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생활
부럽다 엘리자베스
부럽다! 엘리자베스 처음부터 편견을 가득 품고 읽을 수밖에 없는 책 ‘오만과 편견’ 이미 많은 매체들을 통해 스토리는 알고 있었다. 오만 가득한 다아시라는 ‘재수’가 결국 편견으로 가득했던 나의 왕자님이 되는 스토리. 모든 로맨스 소설의 원류라고 일컬어지는 이야기이다. 서로를 오해하고 편견으로 미워하다가 결국 좋아하는 감정이 싹트고 결국 사랑하게 되는 결론. 심지어 남자 주인공은 왕자님. 이 소설은 읽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가지고 있는 책의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실패했었다. 그래도 내용은 알아야지 라는 생각에 영화로도 접했고 오래전에 방영된 BBC의 드라마까지 찾아두었다. 심지어 드라마는 좋아하는 배우 콜린퍼스가 다아시 역을 맡는다. (참고로 콜린퍼스는 이 역할로 영국에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니, 눈에 하트가 그려진다.) 하지만 긴 호흡의 드라마는 못 보는 타입이라 드라마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읽기 전부터 여자 주인공은 키이라 나이틀리(영화 속 여 주인공) 남자 주인공은 콜린퍼스로 지정되었다. 소설원작의 영화나 드라마를 본 이후 책을 읽을 때의 단점은 이미 시각화된 이미지가 머릿속에 들어있어 자유로운 상상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번역이 안 좋은 이런 소설을 읽을 때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다아시에 콜린퍼스를 앉혀놓고 읽으니 그 오만 마저도 사랑스럽기만 했다. 소설의 배경이 18세기이니, 왜 이래? 하고 배경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의 재산이 딸에게 상속되지 못한다는 충격. 결국 베넷가의 어머니가 그토록 천박하게 딸들의 결혼에 목매는 이유는 재산이 상속되지 못해 그녀들이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거 아니겠는가.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베넷부인을 품위 없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녀가 전혀 천박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행동이나 말이 가벼운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런 사람은 세상에 널렸다. 그녀는 자신의 딸들의 행복한 미래만이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였다. 물론 그런 목표를 가지고도 고고한 품성의 사람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런 귀엽고 생각이 말과 행동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람도 나쁘지 않다. 혹으로 꿍꿍이를 가지고 음흉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더욱 천박하다 사실 모든 인간의 내면이 베넷여사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다들 세간의 평가를 고려해 조심하며 사는 거지. 두 번째로 소설을 읽으며 18세기 귀족들은 좋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딱히 노동하지 않아도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여행을 다니고 아침이면 치장을 하고 저녁이면 무도회에 참석하거나 사람들을 초대해 시간을 갖는다. 뭐 이런, 호화로운 삶이 있어. 부럽다. 18세기에 태어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귀족으로 태어나고 싶다. 잠깐 본 드라마에서 실내에서는 파티가 진행 중인데 밖에서는 더럽고 냄새날 것 같은 사람들이 진흙길에서 이게 진짜 춤이지 라며 춤을 추었다. 아마 그들은 귀족들이 데리고 온 마차꾼이거나 하인들이었겠지. 18세기에 잘못 태어나서 신분이 미천했다면 어땠을까. 아이고. 케서린 부인은 어쩌다 보니 콜린즈와 친분이 있고 그가 결혼한 이후 신혼집에 방문해서는 갖가지 충고를 한다. 신분이 높고 콜린즈의 생계와 명예에 적잖게 영향을 끼친다는 건 알겠는데 남의 집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건 아니지 않나.라는 현대적인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당시는 작은 네트워크의 사회. 