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이달의 고전

만엔 원년의 풋볼

남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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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함께 읽을 고전>
『도시와 개들』&『만엔 원년의 풋볼』
•키워드: 집단 광기와 폭력


진실을 말할까? (중략) 나는 한 사람의 인간이 그 말을 해버리면 남에게 살해당하든지 자살하든지 머리가 돌아 버려 눈 뜨고 볼 수 없는 반인간적인 괴물이 되어 버리든지, 그중 어느 것인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진실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었어. 
 
일본에 두번째 노벨 문학상을 안겨 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상당수는 그의 온화한 인상과 성품으로부터 기대하는 바와 달리 결코 읽기 수월하지 않다. 그중에서도 그의 대표작인 『만엔 원년의 풋볼』은 가장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도입부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머리와 얼굴을 온통 붉은색 페인트로 칠하고 항문에 오이를 쑤셔 넣고 벌거벗은 채 목을 매> 죽은 화자 네도코로 미쓰사부로의 친구 에피소드는 충격적이지만, 그가 죽은 명확한 이유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오에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살아남은 자에게 절대로 전해지지 않는 영역의 무언가>에 이끌려 가는 <감각>을 소설의 출발점에 놓는다.

그것은 그와 동생 다카시가 1960년 안보 투쟁과 그 이후의 생활에서 좌절하고 고향인 숲 골짜기 마을로 귀향한 이후, 100년 전인 만엔 원년에 벌어진 관군에 대한 농민 반란의 지도자였던 증조부의 동생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대립으로 이어진다. 다카시가 증조부의 동생이 형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면서 영웅시하는 데에 대해, 미쓰사부로는 그가 증조부의 도움을 받아 도망갔을 뿐이라고 일축한다. 산 자를 매료시키는 죽은 자의 <전달 불가능한 어떤 것>을 둘러싼 해석의 차이는 전후 혼란기에 죽은 네도코로 가문의 S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동생 다카시가 S형이 조선인 부락을 습격해 싸우다가 영웅적으로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미쓰사부로는 그것은 기억의 조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즉, 미쓰사부로에 의하면 S형은 첫 번째 조선인 부락 습격 시 조선인을 죽였기 때문에 이를 상쇄하고자 두 번째 습격 당시 속죄양이 되어 스스로 죽는 역할을 자청했을 뿐이라고. 

이렇게 『만엔 원년의 풋볼』은 공동체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에서 죽은 자를 신화화하고 이를 반복하고자 하는 자와 이를 해체하려는 자 사이의 갈등을 그리고 있는데, 이러한 대립 구도의 설정은 이 소설이 연재되던 1967년 일본의 담론장에서 메이지 100주년인가 전후 20주년인가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과 관련된다. 공동체 역사의 기원에 가로누워 있는 폭력을 신화화하고 이를 반복하려고 하는 동생 다카시와, 어떠한 폭력이라도 이를 신화화하거나 반복하는 것을 거부하려고 하는 형 미쓰사부로는 각각 당시 일본 담론장에서 폭력을 둘러싼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전자는 헌법을 개정해서 폭력 행사권을 손에 쥐려는 세력을, 후자는 전쟁권을 부정하는 전후 일본 헌법을 옹호하며 이에 근거해 어떠한 폭력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세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카시는 마을 청년들과 축구팀을 결성하며 힘을 키우고, 마침내 그들과 함께 폭동을 일으켜 자본의 힘으로 마을을 지배하고 있는 슈퍼마켓을 약탈하며, 심지어는 형수인 나나코와 간통을 저지르고, 결국에는 마을의 처녀를 강간하고 살인하기에 이른다. 청년들의 신뢰를 잃어버려 막장에 몰린 그는 자신의 <진실>, 즉 자신이 과거에 지적 장애가 있었던 여동생을 근친상간했음을 미쓰사부로에게 고백한 후 엽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다카시의 <폭력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싶은 욕구와 그런 자신을 처벌하고 싶은 욕구 사이의 분열은 그렇게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동생의 죽음 후 미쓰사부로는 뒤늦게 증조부의 동생이 도망간 것이 아니라, 지하에서 자기 유폐의 시간을 가진 후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는 봉기를 지도해 성공시켰음을 알고 전율하는 한편, 그 사실을 모른 채 폭력의 연쇄 속에 갇혔던 동생을 막지 못한 데에 마음을 아파한다. 
 
고통의 총량을 내부에 꽉 닫아 넣어 바깥쪽에서 들여다보는 눈에 대해서는 조용하고 무표정했던 고양이의 눈, 그 고뇌를 자기만의 소유로 하고 타자에 대해서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고 있던 고양이의 눈. 그와 같은 눈을 하고 자신의 내부에 지옥을 견디고 있는 인간에 대한 상상력을 나는 가지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카시가 그와 같은 인간으로서 새로운 삶의 방도를 탐색하는 노력에도 시종 비판적이었다. 
 
