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소설에 대해

두 번째 부록 ‘여동생’으로부터: 김갑용, 『냉담』

소전문화재단 장학생 이한나

김갑용, 『냉담』 중 아버지 몸속 식물 키우기에 대하여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151)
“사람들은 말한다. 괜찮으니 숨김없이 고백하라고.”(38) 그러나 아무도 나에게는 그 일에 대한 고백을 요구한 적 없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여느 때와 똑같이 수줍은 듯 말 없는”(153) ‘그’의 ‘여동생’이다. 나는 수줍은 적 없고, 그저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대체로 말 없는 사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일을 고백하며 말을 늘어놓고 싶다. 이 필요가 “낱낱이 고백함으로써 용서 받거나 스스로가 떳떳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다.(38) 나의 솔직함으로 “타인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38) 확실한 것은 나의 오빠인 ‘그’가 기나길게 말할 동안 나 또한 무언가 말하고 싶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찾아온 오엽송에 대하여, 아버지 “속에서 풀떼기를 키워가며” 아버지를 살리려 했던 일에 대하여.(140)

어릴 적, “야간 운행을 하던 아버지가 안방에서 자는 낮 동안 나머지 네 식구가 숨죽여 생활해야 했던 좁은 방에 홀로 남겨지면 어김없이 시도하던 게 있었다.”(9) “오후의 창에서 스며드는 빛의 조도와 낡은 장롱이 드리우던 그림자의 기울기, 철 지난 이불의 구겨진 모양새, 거울을 마주보고 선 나의 어색하고 굳은 표정.” “그 순간 주워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분리하기. (9-10) 가장 먼 곳을 상상하기, 지금 이 음울한 현실보다는 더 나은 것이 있다고 상상해 보기.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 줄 이질적인 존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어느날, 어머니가 잿빛 집에 사시사철 파릇한 존재를 데려오셨다. 동네 오일장에 갔다가 얼떨결에, 기르기에 편리하다며 떠넘겨 받듯 데려오신 “어린 오엽송”(129) 분재였다.

“「저 나무는 무슨 나무야?」「소나무」「무슨 소나무?」”(141) 조금은 놀란 눈으로 오엽송을 이리저리 관찰하며 물었을 때 어머니는 “섬잣나무라고 딸에게 알려”주었다, “잎이 다섯 가닥씩 뭉쳐 자라서 오엽송이라고 부른다고.”(141) 조금 들뜬 목소리로 나는 “오엽송 사이로 바람이 불면 솔숲에 부는 바닷바람과 같겠다고” 말했었다.(141) 어머니는 내게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늘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나는 발코니의 오엽송 분재가 나를 이곳에서 구해줄 것임을 알아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람이 세게 불어 낡은 ‘창틀이 덜거덕댈’ 때, 더이상 그 소리는 나의 “불안을 키”우지 못했다.(129) 세차게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의 오엽송은 “연둣빛 솔잎을 찰랑이며 시원스러운 소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129)

어머니가 오엽송 분재를 데려온 지 몇 주가 지나고 “태풍이 북상”했을 때,(141) 나는 덜거덕대는 창문을 따라 조금씩 흔들리는 오엽송의 숨소리에 반가운 마음으로 귀 기울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식물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핍된 것과 과잉된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는 것. 그들의 말이 찰랑이며 들려오는 것. “처음에는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지 못한 자신이 소통을 그리워하느라 겪는 환청이라 여겼으나, 그렇지 않았다.”(194) 솔잎 하나하나는 흔들리며 말하고 있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느 때와 똑같이 말 없는’ 나와 오엽송은 서로에게 몸을 기울임으로써 서로의 목소리를, 숨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오엽송을 만난 이후로 내게는 가장 쉽고 잘하는 일도, 가장 좋아하는 일도 줄곧 식물 키우기였다. 나는 발코니에 “서양 송악”(152), 더 익숙한 명칭으로는 아이비 덩굴을 포함한 다양한 식물들을 키우기 시작했었다. “아버지가 붙박이처럼 앉아 가족을 호령”할 때면 나는 늘 “거실 너머 발코니”(152)에 놓여있는 오엽송 분재를, 모서리를 타고 뻗어나가는 서양 송악을 바라보며 그 상황으로부터 나를 떼어내곤 했었다. 계절에 상관없이 푸름으로써 여기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들,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가장 먼 세계를 상상했다. 그 세계에서는 아무도 나를 파괴하기 위해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흔들릴 때마다 파도 소리로 말하는 푸른 식물들이 있을 뿐이었다.