인맥과 인물평 그 외등등 소문이라는 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던 사회이니 뭐,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마지막에 엘리자베스에게 다아시의 청혼을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 (혹은 캐서린 자신을 위해) 거절하라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이 할머니 선 세게 넘네.라는 생각을 했다. 이전에 엘리자베스는 속으로는 못마땅하면서도 그냥 넘어갔다.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할머니가 뭔데 악기를 배워라 마라에요) 하지만 결국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에 대한 캐서린할머니의 충고에는 대차게 할 말을 한다. 이 부분은 꽤 통쾌했다. 그래, 캐서린도 한 번쯤은 이런 면박을 당해봐야지. 마지막에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대화에서 다아시는 본인이 신분다운 교육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오만함에 대해서는 한 번도 충고를 듣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되었다는 고백을 한다. 이 고백이 다아시의 모든 행동 중 가장 매력적이었다. 본인 스스로 이제까지 자신의 삶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걸 심지어 말로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용기는 쉬운 게 아니다. 혼자만 몰래 알고 싶은 본인의 부끄러운 부분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솔직히 이야기한다는 건 꽤 멋졌다. 다아시 만세. 나는 속물이다. 그래서 다아시 같은 왕자님이 나타나길 기다리다 결국 혼자 살고 있다. 생각이 통하는데 심지어 상상불가의 재산가인 남자가 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기다려 주고 한번 더 청혼해 준다면 앗싸. 아니, 나라면 첫 번째 청혼에서 이미 고마워서 넙죽 절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다아시는 외모도 근사하게 나온다(내 안에서 그는 콜린퍼스다) 아니, 사랑에 안 빠질 수 있겠냐는 말이다. 신분 차이로 그가 나를 눈에 들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조금 경멸하는 것 같다면 좀 소심해지고 본인의 처지가 안타깝기는 하겠지만,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데, 노 땡큐를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나는 정말 자신 없다. 당장 두 손 모으고 “네 저도요.” 할 것 같다. 다아시 내게 오라.
눈먼 자들의 도시
예전에 영화 개봉했을 때 관심 가졌던 작품인데, 영화 시놉시스로 줄거리 파악하고 난 뒤 책으로는 읽어보지 못했어요. 대충 어떤 내용이겠거니 생각만 했던 작품인데, 이번에 읽는 생활에서 1월 이달의 고전책으로 선정되었길래 맘먹고 읽어봤습니다. 눈먼 자들 속에서 유일한 눈뜬 자의 시선으로 진술하는 이야기들에서 인간의 본능, 인간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하는 책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대사 중 '우리는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었습니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영화로 봐서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글로 낱낱이 서술되는 인간의 저열한 본성은 끔찍하고 역겨웠다. 작가가 펼쳐놓은 잠깐의 디스토피아는 인간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정말 세상이 그 지경이 되면 선과 악, 옳고 그름은 필요 없는 걸까? 극한의 상황에서는 오직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까? 책을 덮을 때까지도 답은 얻지 못했다. 다만 시력을 회복한 그들의 남은 삶은 이전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적어도 시력이 있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이전의 삶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더불어 나라는 인간도 극한의 상황에서 최소한의 인간성은 유지할 수 있길 빌어본다.
양심의실명
문명은 시력이 아니라 양심으로 유지됨을... 내면의 실명, 양심의 실명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필력에 빨려들듯 읽어내려갔습니다.
