 손댈 수 없으며 상상할 수 없고 형상화할 방도가 없는 환영의 공간으로 취급”[1]했지요.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라는 “암흑의 구멍” 이후 어떠한 예술도 이를 재현할 수 없으리라 믿었고, 이를 표현하는 방법은 오로지 “암흑의 이상”만을 가리키는 일만이 가능했다고 평했습니다. 이미 완전한 절대성만을 지시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제스쳐도 불가능한 상황. 그것은 기시감뿐인 세상에 더 이상 아무것도 쓰일 수 없어, 이미 구축된 절대적인 고전만을 가리키고 추앙하는 것만이 가능해진 소설 속 상황과 유비됩니다.

예컨대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도서관의 사서는 주인공에게 “새로운 책”의 창작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사서가 바라는 창작의 방향은 이미 결정된 상태입니다. “쓸 것은 이미 당신이 존재하기 전부터 정해졌습니다.”(210면) 그리고 사서는 수삼목을 가리킵니다. 수삼목을 재현하는 일 외에는 가능한 다른 창작의 선택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신전 속의 수삼목은 오로지 자신의 절대성을 복제하는 일만을 명령하고, 그러므로 기시감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 한편 또다시 예술적인 기시감을 재생산하도록 만듭니다. 이는 결국 이중의 기시감으로부터 수삼목이 고립되는 상황을 이끌어내고, 예술을 특권화하기 위한 시도는 끝내 예술의 고사枯死를 암시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 수삼목에 복속되는 대신 오염시키는 존재입니다. 주인공은 사서의 안내에 따라 수삼목에 실제로 접근하게 되는데, 그때 주인공에 의해 수삼목은 감염되며 도서관은 비상 상황에 빠집니다. 주인공은 보균자로서 감염을 통해 기존 상태를 교란하는 주체입니다.

수삼목에 문제가 생기자 도서관 내부의 사람들은 각기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너”는 수삼목과 하나가 되기 위해 수직 공동으로 추락해 자살합니다. 사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쓰이지도 읽히지도 않는 세계로 도약해 버립니다. 그리고 “나”는 죽지는 않지만 더 이상 어떠한 고전도 생산될 수 없는 종말론적 미래를 점치고 체념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세 길 중 어느 곳도 따르지 않고, 대신 최상층으로 올라갑니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도서관장을 알현한다고 믿지만, 사실 관장처럼 보였던 이는 벌목꾼이었습니다. 수삼목을 도끼로 베어낼 사람. 그 유명한 카프카의 인용구를 생각한다면 여기서 도끼라는 도구에는 의미심장한 역전이 일어납니다. “교수님은 책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주 도끼를 거론했지. 이 책이 자기 내면을 도끼같이 깨부쉈다고. 죽은 작가들 책이었다.”(257면) 그러나 지금 벌목꾼의 도끼가 깨부수려는 대상은 바로 수삼목, 즉 고전의 체계, “죽은 작가들 책”입니다. 도끼가 도끼를 부수는 상황. 카프카의 말은 이곳에서 완전히 뒤바뀐 채 전유됩니다.

수삼목과 대결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쓰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행되는 벌목에 쓰이는 이 도끼날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시나 검은 사각형입니다. 하늘에서 “검은 정사각형”(260면)이 떨어집니다. 수직 공동의 크기에 꼭 맞는 검은 사각형은 상공에서 추락해 수삼목을 으깹니다. 도끼를 부수는 도끼. 검은 사각형을 파괴하는 검은 사각형.

그러나 파괴야말로 검은 사각형의 본래 쓰임입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새로운 사회를 건축하려는 노력과 새로운 예술을 개척하려는 시도는 나란히 이어졌고,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역시 이 시기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에 속합니다. 말레비치는 이전까지의 낡은 예술을 청산하고 새로운 영도를 제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뒤덮어버릴 검은 사각형을 고안해냈습니다. 이 새로운 사각형의 절대성에 따라 창조성을 가로막는 과거는 파괴됩니다.

