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이달의 고전

제5도살장

커트 보니것

『양철북』 & 『제5도살장』

•공통 키워드: All this happened
•비교 키워드: 기억의 회상 VS 시간 여행

귄터 그라스는 청년 시절 나치의 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뒤 문학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려 했다. 커트 보니것은 드레스덴 폭격을 경험한 뒤, 포로로 잡혀 있었던 도살장을 개조한 수용소를 작품에 담아냈다. 작품의 비현실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all this happened more or less(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

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

 다음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어쨌든, 전쟁 이야기는 아주 많은 부분이 사실이다. 첫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동시에, 작품 전체를 배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커트 보니것의 분신으로도 보여지는 화자 ‘나’는 제2차 세계대전과 드레스덴 폭격에 관한 책을 쓰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나’의 서술은 이 책이 출간될 당시의 외부상황, 동시대를 보여주며 액자의 바깥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액자의 내부 이야기는 ‘빌리 필그림(Billy Pilgrim)’의 일대기를 따라가는데, 빌리가 전쟁 포로로서 직접 겪은 드레스덴 폭격이 이야기의 한 축이 되고, 빌리가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온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겪은 일이 또 한축을 이루고 있다. 빌리는 1944년 ‘시간에서 풀려나’ 무작위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 트랄파마도어인과의 조우는 이 시간 여행에 통찰력을 제공하는데, 이 외계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인식하는, 지구인과는 다른 시간 관념을 가진 생물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실제로 일어났던 ‘모든 일’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인가? 커트 보니것은 빌리 필그림과 마찬가지로 1922년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당한 후 포로가 되어, 도살장을 개조한 ‘제5도살장’이라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드레스덴 폭격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 커트 보니것은 에세이집 『나라 없는 사람』에서 이십삼 년이 지나 1968년이 되어서야 드레스덴 폭격을 묘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드레스덴에 관한 논픽션을 쓰기로 계약했지만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았고, 드레스덴의 동료인 버니 오헤어를 만나 재미있는 소재를 찾는다. 그 때 버니의 아내 메리 오헤어가 한 말이 실마리가 되어 이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다시 더 앞으로 돌아가서, 제목을 확인해보자. 제5도살장 혹은 소년 십자군 죽음과 억지로 춘 춤. 그 아래에는 작가 소개가 이렇게 적혀있다. 

커트 보니것
오래전 전투력을 상실한 미국 보병 정찰대원으로서, 전쟁 포로로서, ‘엘베 강의 피렌체’라고 부르는 독일의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했고, 또 살아남아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것은 비행접시를 보낸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이야기들을 약간 전신문체적이고 정신분열증적인 방식으로 다룬 소설이다. 평화를.

  커트 보니것은 평화를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이 집필된 시기는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미국 내에 반전시위가 확산되던 때였다. 시간이 흘러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분열증적인 방식으로(혹은 흔히 이야기하는 메타픽션 기법으로), 새로운 소설 형식을 통해 작품이 전개된 이유는,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말하려는, 강력한 진실을 전하려는 작가의 방식이다.      
  
+ So it goes(뭐 그런 거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 나온 후에는 꼭 So it goes. 라는 문장이 나온다. 작품 내에 총 106번 등장한다고 한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체념과 작가의 냉소가 드러나는 표현이다. 

+ 메타 픽션(Meta fiction)
작가가 독자에게 이것이 허구의 작품 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을 가리킨다. 메타 픽션을 연구한 최초의 비평가 중 한명으로 유명한 패트리샤 워(Patricia Waugh)의 정의에 따르면 메타 픽션은 허구와 실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인공물인 자신의 위치에 자의식적이고 체계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소설이다. 