오엽송의 소리를 처음 들은 지로부터 십여 년이 넘게 지나, 오엽송이 내게 화분의 갑갑함을 토로했을 때, 나는 “삼각산”의 “소나무 군락”을 찾아가 빈자리에 나의 오엽송을 심어주었었다.(263) 그 당시 나는 숲을 조림하는 관청 사업의 일원으로서 일을 시작했던 차였다. 이와 동시에 오엽송이 우리 집의 발코니를 떠난 것처럼, 아버지는 집을 떠났었다. 떠날 당시 아버지는 “차를 사서 그토록 좋아하던 산과 자연으로 떠돌며 살겠다고 했다.”(153) 나는 혀에서 솔잎 맛이 날 때까지 그 말을 혀로 굴리고, 곱씹고, 또 따갑게 삼켜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언어화하려 시도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진짜로 그러한 삶을 살게 될까봐 조금 두려웠던 것 같다. 그러나 이후에 “아버지 몸속에 일평생 도사리던 병마”(153)가 다시 재발하고야 말았을 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이를 증오하기보다 이에 안도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안방에서 천천히, 썩어갔다.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와 나는 눈을 맞췄고, 나는 우리가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알았다. 우리에게는 어떤 입원 치료를 받도록 할 돈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게 눈을 맞추고, 또렷한 목소리로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붙박이장 같았던 아버지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나는 묻지 않았으나 동의했다. 우리는 늘 그렇듯 극히 말을 적게 한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를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157) 내가 가장 잘 하는 걸 할 수밖에 없었고, 역시 그건 식물을 키우는 일이었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끝에 나는 아버지 몸에서 하나의 테라리움을, “울창한 밀림”(157)을 가꾸며 신체가 시체가 되어가는 일을 막기로 했다.

자연을 떠돌겠다는 아버지의 바람은 아버지의 몸속 숲을 떠도는 나의 일로 대체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평생 동안 쌓아온 “원예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아버지 속 장기들을 긁어내고 대신 다른 걸로 채웠다.”(157) 아버지의 몸은 테라리움의 유리 용기와 같은 껍데기 역할을 했다. 다만 테라리움에서는 내부의 작은 식물 생태계를 위해서 유리 용기라는 틀이 필요하다면, 이 경우에는 반대이다. 껍데기인 아버지의 몸을 살리기 위해, 내부의 식물 생태계가 필요하다. 식물이 죽으면, 아버지는 죽는다. 식물에게, 식물을 가꾸는 나와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한다.(282)

무언가를 가꾸는 일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무언가를 미루는 일이기도 하다. 식물을 가꿈으로써 죽음을 미루기 위해 나는 “다양한 열대 식물들, 최소치 빛과 수분으로 작은 생태계를 존속할 수 있는 수종들을 엄선했다.”(157) 균형 잡힌 테라리움은 십 년도 넘게 유지될 수 있다. 물의 순환과 빛의 합성, 식물 생태계의 자기 보존을 위한 두 조건을 성립시키기 위해 나는 미네랄이 풍부하고 깨끗한 토양을 아버지 몸속에 야트막하게 채워 넣었으며, 식물 뿌리가 썩지 않도록 물이 토양에 잘 고이게 했다. 또한 “안방엔 암막 커튼을 치고 붉은 등을 켜놓고”(152) 지냈다. 붉은빛의 스펙트럼은 식물의 광합성을 촉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광 스펙트럼이다. 우리의 계획은 한 단계씩 정교하게 실행되어 갔다. 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몸속 식물에게 “살아있는 온기로 뭐든 증명”해주기를,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249)