물론 말레비치가 의도했던 것은 과거의 완벽한 절삭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불의 시험”이었습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린 후에 결코 파괴될 수 없는 마지막 잔재만을 남기는 시험”인 것입니다. 도리어 청산으로서 고전의 정수는 살아남을 것이며, 이 잿더미는 “창조적 삶의 전체 사건을 개시하기 위한 출발점”[2]이 될 것입니다. 이 소설 역시 고전들과 대결하면서도, 동시에 그 고전들로서 이뤄집니다. 고전에 도전하면서도 동시에 그 무기로서 고전을 차용합니다.

이제 이중의 기시감을 격파하는 꿈의 여정이 끝나갑니다. 스스로 빠져들었던 꿈속에서 되짚어낸, 자본이라는 꿈에 포섭된 전염병 시대의 기시감. 그리고 동시에 그 꿈속에서 또 하나 발견한 고전이라는 성상과 그것이 재생산하는 예술적인 기시감. 주인공은 검은 사각형이라는 도끼날이 이 해묵은 수삼목을 발본拔本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결국 소설이 새로운 소설을 가로막는 이 기시감들의 총체를 메타적으로 인식하고 비판적으로 되짚을 때, 새로운 텍스트와 새로운 시간성이 가능해집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입니다.

[5]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이나라 옮김, 『어둠에서 벗어나기』, 만일, 2016, 19면.
[6] 김수환, 『혁명의 넝마주이』, 문학과지성사, 2022, 322-333면

* 흰 사각형 벗은 낯
2부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죽습니다. 이 죽음은 깨어남의 은유로 볼 수 있을까요? 주인공은 검은 사각형에 의해 도서관이 초토화된 후, 살아남아 골짜기 인근 아파트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와 재회합니다. 그녀는 소설에서 내내 무척 중요한 인물로, 1부에서 우연히 주인공과 만나 함께 살게 되었다가, 홀연히 주인공을 떠나 사라집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주인공이 애타게 갈구하고 향수를 느끼는 대상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주인공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스크를 쓴 채로 신비롭게 나타난 그녀는 도리어 마스크를 벗으면 신비를 잃습니다. 가려졌을 때 더욱 절대적이고 매혹적인 그녀는, 2부에서 마찬가지로 여성형으로 숭상되었던 수삼목과 이미지가 겹칩니다.

주인공은 결국 내내 마스크를 쓴 그녀를 온전한 타인으로서 대하고 교감하지 못했습니다. 주인공은 그녀에게 “자유를 선사했노라고”(40면) 믿거나 정반대로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해야 한다”(282면)고 믿습니다. 그녀를 노예 혹은 여신으로 위치시킬 때 결국 그녀는 그녀가 아닌 다른 존재로 거듭 구겨집니다. 마스크를 쓴 얼굴은 “가려진 외양을 더 뚜렷하게 상상하도록 유도하”(232면)지만, 언제나 그 상상은 마스크 뒤의 얼굴을 소외시킵니다.

2부의 마지막. 다시 돌아온 그녀는 주인공에게 약을 먹입니다. 그리고 그 약을 먹음으로써 주인공은 곧 숨을 거두지요. 절대적인 성상[대상]인 수삼목과 결별했듯, 주인공 역시 단 한 사람을 끝없이 직면하는데 실패했던 자신 역시 청산해야 합니다. 다시 제대로 재회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2부 마지막에 천천히 죽음 속으로 잠겨들어갈 때, 꿈은 드디어 깨어나고 죽음 끝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마스크를 벗은 채로.

“[…] 만약 2점만 전시해야 한다면 검은 정사각형과 흰 정사각형을 전시해주십시오.”[1] 말레비치가 구상한 절대주의의 구조와 단계에서 「흰 정사각형」은 마지막에 위치합니다. 순수한 비대상성과 무한함을 나타내는 흰 정사각형은, 말레비치에게는 검은 정사각형이라는 시작과 함께 반드시 나란히 놓여야 했던 중요한 지향점입니다.

