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함께 읽을 고전>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여명』
•키워드: 감각의 끝
20세기 초 뮌헨. 50대 초반의 존경받는 작가 구스타프 폰 아셴바흐는 힘든 집필을 마치고 기분 전환을 위해 산책을 나간다. 그는 묘지 근처에서 뭔가 낯설고 외국인처럼 보이는 남자를 본다. 이 소설에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기묘한 남자’ 중 첫 번째이다. 이때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아셴바흐를 엄습한다. 베네치아로 가는 길. 그는 이번에는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한 채 애처롭게도 젊은이들 틈에 끼려고 애쓰는 노인을 본다. 아셴바흐는 혐오감을 느낀다. 세 번째 이상한 남자는 곤돌라 사공이다. 그의 해골 같은 얼굴과 불쾌한 태도에 아셴바흐는 중간에 내려 달라고 한다. 하지만 곤돌라에 누웠을 때 마치 관에 들어가 쉬는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을 그는 기억한다.
리도 호텔에 도착한다. 폴란드 가족 여행객들 속에서 그는 소년 타지오와 마주친다. 그는 타지오의 아름다움에 놀라고 완전히 사로잡힌다. 이후 아셴바흐는 호텔 공용 공간과 해변에서 타지오를 훔쳐본다. 그는 오직 타지오를 만나는 시간을 중심으로 하루 일정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는다. 그러나 아셴바흐는 소년도 뭔가 자기 시선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시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보고와 징후가 나타난다. 관광업으로 살아가는 베네치아 당국은 상황을 은폐하는 중이다. 아셴바흐는 소독제 냄새나 귀에 들리는 수군거림으로 사태를 짐작하게 되고, 마침내 어느 영국인 주재원의 입을 통해 콜레라 발생 사실을 확인한다. 당연히 즉각 떠나야 한다. 아셴바흐는 짐을 꾸린다. 그러나 어떤 착오로 출발이 지연됐을 때, 그는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면서 탈출을 ‘그만둔다’. 남기로 결정한 그의 마음에는 안도감이 차오른다. 자신과 이 도시가 구제불능이라는 점에서 같다는 생각이 그를 만족시킨다.
타지오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이제 전혀 제어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그는 베네치아 거리에서 타지오를 멀리서 따라다니다가 거의 탈진한다. 아셴바흐는 악몽을 꾼다. 자신의 모든 악취와 짐승 같은 정욕이 완전히 고삐가 풀려 광란의 도가니를 연출하는 꿈이었다. 깨어난 그는 더 이상 타인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그는 젊어 보이려고 머리를 염색하고 화장을 한다. 앞에서 혐오감을 줬던 화장한 노인과 똑같이 된 것이다. 기력이 없고 열이 심한 상태에서 그는 해변에 앉아 타지오를 지켜본다. 타지오는 바다 쪽으로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본다. 그게 아셴바흐에게는 어떤 부름처럼 보인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려다가 그만 쓰러져 죽는다.
토마스 만(1875~1955)은 북독일의 상업 도시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 하인리히 만 역시 저명한 소설가이다. 곡물상이자 시의회 의원이었던 아버지는 만이 10대였을 때 타계했고, 이후 가족은 일련의 재정적, 사회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만의 작품에는 재산, 체면, 시민적 가치가 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남독일의 뮌헨으로 이주한 그는 본격적으로 창작에 몰두했다. 첫 장편 소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1901)은 상인 집안의 3대에 걸친 몰락을 그린다. 이 소설의 대성공으로 그는 인정받는 작가가 되었고, 이후 노벨 문학상(1929) 수여 이유에는 이 작품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1905년, 그는 유대계 명문가 출신의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결혼했다. 자식 여섯을 낳은 이 결혼은 분명 행복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불안정한 것이었다. 정신적으로 만은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비밀에 부쳐졌던 그의 이런 성향은 작가 사후 일기가 공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자신의 욕망을 공공연히 추구하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위신을 잃는 위험을 그는 결코 감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만은 서구 “문명”과는 구별되는 독일 “문화”라는 개념을 옹호하는 보수적 민족주의 입장을 취했다. 종전 후 그는 입장을 바꾸어 1920년대에는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가장 유명한 소설 중 하나인 『마의 산』(1924)에는 그의 세계관의 변화가 드러나 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자 만은 망명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스위스로 갔지만 결국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요셉과 그의 형제들』(1933~43), 『파우스트 박사』(1947)와 같은 후기의 대작들을 썼다. 그는 전시 방송에 출연하여 파시즘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아이러니하면서도 공감에 차 있으며 가볍게 유머러스한 만의 문체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시민 사회의 질서와 규율을 비난하기보다 경탄하는 입장을 취한다. 동시에 그것들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예리하게 드러낸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현대인의 조건과 정신적 위기를 다른 작가들이 모방할 수 없는 경지에서 차분하고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만은 1955년 취리히에서 타계했다. 만은 괴테 이후 독일 최대의 작가로 불린다. 그것은 단순히 위대하고 유명한 작품을 낳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천재성은 도덕적 지성이었고 그는 이를 가지고 미, 예술, 천재, 시민, 삶 같은 개념들을 20세기라는 변화된 조건에서 성실하게 탐구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1912년에 발표된 중편 소설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토마스 만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이다. 데뷔 후 그가 써왔던 중단편 소설들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하다. 『노이에 룬트샤우』에 2회로 나누어 발표된 뒤 1913년 단행본 초판 8천 부가 즉각 매진되었고, 연말까지 1만 8천 부가 팔렸다. 1930년까지 총 8만 부가 팔렸다. 