현실인가 환상인가
E.T.A. 호프만은 인상깊은 중단편들을 주로 쓰는 작가인데, <모래 사나이>는 제가 <호두까기 인형> 이후에 두 번째로 읽는 책입니다. 이 책은 최근에 읽은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는 책 에서 고전으로 언급된 책이기도 해서 주저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모래 사나이는 아이들의 꿈에 등장한다는 무서운 Sandman의 이야기를 E.T.A. 호프만의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주인공 Nathaniel은 Clara와 결혼할 사이였는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Coppelius라는, Nathaniel이 Sandman이라고 인식한 사람에게 혹독하게 당해서 불에 타 죽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그에게 환상일까요, 악몽일까요, 아니면 현실일까요? 작가는 이 장면을 정말 환상적으로 그려내서 독자로서 혼선이 오고, 이후부터 Nathaniel이 처한 세계와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가 다 자라 성인이 되어 Clara와 막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지금 새로운 여인인 Ophilia가 나타나고, 아름답고 피아노도 잘 치는 이 여인은 말은 잘 못하지만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한없이 바라봅니다. 그런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있자니 다정다감했던 Clara와 그녀의 오빠이자 친구 Lothair는 꿈나라에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Ophilia도 Coppelius가 변신한 듯한 Coppola가 나타나면서 산산이 부서지고... 이야기는 점점 악몽처럼 변해갑니다. 작가의 이야기에 홀려서 읽다 보니 어느덧 이야기의 끝에 다다랐어요. 결론이 섬뜻하면서도, 호프만이 이 책을 썼을 시대를 생각해보니, 당시 정말 기발한 상상력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블랙 먼데이
스피드한 전개력과 그에 따른 흡입력으로 소설의 매력 중 하나를 발산하였으나 그 외에는 사유할 만한 무언가가 없다고 느꼈다. 단지 이것만으로 '소설화'에 대한 점수가 높았던 것일까? 아니면 수상작이라 하여 내 기대가 높았던 것일까? 후자인듯 하다.
우리는 아직 라이터와 성냥이 있다.
명확한 시공간의 경계 없이, 한 페이지도 채 채우지 못한 채 투두둑 끊어지는 조각글들로 구성된 이 소설을 과연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규정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근래 읽은 작품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유와 이해력을 요구한 소설이었다는 사실이다. ARSON. 한국어로 번역하면 ‘방화’라는 뜻을 지닌 이 제목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은유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아르슨」 속의 ‘불’은 단순한 재난이나 물질적 현상이 아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삶을 연명하게 하는 필수 조건처럼 읽히기도 한다. 불은 직접적인 형상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소설이 흐름과 단절을 반복하는 동안 끊임없이 변모하며 불규칙하게 일렁인다. 초반부에서 난해하게만 인식되던 작은 불의 파편들은 소설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연결되며 메시지의 윤곽을 드러낸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이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었다. ────────────── ⌦ 불꽃을 지키는 자가 미쳐 날뛰면, 불도 미쳐 날뛴다. ────────────── 「아르슨」에서 ‘외부의 불’은 인간에 의해 점화된다. 무엇을 태울 것인지, 무엇을 남겨둘 것인지를 구분하지 않은 채 그저 연소할 뿐이다. 그렇게 번져나간 불은 결국 이를 초래한 인간에게조차 적대적으로 되돌아와 커다란 피해를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야생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영양분을 얻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다시 라이터와 성냥을 집어 든다. 한 개인이 피워 올린 불은 집단 방화로 확장되고, 자연을 불태우며 환경을 오염시키고, 끝내 인간을 덮치는 연쇄적 결과를 낳는다. 이렇듯 모든 인간은 연쇄 방화를 저지르는 방화범이자 공범이다. 반면 ‘내부의 불’은 우울과 불안, 불면, 무력감과 같은 심리적 병증의 형태로 타오른다. 결국 「아르슨」은 두 개의 불을 통해 위기에 직면한 인간을 비추는 이야기다. 단순히 소설의 주요 주제로 강조되는 기후 위기를 넘어서, 두 개의 불로써 인간이 불러일으킨 복합적 위기, 즉 생존과 파괴가 공존하는 상태를 은유한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불에 가장 강하게 매혹되면서도,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를 입은 인물이 바로 화자와 ‘그’다. 