+ Film
「제5의 도살장」, 조지 로이 힐, 1972
104분, 컬러
「스팅」, 「내일을 향해 쏴라」 등으로 알려진 조지 로이 힐 감독이 커트 보니것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원작의 에피소드를 충실히 살려 2차 세계대전 당시 드레스덴을 배경으로 외계인에 납치당한 주인공 빌리 필그림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죽음의 순례자라는 제목으로 TV 방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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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이달의 고전

『양철북』 & 『제5도살장』

•공통 키워드: All this happened
•비교 키워드: 기억의 회상 VS 시간 여행

귄터 그라스는 청년 시절 나치의 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뒤 문학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려 했다. 커트 보니것은 드레스덴 폭격을 경험한 뒤, 포로로 잡혀 있었던 도살장을 개조한 수용소를 작품에 담아냈다. 작품의 비현실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all this happened more or less(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

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

 다음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어쨌든, 전쟁 이야기는 아주 많은 부분이 사실이다. 첫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동시에, 작품 전체를 배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커트 보니것의 분신으로도 보여지는 화자 ‘나’는 제2차 세계대전과 드레스덴 폭격에 관한 책을 쓰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나’의 서술은 이 책이 출간될 당시의 외부상황, 동시대를 보여주며 액자의 바깥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액자의 내부 이야기는 ‘빌리 필그림(Billy Pilgrim)’의 일대기를 따라가는데, 빌리가 전쟁 포로로서 직접 겪은 드레스덴 폭격이 이야기의 한 축이 되고, 빌리가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온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겪은 일이 또 한축을 이루고 있다. 빌리는 1944년 ‘시간에서 풀려나’ 무작위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 트랄파마도어인과의 조우는 이 시간 여행에 통찰력을 제공하는데, 이 외계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인식하는, 지구인과는 다른 시간 관념을 가진 생물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실제로 일어났던 ‘모든 일’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인가? 커트 보니것은 빌리 필그림과 마찬가지로 1922년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당한 후 포로가 되어, 도살장을 개조한 ‘제5도살장’이라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드레스덴 폭격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 커트 보니것은 에세이집 『나라 없는 사람』에서 이십삼 년이 지나 1968년이 되어서야 드레스덴 폭격을 묘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드레스덴에 관한 논픽션을 쓰기로 계약했지만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았고, 드레스덴의 동료인 버니 오헤어를 만나 재미있는 소재를 찾는다. 그 때 버니의 아내 메리 오헤어가 한 말이 실마리가 되어 이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다시 더 앞으로 돌아가서, 제목을 확인해보자. 제5도살장 혹은 소년 십자군 죽음과 억지로 춘 춤. 그 아래에는 작가 소개가 이렇게 적혀있다. 

커트 보니것
오래전 전투력을 상실한 미국 보병 정찰대원으로서, 전쟁 포로로서, ‘엘베 강의 피렌체’라고 부르는 독일의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했고, 또 살아남아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것은 비행접시를 보낸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이야기들을 약간 전신문체적이고 정신분열증적인 방식으로 다룬 소설이다. 평화를.

  커트 보니것은 평화를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이 집필된 시기는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미국 내에 반전시위가 확산되던 때였다. 시간이 흘러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분열증적인 방식으로(혹은 흔히 이야기하는 메타픽션 기법으로), 새로운 소설 형식을 통해 작품이 전개된 이유는,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말하려는, 강력한 진실을 전하려는 작가의 방식이다.      
  
+ So it goes(뭐 그런 거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 나온 후에는 꼭 So it goes. 라는 문장이 나온다. 작품 내에 총 106번 등장한다고 한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체념과 작가의 냉소가 드러나는 표현이다. 

+ 메타 픽션(Meta fiction)
작가가 독자에게 이것이 허구의 작품 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을 가리킨다. 메타 픽션을 연구한 최초의 비평가 중 한명으로 유명한 패트리샤 워(Patricia Waugh)의 정의에 따르면 메타 픽션은 허구와 실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인공물인 자신의 위치에 자의식적이고 체계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소설이다. 

+ Film
「제5의 도살장」, 조지 로이 힐, 1972
104분, 컬러
「스팅」, 「내일을 향해 쏴라」 등으로 알려진 조지 로이 힐 감독이 커트 보니것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원작의 에피소드를 충실히 살려 2차 세계대전 당시 드레스덴을 배경으로 외계인에 납치당한 주인공 빌리 필그림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죽음의 순례자라는 제목으로 TV 방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