이 소설에서 오에는 단순히 <폭력>에 눈을 감은 채로 평화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 생전에 봤던 <지옥>에 대해 상상력을 가질 것을 제안한다. 물론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오에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을 저지른 자를 단죄하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받고 구원을 찾음에도 찾을 수 없어서 더 큰 폭력에 손을 대려고 하는 폭력의 연쇄를 끊는 것이었다.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폭력>을 저지른 자의 <내면>에 다가가야 한다는 오에의 신념과 그에 기반한 글쓰기는,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가 단순히 언어상의 공염불로 그치지 않는, 치열한 내적 투쟁의 산물이었음을 보여 준다.

 
+ 리뷰

『만엔 원년의 풋볼』은 뛰어난 문체로, 현재와 소과거와 대과거의 착종된 이야기를, 지하 감옥의 발견이라는 멋진 해결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해결로 오에 씨가 <나>를 방기함으로써 그의 감각적 세계는 정말로 구조적인 것이 되었다. 이 소설 안에서 만나는 오에 특유의 몽마적인 현실은 거기에 정서적인 넓이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간만에 깊은 소설적 체험을 맛보았지만 동시에 <나>의 하강 감각, 멸망 감각(근대)에 의해, 폭력, 집단, 영웅주의(신화)를 비판한다는 이 소설의 시점 자체는 반드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본 근대 문학 전래의 방법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_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친구』와 『만엔 원년의 풋볼』-다니자키상 심사평『友達』と『万延元年のフットボール』-谷崎賞選後評」, 『주오코론中央公論』 1967년 11월호(도쿄: 주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 
 
1965년 이후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우경화의 길로 접어든 미시마 유키오도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풋볼』에 대해서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동시기에 미시마도 일본의 근대화 이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장편소설인 『풍요의 바다』를 집필, 연재하고 있었는데, 폭력과 영웅주의에 있어서 양자는 완전히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시마는 오에의 인공적인 문체만이 아니라, 소설의 구조, 전체를 감싸는 특유의 퇴폐적이며 악마적인 분위기까지 극찬하고 있다. 이는 오에가 사실상 소설의 주제와 관련된 정치적 메시지만이 아니라,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자신을 압도하게 되었음을 시인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시기에 미시마의 『오후의 예항午後の曳航』을 영어로 번역 소개했던 번역가 존 네이슨은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 체험個人的な体験』을 읽고 충격을 받은 후, 『풍요의 바다』의 번역 요청을 거부하고 오에 번역에 매진하여 그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일조하게 된다.
 

+ 비하인드 스토리

오에 겐자부로의 난해한 문체는? 
오에 겐자부로의 대부분 소설 속 문체는 이른바 <자연스러운 일본어> 문체와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려고 한다. 이러한 문체의 탄생에는 아내의 오빠이자 절친이었던 영화감독 아타미 주조의 충고가 있었다고 한다. 대학 재학 시절에 쓴 「기묘한 아르바이트」가 『도쿄대학 신문』에 게재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이후 오에는 학생 작가로서 각종 문예지에 단편들을 발표했다. 거의 하루에 한 편을 쓰는 그의 페이스를 보고 이타미 주조는 그런 식으로 쓰면 작가 생활을 오래 할 수 없다고 비판했고, 이를 수용한 오에는 이후 초고를 바로 발표하지 않고 여러 번 고쳐 쓰게 되었다고 한다. 퇴고의 과정에서 그의 문장은 자연스러운 일본어와 멀어지면서 독자적인 문체를 확보하게 된 셈인데, 이는 훗날 오에가 이른바 <아름다운 일본>과 언어 세계를 강조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대립적인 위치에 자리 잡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 함께 읽을 고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풋볼』은 일본 국내적으로는 동시기에 발표되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와 나란히 비교되며 함께 읽히고 있지만, 국외적으로는 같은 해에 발표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비견될 만하다. 양자가 모두 1백 년이란 시간을 직선적이 아니라 원환적, 반복적으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숲과 정글로 인해 외부로부터 고립된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국가 및 인류 전체의 역사와 신화를 알레고리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백년의 고독』이 남미 특유의 과장적이면서도 낙천적인 톤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면, 『만엔 원년의 풋볼』은 어두우면서도 반성적인 톤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렇지만 서구의 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국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국경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문학 작품은 명실상부한 세계 문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 함께 읽을 오에 겐자부로의 대표작

『개인적 체험』(도쿄: 신초샤新潮社, 1964)
『동시대 게임同時代ゲーム』(도쿄: 신초샤新潮社, 1979)
『타오르는 숲燃えあがる緑の木』(도쿄: 신초샤新潮社, 1993~1995)
『만년양식집晩年様式集』(도쿄: 고단샤講談社,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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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이달의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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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함께 읽을 고전>
『도시와 개들』&『만엔 원년의 풋볼』
•키워드: 집단 광기와 폭력


진실을 말할까? (중략) 나는 한 사람의 인간이 그 말을 해버리면 남에게 살해당하든지 자살하든지 머리가 돌아 버려 눈 뜨고 볼 수 없는 반인간적인 괴물이 되어 버리든지, 그중 어느 것인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진실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었어. 
 