소설은 끝내 방화범이 누구인지 단정하지 않은 채 막을 내리는데, 이는 열린 결말이라기 보다는 애초에 단 한 사람을 지목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모든 인간은 라이터와 성냥을 들고 있으며, 연소 없이 살 수 없다’는 메시지를 떠올려보면, 불을 지른 방화범은 하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하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하나의 인간을 여러 갈래로 분해해 드러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나마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르슨」은 굉장히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완독 직후, 이 달의 소설 커뮤니티에 100자 서평을 남겼는데, 그 짧은 문장 속에는 이 작품이 남긴 혼란과 어지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난해한 분출과 단속적 사유의 교차.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어렴풋이 형성되는 불의 형상과 의도된 지연. 완독 이후에만 유효해지는 독해의 재구성.”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독서록을 남기게 된 건 이 소설을 언어로 정리하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100자 서평을 읽으며 든 아쉬움은 ‘독해’라는 단어가 이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아르슨」은 이해나 해석을 요구하는 소설이라기보다, 독자의 사색을 유도하고 의미를 직접 명명하게 만드는 글에 가깝다. 실험적인 문체와 파편화된 구성 역시 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그리고 그 불을 다루는 인간 자신을 되묻게 하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블랙 먼데이
연수가 잃은 과거의 세 사람. 잃은 것인지 아님 그가 '간직한' 것인지? 불행한 사건들로 인해 그의 심연이 생긴 것인지, 아님 그의 심연이 불행을 날조한 것인지?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건 누구의 말
몇 주전 불현듯 마음에 ‘대부’ 원서를 뒤졌다. 걱정대로 내가 즐겨 인용하던 부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즐겨 인용해’ 말한 대상들이 모두 가족인지라 쉽게 Undo할 수 있었기에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마리오푸조 형님 입장에서는 자신이 쓰지도 않은 장면이 전설처럼 남을 뻔한 상황이었다. 이 진땀났던 경험을 상기하며 나는, 이 소설을 추격스릴러로 읽었다. 독특하고 재미있었다. 주인공 도이치는 결혼 25주년 기념 저녁식사에서 디저트인 홍차 티백에서 발견한 문구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를 처음 발견한다. 발화자가 자신이 평생 연구해 온 괴테이기에 그는 그 문구의 원전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도이치는 괴테의 저서들을 되짚기도, 동료 전문가들의 집단 지성에 도움을 청하기도, 나중에는 티백 문구의 Raw material을 쫓기도 하지만 좀처럼 그 위대한 독일 철학자/ 작가의 흔적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과연 괴테가 그 말을 한 적이 있기나 한 건가? 또, 그게 중요한 건가? 언어와 그것을 재료로 하는 창작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스릴러적 구조와 귀엽고 따뜻한 분위기, 한자 유희 속에서 꿈틀댄다. 초반 10%가 넘어가기 전에 괴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은 알 수 있었지만, 작가의 노고가 느껴지는 수많은 고전의 인용 속에 새삼 서양철학사나 문화사를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쿠타가와 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소설을 한달 내에 쓸 수 있는 사람을 찾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인정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 시가 바이올린이라면 소설은 피아노와 같다는 생각을 해 왔다. 시에 비해 소설에서 어린 나이에 천재성이 발현되기 어렵다는… 그런데 우리 딸과 동갑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생각의 넓이와 깊이를 접하고나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젊고 밝고 기운차고 명랑하면서도 진지한 글을 읽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이 즐거우셨다면 한국 작가 서한용의 소설들도 강추하고 싶다 (재작년 6월 등단했고 현재까지 네 편의 단편들이 월간 현대문학에 실려 있다.)