“골과 굴”(262)
그렇게 몇 년간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피와 숨을 불어넣었”으며 “그 피와 숨이 한때 죽었던 아버지의 태엽을 감아”주었다.(156) 식물이 낮 동안 광합성을 통해서 산소를 배출하고, 밤에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호흡활동을 지속하는 동안 아버지의 몸은 함께 숨 쉬는 듯 했다. 아버지의 입에서는 시취 대신 “산뜻해지는 기분”(153)이 들게 해주는 식물의 향기가 났으며 몸에는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무섭게 자라나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로, 나와 어머니가 함께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덕에 아버지의 몸이 “부패하는 속도가 나름 서서했”(155)으나, 부패를 멈출 수는 없었다. “피처럼 붉은 등 아래서도 아버지가 썩어 가는 중이라는 사실은 부정 못 했다.”(155) 아버지의 몸은 “흔히 시체가 부패하면 그렇다는 듯이 가스가”(155) 찼고, 오기가 생겼던 나는 이를 막기 위해 “척박한 토양을 단시간에 녹화하고 비옥하게 해줄, 번식력 좋으면서도 수명이 짧은 수종”을 찾아다녔다. (157-158) 오엽송을 분갈이하며 키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아버지의 몸에서 분갈이를, 아니 식물갈이를 계속해서 해야만 했다. 이를 반복할수록 아버지의 몸속 장기는 상당 부분 처분되었고, 아버지의 몸은 진정 얇은 유리 용기를 닮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둘째로, “여러 번 속을 다시 비우고 썩은 살들을 쳐내 분갈이”(157) 하는 과정에서 긁어낸 아버지의 장기와 살, 그리고 뿌리가 썩어버린 식물들을 어디에 처분해야 할지 곤란했다. 썩은 덩어리들의 무게와 부피는 상당했고, 어머니와 나는 더 이상 이를 안방 옷장에 방치해두다가 새벽 즈음 심장을 졸이며 어딘가에 버리고 오는 방식으로 할 수는 없었다. 방치하는 날이 늘어날수록 “부패한 생물이 풍기는 썩은 내”가 진동했고, (268) “썩어 가는 짚단이나 낙엽 더미처럼 고린 온기가 안방에 돌”았다.(152) 식물을 키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어떠한 사명감과 기쁨을 느끼는 나였지만, 차츰차츰 아버지 몸 속 식물 생태계를 지속시키는 데에 내가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어머니가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몇 년간 그래왔듯 ‘항구토제’(289)를 먹으며 하루를 시작했던 평범한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그걸 먹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먹기 싫다는 문장을 어머니 앞에서 소리 내어 말했다. 그 생각을 그날 처음 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견디기 힘들 때마다 늘 그래왔듯이, 나는 그날도 발코니의 식물들을 쳐다보았다. 입동이 막 지난 시기였다. “한층 사늘해진 바람이 불어오면서 발코니 천장에 매달린 서양 송악이 종교 의식에 쓰이는 향로처럼 엄숙하게 주기 운동을 했다.”(155) 일정한 속도로 흔들리는 서양 송악을 바라보는데, 파도소리가 향로 연기처럼 피어올라 내게로 왔다.

몸이 지쳐 보러 간 지 오래된 오엽송이 나를 기다리며 부르는 목소리. 그곳으로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곳이라면 아버지의 일부를 식물들에게 고스란히 줄 수 있었다. 산을 떠돌겠다고 한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면서, 아버지가 산을 떠도는 대신 산이 되는 것은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집을 곧장 나왔다. 어젯밤에 긁어낸 썩은 장기와 식물들이 터질 듯 담긴 비닐봉지, 그리고 조경 도구가 가득 든 가방도 함께였다. 나는 유기질 비료로서 오엽송에게 줄 수 있었는데 지금껏 왜 버리기만 급급했을까 한탄했다. 오엽송을 만나기 위해, 아버지의 썩은 살과 장기를 나의 오엽송에게 주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그 산으로 갔다.

마스크를 쓰고 모든 일들을 행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얼굴 표정이 그때 어떠했는지, 즐거웠는지, 슬펐는지, 냉담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은 바람이 차가웠고 입고 간 외투가 얇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찾아온 산은 “군데군데 진녹색 이끼가 핀 듯 보이는 소나무 군락을 제외하면 볼품없이 헐벗은 모습이었다.”(263) “물오리나무나 아까시나무, 삼엽송 같은 수종이 척박한 땅에서 제 원래 높이까지 자라지 못하고 이리저리 흉측하게 휘었다.” 아버지의 몸속 척박한 토양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는 식물들을 닮은 모습이었다. 산에 온 지 한두시간이 지났을 때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빗소리도 소곤소곤하게 들릴 만큼 사위가 고요했다.”(114)

