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함께 읽을 고전>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하나코는 없다』
• 키워드: 코와 정체성
20세기 초, 시칠리아에 있는 가상의 도시 리키에리. 비탄젤로 모스카르다(28)는 지역 은행을 상속받은 부유한 남성이다. 소설은 그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된다. 어느날 그의 아내 디다가 무심코 그의 코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말한다. 상상도 못한 얘기지만 거울을 본 그는 아내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타인이 그처럼 다른 모습으로 그를 볼 수 있다는 게 그에게 충격을 준다. 그는 타인의 ‘모스카르다’라는 관념을 깨뜨릴 수 있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실험을 시작한다.
모스카르다는 고의적으로 자신의 평판에 손상을 입힌다. 평판이란 자신과 무관하게 타인들이 멋대로 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왜 이러지?’라고 그들이 생각할수록 모스카르다는 성공하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은행 관계자들과 처가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가 어딘가 불안정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어떤 문제가 있었거나. 대략 반년이 흐른 뒤 결혼은 거의 파탄에 이르고, 모스카르다는 사회적으로 신용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모스카르다가 미쳤다는 게 모두에게 분명해진다. 그는 자신이 설립을 지원한 구빈 시설에 들어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낸다. 그러나 그것이 꼭 불행인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그는 타인이 부여한 고정된 정체성, 고정된 사회적 역할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데 안도한다. 그는 매 순간 새로 태어나고 사라진다. 세상은 모스카르다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었으나, 그들의 낙인이 찍힐 위험에 노출된 자아는 다행히도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867~1936)는 이탈리아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다.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공부하며 문헌학자가 되는 훈련을 받았다. 엄밀하게 텍스트를 분석하는 태도는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으나, 그의 분석 대상은 곧 고전 문헌에서 일상생활 속의 허구로 바뀌었다. 이후 그는 희곡을 통해 근대 부르주아 사회가 ‘인간’을 이해하는 안락한 전제들을 뒤흔드는 데 주력했다.
1903년, 피란델로 집안의 주 수입원이던 유황 광산이 홍수로 침수되어 집안은 경제적 위기에 빠졌다. 광산에는 피란델로 아내의 지참금까지 투자되어 있었다. 아내는 충격을 받고 쓰러진 뒤, 끝내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지 못했다. 광기는 피란델로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고, 그는 이를 도덕적, 인식론적 문제로 다루었다. 정확히 미쳤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판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1904년 발표된 장편 소설 『고 마티아 파스칼(Il fu Mattia Pascal)』은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립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를 세계인에게 알린 것은 희곡이다.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Sei personaggi in cerca d'autore)」(1921)은 관습적인 무대를 파괴하고 연극 제작 자체를 연극의 소재로 삼았다. 「앙리 4세(Enrico IV)」(1921) 등과 함께 현실의 재현 과정을 관객 앞에 드러낸, 20세기의 자기의식적인 연극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연극하는 사람들(관객도 포함하여)을 보여주는 연극’이라는 아이디어를 피란델로가 처음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가장 중요한 주제의 자리로까지 밀어올린 것은 그의 공이었다.
피란델로는 1920년대에 파시스트당에 가입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그의 예술은 정치적 확신의 표명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고정된 정치적 입장이나 세계관을 불확실한 것으로 보여주는 것이 피란델로의 세계이다.
피란델로는 193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1936년 로마에서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작가였던 그는 40편의 희곡, 7권의 장편 소설, 200편이 넘는 단편 소설을 남겼다. 그는 유언에서 시신을 화장할 것(가톨릭 관습에 반대하여), 화환도 추모 연설도 없는 간단한 장례를 치를 것을 당부했다. 현대 연극의 혁명가이자, 평생 단일하고 통일된 자아가 성립할 수 있는지 회의적이었던 작가다운 부탁이었다.
1926년 출간된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Uno, nessuno e centomila)』은 피란델로의 마지막 장편 소설이다. ‘단일한 정체성’에 대한 그의 철학적 탐구의 최종편이다. 제목이 불교적 느낌을 주지만, 그 관련성은 작가에 의해 부인되었다. 중편 소설보다 조금 더 긴 정도의 분량이지만 집필은 힘들어서 피란델로의 아들의 회고에 의하면 1909년경부터 쓰기 시작해서 15년 걸려 완성했다. 작가가 가졌던 애착은 분명하지만,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이나 『고 마티아 파스칼』과 비슷한 수준의 인정과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심오한 유머를 담고 있다”는 작가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분위기가 암울하고 줄거리도 허무하게 종결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신병을 앓았던 아내의 그림자를 이 책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주체의 위기’를 표현한 소설로 이후 실존주의 소설을 예견케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1인칭 화자의 정신적 붕괴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고골과 톨스토이, 루신 등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광인 일기’ 계열의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고골 등과의 차이는 주인공과 작가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지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모스카르다의 자발적 추락을 묘사하는 이 소설은 내향적이고 철학적이지만, 한편으로 그의 행위가 사회적인 반응이기도 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 소설의 질문은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이다. 여기서 자아는 너무나 철저하게 사회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그와 전혀 일체감을 갖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만일 타인들 각자가 나에 대해 다른 판단,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판단을 하고 있을 경우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느 버전이 진짜일까? 내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첫 장면의 비스듬한 코는 세계가 그리 정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모스카르다의 세계가 붕괴할 것임을, 또는 이 세계에서 모스카르다가 이탈할 것을 암시한다. 모스카르다는 그렇게 느낀다. 공포는 이 소설에서 가장 지배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모스카르다의 탐구가 그의 부유함에 너무 의존한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돈이 그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는 나중에 재산을 모두 내려놓는다. 그런 점은 20세기의 여러 구도(求道) 소설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런 일관성이 이 소설의 난점이다. 소설은 모스카르다의 편에 서서 고정된 정체성을 공격하지만, 이 공격은 결국 ‘모스카르다’라는 일관된 인물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다.
독자들이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종착지를 그리 대단한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타인들이 그에게 낙인을 찍고 어떤 역할을 주문할 염려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가가 사회로부터의 퇴거라면 너무 비싼 것 아닐까. 이미 그에게 ‘광인’이라는 낙인이 내려졌다. 모스카르다가 그건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예전에 그가 두려워한 다른 낙인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독자들은 이 소설을 사회적 호명과 역할을 거부할 때 발생하는 일에 대한 코믹한 우화로 볼 수도 있다. 마치 이 소설은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와 다중 페르소나를 예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모두가 모스카르다처럼 당황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 다른 점도 있다. 모스카르다는 타인의 오해 가능성에 너무나 큰 유감을 갖고 있어서 완전히 현대인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내세운 카뮈의 『이방인』(1942)이 이 소설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멀게 느껴지는 건, 뫼르소가 늘 하는 말, “뭐 상관 없다”는 말을 모스카르다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모스카르다의 모든 실험은 시작할 필요도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모스카르다는 민감한 영혼이며 명료함과 정확성을 추구하는 수학자와 같다. 그러나 명료함이 삶을 재구성하지는 못했고, 비범한 감수성은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스카르다의 1인칭으로 여과 없이 전달되는 자기 연민의 느낌 때문에 우리는 소설을 하나의 아이러니라기보다는 특이한 개인의 집착으로 바라보게 된다.
- 김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