나는야 하이에나
파이 이야기 20년쯤 전에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가졌다. 당시에 이 책은 읽기 어려운 책이었다. 많은 기억들이 희미해졌고 20년이 지난 지금은 나에게 다시 어떻게 읽힐지 궁금했다. 이전의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과거보다 잘 읽혔다. 1부에서는 작가의 종교와 동물원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의 동물권에 대해 나는 무관심한 사람이다. 한 번도 강아지나 고양이를 가깝게 곁에 둔 적이 없기에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을 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던 기억은 없다. 하지만 동물원의 동물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그들의 동물권을 박탈하고 있다던가, 사자나 호랑이를 아프리카 초원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게 해줘야 한다는 이야기)는 뭐랄까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라든가 그래서 어쩌라고 같은 느낌을 주는 이야기들 뿐이다. 물론 좁고 쾌적하지 않은 환경의 동물원에 갔을 때 움직임이 적은 늘어진 동물을 만날 때면 이게 최선인가 하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동물을 그들의 원래 환경으로 보내주는 게 과연 최선일까라는 의문도 품었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동물의 생태를 생각하면 동물원도 그럴듯한 그들의 삶을 보장할 것 같지만 다시 읽어보니, ‘원래’ 라는 것, 서열이 존재하고 먹이가 부족한 환경이 그들에게 맞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동물이 스스로 선택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들에게 선택하게 한다는 것도 인간적인 사고이다. 서열문제나 먹이부족처럼 인간의 사고에서 불쾌한 것들이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종교에 대해서는 애초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비관적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를 어리석은 자들이 도망가는 쉘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이는 모든 종교의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고 각각의 종교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인다. 맞는 말이다. 모든 종교에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내가 종교를 비난했던 점은 그들이 뭉쳐서 그룹을 만들고 배타적인 성향을 가졌을 때 나타나는 폐해였다. 그런데 집단이 된 인간들은 모두 비슷한 폐해를 가지고 있다. 그 나쁜 점들의 원인이 종교가 아니라 집단성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를 가진 개인들은 어쩌면 오히려 홀리하다. 그들이 뭉쳐 집단으로 활동할 때 그들은 나와 너를 구별하고 배타성이 확대된다. 결국 파이는 신 자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한다. 2부에서는 같이 표류하는 느낌이었다. 대체로 힘들었다 하지만 문득 고독하고 고요한 밤하늘을 바라보던 파이의 감정에 공감되기도 했다. 내가 쉬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프랑스인을 파커가 발로 쳤을 때 그 숨이 끊어지는 느낌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스스로가 무척 나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든 망망대해든 고립된다면 나는 인간성을 아주 쉽게 버릴 거라고 예전부터 생각해 왔다. 목숨이 걸린 상황이기에라기보다는 우선 두려움과 공포에 잠식당해 버렸을 때 나는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 망설임을 가질까. 아니, 나는 아마 하이에나처럼 아주 쉽게 인간성을 버릴 거다. 그건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에 잠식된 동물의 행동일 것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인간성을 회복했을 때 바로 하이에나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아마 나는 소설 속 프랑스인 요리사에 가장 가까운 멘털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예상한다. 살아남는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파이는 계속해서 죽음을 두려워한다. 아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극한의 공포를 계속 느끼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겠다고 이야기해 온 사람이다. 좀비 영화를 보며, 어떻게든 살려고 가 아니라 빨리 물려서 좀비가 되어버리는 걸 선택하는 부류인 거다. 물론 정신없이 도망칠 때는 우선 도망이 목적이겠지만 정신 차리고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선택을 해야 한다면 무조건 이런 좀비행이다. 파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계속해서 삶을 선택한다. 아니 삶을 선택한 것일까 그저 살 수밖에 없었던 것 일까는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파이는 살아남는다. 삶은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2부에서의 많은 이야기들은 환상 같았다. 아름답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고 두렵고 더럽기도 했다. 3부에서 그 이야기는 결국 파이가 만들어낸 동화라는 걸 알게 된다. 결국 살아남은 인간들의 선택이다. 곧 죽을 부상을 당한 인간, 그 인간을 이용한 겁 많은 인간 그리고 비인간성에 분노하고 용서하지 못한 인간, 마지막으로 그 모든 상황에서도 결국 삶을 이어가는 선택을 한 인간. 어떤 인간도 나쁘지 않다. 그저 각자의 삶을 대하는 태도이거나 선택이다. 나는 왜 쉽게 삶을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을까. 삶의 의지가 부족한가. 왜 이렇게 자랐을까.