차가운 비를 맞으며 나는 오엽송을 찾아 “길 없는 산속을 휘적휘적 내려갔다. 경사가 급격해지면서 점차 골이 형성되어 갔다.”(266) 오랜만에 찾아온 산길이었으나 오엽송의 위치를 잊어버릴 리는 없었다. 가는 도중 곳곳에 보이는 “메마른 골에는 고목들이 아래 자락을 향해 쓰러져 썩어갔고 가공을 거친 네모 넓적한 돌들이 아무 데에나 흩어져 있었다. 녹화 사업 시절 세운 돌층계 모양 사태막이가 대부분 무너진 것이었다.”(266) 조경 일을 하다보면 흔히 보이는 풍경으로, 태풍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차가워지는 공기와 계속해서 조금씩 내리는 비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흐린 하늘 중앙에 희미한 광원이 자리했지만 산속은 따사롭기는커녕 축축한 냉기가 감돌았다.”(265) 봉투에 담긴 장기들도 그 온기를 잃어갔다.

“죽어 가는 이의 낯같이 거무죽죽한 산”(269)길을 이리저리 헤쳐 오엽송에 다다랐을 그때, “거꿀달걀꼴 낙엽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목련 잎이었다. 회갈색으로 시든 넓적한 잎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266) 소나무 군락 사이 자리 잡은 일본목련은 이질적인 동시에 익숙했는데, 그건 어릴 적 내“가 살던 집 앞에 심긴 나무”였기 때문이다.(266) 오엽송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그 나무에게로 나는 이끌리듯 향했다. 초겨울의 목련은 추워보였다. 목련은 내게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목련의 결핍을 들었고, 가방에서 조경 장비를 꺼내 그 밑줄기에 “사람 한 명이 엎드려서 드나들 수 있는 작은 굴”을 파기 시작했다. (267)

모든 일은 천천히 확신을 담아 이루어졌다. 일을 마치면 산으로 와 “커다랗고 검은 구멍”(267) 을 파는 일을 한 달 넘게 반복했다. 더불어 그 입구를 숨기기 위하여, 나는 “이국적인 외양의 덩굴 식물로” “은밀히 파낸 석굴”을 덮었다. (268) 덩굴은 몇 달 만에 석굴의 입구를 가려버렸다. 겨울은 너무도 빠르게 다가왔다. 그렇게 골 사이 굴을 만들고는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썩은 살과 식물들을 묻어야 할 때마다 지체하지 않고 그 굴을 찾아갔다. 덩굴 식물을 헤집어 굴 안으로 들어가면 “속에 있는 모든 걸 게우고 씻어 내야 겨우 지워질 역겨운 냄새”가 났다. (268) 그럼에도 내가 키우기에 실패한 것들을 묻어가며 다른 식물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다. 바닷바람이 느껴졌던 그 산의 작은 솔숲과, 그 솔숲을 헤쳐 갔던 골 사이 굴 근처에는 이제 나의 오엽송과, 일본목련 그리고 아버지의 일부가 함께했다.

숲으로(277)
나와 어머니는 그 겨울과 함께 몇 번의 계절을 지나친 후 찾아온 여름, 열기와 함께 끊임없이 부패하는 아버지-식물에 대해 단념해야 했다. 한때 싱그럽던 아버지는, “기어이는 살아 있다고 믿기지 않을 만치 온기가 없는 그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247) 우리는 이런저런 방법을 모두 시도해 본 상황이었고, 어머니와 나는 다시 눈을 맞추었으며, 우리는 “포기함으로써 마무리”했다. (247) 아버지의 많은 일부는 산이 되었다. “이 완결된 한마디를 내뱉기 위하여 그동안의 끔찍한 고백이 필요”했던 걸까. (218)

그 모든 일이 있고 나서 어느 날, 어머니와 내가 집과 멀지 않은 “교외 저수지”(161)에 갔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함께 이곳에 머물다 시들어 죽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113) 나는 그게 혼잣말인지, 내게 대답을 요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답답하기보다 싱그럽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떠돌기를 원했고, ‘두 아들 또한 집을 떠나 나와 어머니 둘만’ 함께 지낸 지 오래되었다.(151) 다만 나는 그토록 나 자신과 분리해 내고 싶었던 집에서 이제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발코니 식물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뿌리내리길 원했다. 내가 유일하게 평생을 믿어온 일은 식물들이 내 곁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일, 나 또한 그들 곁에서 뿌리내리는 일의 꾸준함과 정직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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