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함께 읽을 고전>
『앵무새 죽이기』&『빌러비드』
•키워드: 언더 더 스킨
“이 나라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 한곳이 있습니다. 가난뱅이와 록펠러를, 백치와 아인슈타인을, 무식쟁이와 대학총장을 동등하게 하는 인류의 공공기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곳은 바로 이 법정입니다. “
『앵무새 죽이기』20세기 미국 사회에서 횡행하던 인종차별의 문제를 통해 법과 정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진정한 공동체의 의미와 휴머니즘이라는 주제를 매우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1960년대에 발표되어 출간된 지 반세기를 훌쩍 넘기고 있는 이 작품은 1930년대의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인종차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박해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인종은 단지 무수한 차별의 원인들 중 가장 겉으로 드러나기 쉬운 이유일 뿐, 현대사회는 수 없이 많은 이유-나이, 학력, 성별, 지역 등-로 존재하는 차별이 횡행한다. 미세한 차별의 원인은 인종과 같이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지 않기에 더욱 더 교묘하고 사악하게 작용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회적, 문화적 차별의 원인을 의식하지 못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떠한 차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사회의 나와 다른 “무고한 앵무새”를 다치게 하거나, 혹은 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가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고전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차별에 대한 경종, 자신도 모르게 “앵무새를 죽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인종의 문제를 다루면서 당대의 특수한 사회현실의 비판정신을 표현했고, 차별의 일상성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얻게 되었다.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메이컴이라는 가공의 장소에서 어린 소녀 스카웃 핀치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성장기 아이의 단순한 관찰과 경험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그 순수한 관점으로 사회를 꿰뚫어 보는 통렬한 비판의 기록이다.
작품의 서술자인 스카우트 핀치는 오빠 젬, 그리고 아빠인 애티커스와 함께 살고 있는 앨라배마의 작은 마을 메이컴에 살고 있다. 다들 대공황으로 고통받고 있는 시대였지만, 애티커스는 저명한 변호사여서 핀치 가족은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 비해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어느 여름, 젬과 스카우트는 여름 동안 놀러 온 딜이라는 소년과 친구가 되어, 세 사람은 함께 어울리게 된다. 딜은 근처에 있는 '래들리 저택'이라 불리는 집에 흥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신비스러면서도 으스스했던 저택에서 아이들은 몇가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경험한다. 딜이 메이컴에서 보내는 여름의 마지막 밤, 세 아이는 래들리 집 마당에 몰래 들어가게 된다. 갑자기 놀라서 도망치던 중 젬은 바지를 잃어버리게 되는데, 다시 찾아가 보니 바지는 수선되어 울타리에 걸려 있었다. 이 사건은 결국 나중에 래들리와 아이들과의 따뜻한 교감에 대한 중요한 복선이 된다.
“모든 변호사들은 말이다, 그의 생애 중 한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공판이 한 가지는 있는 거란다”
메이컴은 매우 인종차별적인 백인 사회였다. 하지만, 애티커스는 백인 여성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하기로 한다. 인종차별이 일상화된 곳에서, 흑인을 변호하기로 한 애티커스의 결정을 백인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아이들마저도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게 된다. 흑인을, 그것도 강간혐의를 받고 있는 흑인을 변호한다는 것은 메이컴 사람들에겐 일종의 배신과 같은 것이었다. 톰 로빈슨의 재판이 시작되고, 피고인이 지역 감옥에 수감되자 그를 처형하려는 폭도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애티커스는 재판 전날 밤 폭도들과 맞선다.
재판 당일, 아이들은 마을 흑인 시민들과 함께 '유색인종 전용 발코니'에 앉는다. 법정에서 애티커스는 톰을 범인으로 지목한 마옐라 유웰과 그녀의 아버지 밥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명백히 입증한다. 사실인즉, 마옐라가 톰 로빈슨에게 접근했고, 이것을 아버지에게 들키자 수치심과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 톰을 강간으로 고소한 것이다. 애티커스는 마옐라 얼굴의 상처가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고, 톰의 무죄를 입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으로만 구성된 배심원단은 그를 유죄로 판결한다. 무고한 톰은 이후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총에 맞아 죽는다. 재판 이후, 젬의 정의에 대한 믿음은 크게 흔들리고 그는 절망과 의심에 빠지게 된다. 애티커스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 밥 유웰은 아이들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 아이들과 교감이 있었던 부 래들리가 나타나 구해주게 된다.