말레비치의 성화가 많은 이들의 맥락에서 제각기 전유되는 오늘날, 저는 기울어진 하얀 사각형에서 우리가 전염병 시기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 팽개쳐놓곤 했던 흰 마스크를 제멋대로 떠올립니다. 분명, 전염병 시기에 나는 살아있었고 기시감만을 헤엄치지도 않았습니다. 즉 우리가 거쳐온 각기의 팬데믹에는 각기의 기억과 삶이 분명 구성되고 있었습니다. 마스크를 각기 쓰고 서로를 쳐다보면서도 서로의 마스크 너머를 보여주는 듯한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냉담』의 마지막은 부록으로 끝마칩니다. 마치 김갑용 소설가 자신의 목소리인 듯한 화자 “나”의 입장에서 쓰여지는, 에세이-소설입니다. 이 부록에서 화자는 모든 마스크를 내려놓고, 팬데믹을 거쳐왔던 시간, 그리고 그것을 함께 건너왔던 단 한 사람에 대한 감정들을 담담히 늘어놓습니다. 1부와 2부의 주인공처럼, 부록의 화자 역시 미리 상처받기를 두려워해 일부러 ‘냉담’해지기도 했고, 그래서 버림받기 전에 먼저 상대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록적인 호우, 전염병과 같이 그 상대의 존재 자체를 없애버릴 듯한 재난에 화자는 늘 후회하며 귀환했고, 결국 상대를 마주하며 자신이 잠겨있던 꿈에서 벗어나곤 합니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꿈이 아니라 현실의 은유를 통해 깨어나고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잠들었음을.”(311면) 그것이 화자가 고백하는 사랑이었으며, 이 사랑 앞에는 “열정도 냉담도 집착도 굴종도 없다”(313면)고 말합니다. 오로지 그 사람과 그 사람과 함께 창발해가는 배움[경험]만이 있을 뿐.

이 마스크-벗기기는 비단 사람뿐 아니라 미래에게도 적용됩니다. 『냉담』은 메타하는 소설입니다. 기시감뿐인 세상에 소진되어 아무것도 쓰지 못하거나, 혹은 걸작 의식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쓰지 못하거나. 미래가 아예 없어서 글을 쓰지 못하거나, 완벽한 미래를 알 수 없어서 쓰지 못하거나. 그 역설적인 상황 자체를 작성하는 방식으로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는 상황을 타파했지만, 부록은 이 메타에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음에도 미래를 조금이나마 열어가는 방향입니다. “나는 내게 도래하리라 예견한 미래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써왔다”고 화자는 말합니다. 자신이 꿈꾸고, 간절히 생각했던 미래들을 소설에 썼지만 소설에 쓴 미래는 결국 현실에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소설이 미래와 무관하거나 미래에 미달하는 퇴행적 형식은 아닙니다. 도리어 소설을 쓴다는 그 행위 자체가 전혀 도래할 것이라고 예기치 못했던 미래를 적극적으로 초청하고 산출한다는 점에서, 소설 쓰기는 미래를 가장 능동적으로 견인하는 방식이 됩니다.

“나는 다시금 포기하고자 새로운 미래를 찾아 소설로 써나갔다. 나의 소설들은 내가 온 힘을 다해 벗어난 미래다. 벗어남으로써 미래는 과거가 된다.”(315면) 그렇게 화자는 단순히 현실을 높이 조감하는 일에서 벗어나 미래로 달려가기를 결의하는 소설입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전염병이 찾아오고, 새로운 마스크가 얼굴에 구속구처럼 걸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때마다 새로운 노멀, 새로운 꿈, 새로운 도끼와 새로운 정사각형이 쇄도하리라는 말과도 같을 것입니다.

[7] 타티야나 고랴체바, 박종소 옮김,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이론과 실제』, 지하출판소, 2021, 26면,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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