이 책의 줄거리나 주제를 추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바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소설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이것은 예술 작품이며, 문장 하나하나 구절 하나하나가 각자의 역할을 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이런 책은 어떤 아이디어 하나로 써내려갈 수 있는 게 아니며 그건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토마스 만의 평생의 고민 중 하나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쓸 당시의 필력을 과연 되찾을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구스타프 아셴바흐라는 인물의 모델이 누구인지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유력한 것은 19세기 독일의 시인이자 동성애자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살았던 아우구스트 폰 플라텐이다. 1911년 타계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에게서 이름과 외모의 특징을 따왔다는 설도 있다. 영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1971)은 말러의 음악을 사용하고 주인공의 직업도 작곡가로 바꾸어, 소설을 지나치게 말러와 연결지은 느낌이다. 그러나 말러와 토마스 만 모두와 가깝게 지냈던 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두 사람이 서로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즉 토마스 만은 말러를 단지 사진으로만 보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셴바흐의 모델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소설에서 그가 예술가 전체를 대표한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를 구체적 인물로 생각하며 균형을 맞출 필요도 있는 것이다. 아셴바흐는 예술가이자 사색가이다. 그는 형식과 규율을 숭배한다(아폴론적 질서). 이 숭배는 그를 버티게 하는 윤리에 가깝다. 그러나 아름다움 그 자체에 노출되었을 때 아셴바흐의 규율과 자제는 붕괴하고 만다(디오니소스적 혼돈). 그는 마지막까지 타지오라는 미를 어떻게든 그의 예술 창작 안으로 통합해 보려고 시도하나, 실패한다. 왜일까–근본적으로 아셴바흐는 이미 사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지오와 미’에 대한 그의 사색은 실은 욕망의 백일몽으로, 자신이 여전히 예술가인 척 스스로를 속이는 연극이 되어 있었다. 미 앞에서 질서는 버티지 못한다. 만의 이런 비관적인 결론은 예술가와 시민 사이의 균형과 중도적 길을 제시했던 초기작 『토니오 크뢰거』(1901)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것이다.
처음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결말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았다. 주인공이 바람직하지 않은 욕망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성애자인 젊은 문인이 편지로 해명을 요구했을 때, 토마스 만은 동성애는 이 소설의 핵심 주제가 아니며 단지 노년의 괴테가 17세의 소녀 울리케 폰 레베초에게 빠졌던 일화를 가볍게 변주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토마스 만의 동성애적 성향이 밝혀진 뒤, 모든 것은 바뀌었다. 풍자적 인물로 보였던 아셴바흐는 어느 틈에 만의 감정적 대리인, ‘작가 대신 죽은 사람’이 된 것이다.
동성애는 이 소설을 이해할 때 가장 어려운 측면이다. 과거 많은 이들이, 특히 학교에서 가르칠 때, 이 책의 동성애적 요소를 억누르거나 무시하고 그저 상징으로 취급해 왔다. 독자들은 이제 동성애를 소설에 쓰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다만 열린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당대 동성애자들에게 친숙했던 암시를 우리가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이것은 주석이나 해설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주제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욕망의 대상 타지오가 14세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동성애라고 뭉뚱그려 얘기해도 괜찮을까? 정확하게 소아성애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것은 분명 오늘날의 잣대이며, 그 전에 당시 통용되던 연령관을 참조해야 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이 개념을 적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불편함은 급상승하고, 해석의 좌표는 바뀐다.
벤저민 브리튼에 의해 오페라로, 루키노 비스콘티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1971)은 소설과 말러 교향곡 5번을 유명하게 하는 데 기여했지만, 당연히 원작과는 차이가 있다. 아셴바흐는 여기서 작곡가이다. 그런데 직업의 변경보다, 예술관의 변경이 더 주목할 만한 차이 같다. 소설에서 아셴바흐는 형식과 미 사이에 어려운 균형을 추구한 고전주의자였다. 영화 속의 아셴바흐는 사회가 영감을 제약한다고 믿는 후기 낭만주의자이다. 둘의 차이는 타지오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소설에서 타지오는 균형의 파괴자였다. 영화에서 타지오는 예술적 영감이 된다. (주인공이 인습을 넘어설 각오를 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영화는 좀 더 영상화에 적합한 선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비교는 역설적으로 소설이 왜 아셴바흐를 그런 인물로 설정했는지에 대한 시사를 준다.
아셴바흐는 데카당이라기보다는 고전주의적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는 인생에서뿐 아니라 예술에서도 억압적인 규율을 내면화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므로, 미와 욕망 앞에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파괴되는 과정이 더 시간이 걸리고, 더 자기기만적이고, 더 흥미로운 것이 된다. 그는 자신이 파괴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만 인생과 예술 중 무엇을 지켜야 할지를 모른다. 무엇이 무너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며, 이미 예술을 인생의 규율 같은 것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본인도 둘을 구분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주의가 내세우는 균형도 이미 위험한 타락일지 모른다. 그것은 예술을 인생 비슷하고 무해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미와 예술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예술은 이미 너무나 파괴적이라고 만은 쓴다. 예술은 현실의 모든 것을 미학화했고, 미학화된 현실은 도취에 무력하게 부서질 준비를 마친 듯하다. 그것이 현대이며, 소설들 중 예술 작품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이 책은 기이하게도 이후 20세기의 역사-미학적 도취가 도덕적 이성을 무력화한-를 조용히 예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글: 김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