애티커스 핀치는 톰 로빈슨의 사건을 맡게 되면서, 그 사건이 자신의 경력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이웃집 여인을 성폭행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흑인 톰 로빈슨의 재판은 마치 법정 드라마를 소재로 한 영화처럼 빠르고 박진감 넘치게 진행된다. 법과 정의가 실현되도록 마련된 백인들의 법정은 역설적으로 인종차별이 실제로 어떻게 얼마나 부당하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소가 되면서 독자들의 분노와 성찰을 이끌어낸다.
“그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니까. 흑인들은 반은 백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백인은 백인대로 그들을 멸시하지. 그러니까 어중간하게 백인도 흑인도 아닌 채 살아가면서 어쩌지도 못 하나봐.”
아이들은 이미 인종으로 차별과 배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법을 알기엔 아직 어린 아이가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의 묵묵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이는 사회와 법정과 판사들에게 문제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아이의 성찰이 더 깊어지면서, 『앵무새 죽이기』는 사회 전체의 도덕적, 법률적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으로 확장되며 ‘성장소설’과 ‘법정소설’을 결합하는 독창적 형식을 이루게 된다.
애티커스 핀치는 무고하게 누명을 쓴 로빈슨을 변호하면서 결국 유죄판결로 예정되어 있는 듯한 “이미 끝난” 사건을 변호했다. 핀치는 결과를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법정에서의 패배는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애티커스의 신념이 제도 바깥에서 진정한 정의를 지탱하고 있음을 역설한다. 이러한 애티커스 핀치의 모습을 통해, 하퍼 리는 “정의란 승소가 아니라,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태도”임을 보여준다. 리가 묘사한 법정은 정의가 승리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회의 편견이 가장 교묘하게 작동하는 장소이다. 이런 면에서 『앵무새 죽이기』는 단순한 휴머니즘 소설을 넘어, 법과 윤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증오와 편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묻는 철학적 소설로 읽혀진다.
“물론 그녀는 범행을 일으키진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 사회의 전통과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에 불과합니다. 그 관념은 너무나 가혹해서 누구든 그것을 깨뜨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게 됩니다. 그녀는 참혹한 빈곤과 무지의 희생양일 뿐입니다”
작품의 제목인 ‘앵무새’는 순수함과 무해함, 그리고 사회가 쉽게 파괴하는 선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애티커스는 아이들에게 앵무새를 해치지 말라고 말한다. 이는 세상의 불의가 언제나 가장 약한 존재를 희생시킨다는 비극적 진리를 말해준다. 가장 단순하게는 바로 백인들의 인종차별에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게 된 톰 로빈슨,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톰 로빈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 래들리는 고립되어 혼자 지내는 이웃이지만, 작품 말미에서 스카웃을 구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을 깨뜨려주는 존재가 된다. 사회가 배척한 존재가 진정한 인간애를 실천하게 된다는 역설을 보여줌으로써, 하퍼 리는 우리의 편견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잘못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왜곡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아이들 뿐이다. 유죄판결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애티커스 핀치는 말한다.
“그들은 그렇게 했다. 전에도 그래 왔고, 오늘밤에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게다. 그저 아이들만이 눈물을 흘리게 되겠지”
오늘날까지 『앵무새 죽이기』는 혐오와 차별, 불의와 정의 그리고 윤리적 공동체라는 주제를 다루는 고전으로 평가된다. 현대에 들어서 그러한 사정은 어쩌면 훨씬 더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SNS 에서 넘쳐나는 증오와, 미움과 시기, 편향되고 왜곡된 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가짜뉴스, 불의와 부정의 앞에서 점점 무력해지는 군중들의 모습은 『앵무새 죽이기』가 묘사하고 있는 인간의 편견과 불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김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