일본에 두번째 노벨 문학상을 안겨 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상당수는 그의 온화한 인상과 성품으로부터 기대하는 바와 달리 결코 읽기 수월하지 않다. 그중에서도 그의 대표작인 『만엔 원년의 풋볼』은 가장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도입부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머리와 얼굴을 온통 붉은색 페인트로 칠하고 항문에 오이를 쑤셔 넣고 벌거벗은 채 목을 매> 죽은 화자 네도코로 미쓰사부로의 친구 에피소드는 충격적이지만, 그가 죽은 명확한 이유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오에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살아남은 자에게 절대로 전해지지 않는 영역의 무언가>에 이끌려 가는 <감각>을 소설의 출발점에 놓는다.

그것은 그와 동생 다카시가 1960년 안보 투쟁과 그 이후의 생활에서 좌절하고 고향인 숲 골짜기 마을로 귀향한 이후, 100년 전인 만엔 원년에 벌어진 관군에 대한 농민 반란의 지도자였던 증조부의 동생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대립으로 이어진다. 다카시가 증조부의 동생이 형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면서 영웅시하는 데에 대해, 미쓰사부로는 그가 증조부의 도움을 받아 도망갔을 뿐이라고 일축한다. 산 자를 매료시키는 죽은 자의 <전달 불가능한 어떤 것>을 둘러싼 해석의 차이는 전후 혼란기에 죽은 네도코로 가문의 S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동생 다카시가 S형이 조선인 부락을 습격해 싸우다가 영웅적으로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미쓰사부로는 그것은 기억의 조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즉, 미쓰사부로에 의하면 S형은 첫 번째 조선인 부락 습격 시 조선인을 죽였기 때문에 이를 상쇄하고자 두 번째 습격 당시 속죄양이 되어 스스로 죽는 역할을 자청했을 뿐이라고. 

이렇게 『만엔 원년의 풋볼』은 공동체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에서 죽은 자를 신화화하고 이를 반복하고자 하는 자와 이를 해체하려는 자 사이의 갈등을 그리고 있는데, 이러한 대립 구도의 설정은 이 소설이 연재되던 1967년 일본의 담론장에서 메이지 100주년인가 전후 20주년인가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과 관련된다. 공동체 역사의 기원에 가로누워 있는 폭력을 신화화하고 이를 반복하려고 하는 동생 다카시와, 어떠한 폭력이라도 이를 신화화하거나 반복하는 것을 거부하려고 하는 형 미쓰사부로는 각각 당시 일본 담론장에서 폭력을 둘러싼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전자는 헌법을 개정해서 폭력 행사권을 손에 쥐려는 세력을, 후자는 전쟁권을 부정하는 전후 일본 헌법을 옹호하며 이에 근거해 어떠한 폭력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세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카시는 마을 청년들과 축구팀을 결성하며 힘을 키우고, 마침내 그들과 함께 폭동을 일으켜 자본의 힘으로 마을을 지배하고 있는 슈퍼마켓을 약탈하며, 심지어는 형수인 나나코와 간통을 저지르고, 결국에는 마을의 처녀를 강간하고 살인하기에 이른다. 청년들의 신뢰를 잃어버려 막장에 몰린 그는 자신의 <진실>, 즉 자신이 과거에 지적 장애가 있었던 여동생을 근친상간했음을 미쓰사부로에게 고백한 후 엽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다카시의 <폭력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싶은 욕구와 그런 자신을 처벌하고 싶은 욕구 사이의 분열은 그렇게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동생의 죽음 후 미쓰사부로는 뒤늦게 증조부의 동생이 도망간 것이 아니라, 지하에서 자기 유폐의 시간을 가진 후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는 봉기를 지도해 성공시켰음을 알고 전율하는 한편, 그 사실을 모른 채 폭력의 연쇄 속에 갇혔던 동생을 막지 못한 데에 마음을 아파한다. 
 
고통의 총량을 내부에 꽉 닫아 넣어 바깥쪽에서 들여다보는 눈에 대해서는 조용하고 무표정했던 고양이의 눈, 그 고뇌를 자기만의 소유로 하고 타자에 대해서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고 있던 고양이의 눈. 그와 같은 눈을 하고 자신의 내부에 지옥을 견디고 있는 인간에 대한 상상력을 나는 가지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카시가 그와 같은 인간으로서 새로운 삶의 방도를 탐색하는 노력에도 시종 비판적이었다. 
 
이 소설에서 오에는 단순히 <폭력>에 눈을 감은 채로 평화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 생전에 봤던 <지옥>에 대해 상상력을 가질 것을 제안한다. 물론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오에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을 저지른 자를 단죄하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받고 구원을 찾음에도 찾을 수 없어서 더 큰 폭력에 손을 대려고 하는 폭력의 연쇄를 끊는 것이었다.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폭력>을 저지른 자의 <내면>에 다가가야 한다는 오에의 신념과 그에 기반한 글쓰기는,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가 단순히 언어상의 공염불로 그치지 않는, 치열한 내적 투쟁의 산물이었음을 보여 준다.

 
+ 리뷰

『만엔 원년의 풋볼』은 뛰어난 문체로, 현재와 소과거와 대과거의 착종된 이야기를, 지하 감옥의 발견이라는 멋진 해결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해결로 오에 씨가 <나>를 방기함으로써 그의 감각적 세계는 정말로 구조적인 것이 되었다. 이 소설 안에서 만나는 오에 특유의 몽마적인 현실은 거기에 정서적인 넓이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간만에 깊은 소설적 체험을 맛보았지만 동시에 <나>의 하강 감각, 멸망 감각(근대)에 의해, 폭력, 집단, 영웅주의(신화)를 비판한다는 이 소설의 시점 자체는 반드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본 근대 문학 전래의 방법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_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친구』와 『만엔 원년의 풋볼』-다니자키상 심사평『友達』と『万延元年のフットボール』-谷崎賞選後評」, 『주오코론中央公論』 1967년 11월호(도쿄: 주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 
 
1965년 이후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우경화의 길로 접어든 미시마 유키오도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풋볼』에 대해서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동시기에 미시마도 일본의 근대화 이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장편소설인 『풍요의 바다』를 집필, 연재하고 있었는데, 폭력과 영웅주의에 있어서 양자는 완전히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시마는 오에의 인공적인 문체만이 아니라, 소설의 구조, 전체를 감싸는 특유의 퇴폐적이며 악마적인 분위기까지 극찬하고 있다. 이는 오에가 사실상 소설의 주제와 관련된 정치적 메시지만이 아니라,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자신을 압도하게 되었음을 시인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시기에 미시마의 『오후의 예항午後の曳航』을 영어로 번역 소개했던 번역가 존 네이슨은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 체험個人的な体験』을 읽고 충격을 받은 후, 『풍요의 바다』의 번역 요청을 거부하고 오에 번역에 매진하여 그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일조하게 된다.
 

+ 비하인드 스토리

오에 겐자부로의 난해한 문체는? 
오에 겐자부로의 대부분 소설 속 문체는 이른바 <자연스러운 일본어> 문체와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려고 한다. 이러한 문체의 탄생에는 아내의 오빠이자 절친이었던 영화감독 아타미 주조의 충고가 있었다고 한다. 대학 재학 시절에 쓴 「기묘한 아르바이트」가 『도쿄대학 신문』에 게재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이후 오에는 학생 작가로서 각종 문예지에 단편들을 발표했다. 거의 하루에 한 편을 쓰는 그의 페이스를 보고 이타미 주조는 그런 식으로 쓰면 작가 생활을 오래 할 수 없다고 비판했고, 이를 수용한 오에는 이후 초고를 바로 발표하지 않고 여러 번 고쳐 쓰게 되었다고 한다. 퇴고의 과정에서 그의 문장은 자연스러운 일본어와 멀어지면서 독자적인 문체를 확보하게 된 셈인데, 이는 훗날 오에가 이른바 <아름다운 일본>과 언어 세계를 강조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대립적인 위치에 자리 잡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 함께 읽을 고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풋볼』은 일본 국내적으로는 동시기에 발표되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와 나란히 비교되며 함께 읽히고 있지만, 국외적으로는 같은 해에 발표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비견될 만하다. 양자가 모두 1백 년이란 시간을 직선적이 아니라 원환적, 반복적으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숲과 정글로 인해 외부로부터 고립된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국가 및 인류 전체의 역사와 신화를 알레고리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백년의 고독』이 남미 특유의 과장적이면서도 낙천적인 톤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면, 『만엔 원년의 풋볼』은 어두우면서도 반성적인 톤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렇지만 서구의 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국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국경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문학 작품은 명실상부한 세계 문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 함께 읽을 오에 겐자부로의 대표작

『개인적 체험』(도쿄: 신초샤新潮社, 1964)
『동시대 게임同時代ゲーム』(도쿄: 신초샤新潮社, 1979)
『타오르는 숲燃えあがる緑の木』(도쿄: 신초샤新潮社, 1993~1995)
『만년양식집晩年様式集』(도쿄: 고단샤講談社,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